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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회귀본능

by 터틀곽 2022.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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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본능

(24:1~9)

 

제가 예전에 참 좋아했던 노래가 있는데요. 바로 강산에라는 가수의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이라는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뭔가 가사의 심오한 뜻을 잘 이해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 노래가 멋있어서 강산에라는 가수의 목소리가 멋있어서 자주 듣고 따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이 노래의 시작이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처럼이라는 가사로 시작됩니다. 연어라는 물고기는 강에서 태어났다가 바다에 가서 여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다시 강으로 올라와서 강에 알을 낳고 죽습니다. 모천 회귀성 어종으로 분류가 되죠. 그런데 강으로 올라가려면 해류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해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 회귀하고 산란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동물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회귀본능 혹은 귀소본능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아내를 택하여 주기 위해서 자신의 종과 언약을 맺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어제의 본문이었던 23장에 사라가 먼저 죽게 되어 막벨라 굴에 장사하는 내용이 등장하고 오늘의 본문 24장에는 1절부터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제 아브라함의 시대가 저물고 그의 아들인 이삭의 시대가 시작될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선택하셔서 그 한 사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한 민족을 태동시키시는 놀라운 섭리를 보여주십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가진 특별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미쁘심에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여기서 등장하는 늙은 종은 엘리에셀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브라함이 자녀가 없었을 당시 롯을 상속자로 택하였다가, 롯과 헤어지게 되고 자신의 집에서 길리었던 충직한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엘리에셀은 상속자가 되지 못하였고, 충직한 종으로서의 역할을 끝까지 감당하게 됩니다.

 

성경을 묵상하면서 이 엘리에셀이 가진 성품이 얼마나 신실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는데요. 아브라함이 오죽하면 이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라함과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오면서 아브라함의 모든 여정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삶으로 체험하는 인생을 살아왔겠죠. 그 여정 속에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엘리에셀은 자신의 주인인 아브라함이 자기를 상속자로까지 여기고 있음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재산을 물려받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재산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가진 명성뿐만 아니라 가문으로부터 내려오는 가풍과 그 가문이 맺어왔던 모든 관계까지도 함께 물려받게 됨을 의미합니다.

 

엘리에셀의 입장으로는 자신이 상속자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도 내심 해보지 않았을까요?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의 신분이 되어 누구를 섬기는 사람에서 누군가의 섬김을 받는 그 자리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엘리에셀은 누구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녀를 출산할 수 없는 몸의 상태를 가진 인물들이라는 것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백 세가 된 아브라함에게서, 또한 생리가 끊어진 사라를 통해서 이삭이 태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아브라함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엘리에셀은 자신의 주인인 아브라함과 함께 아브라함이 섬기는 하나님 신앙에 대해서 간접적이고, 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그것으로 생각합니다.

 

본문 2절에는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이 엘리에셀에게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라고 말합니다.

 

개역 개정에는 허벅지라고 번역하였고요, 개역한글 성경은 환도 뼈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새 번역 성경에는 사타구니라고 번역을 하였어요. 히브리어로는 야레크 라고 부르는데요. 말씀드리기 좀 민망한 신체 부위지만 오늘의 본문으로 쓰인 이 야레크는 성기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맹세하는 자가 상대방의 성기 밑에 손을 넣어서 맹세하는 것은 절대적인 복종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그 주인뿐만 아니라 그 주인의 후손에게까지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섬길 것을 나타내는 행위이기도 하였죠.

 

아브라함이 엘리에셀에게 이와 같은 맹세를 요구한 것은 자신의 아들인 이삭까지도 그 종에게 의탁하고 있는 그러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3절과 4절의 기록된 말씀을 엘리에셀에게 부탁하고 있는데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이삭의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으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만 보아도 아브라함이 얼마큼 엘리에셀을 신뢰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백 세에 주신 아들, 언약으로 태어난 아들의 혼인을 엘리에셀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죠. 물론 그 언약의 주체는 여기서도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너가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기를 바란다.

이삭의 아내를 이 가나안 땅이 아니라, 내 고향 나의 친척이 사는 곳에서 이삭의 아내를 찾아주길 바란다. 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죠.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도록 간절하게 요구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아들인 이삭의 아내를 지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이 아닌, 아브라함의 본토 고향과 친척 중에서 찾기를 간절히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에셀이 묻습니다. 5절의 말씀이죠.

 

만약에 제가 여인을 찾았을 때 그 여인이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요? 이삭을 데리고 그 땅으로 들어갈까요? 라고 묻습니다.

 

엘리에셀이 이처럼 묻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질문과도 같습니다. 옛 어른들이 결혼을 인륜지대사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정말 큰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죠. 이런 말도 있습니다. 바다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고, 전쟁터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러시아 속담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던 가나안 지역과 아브라함이 가라고 명령했던 곳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중에 하란 이라고 불리는 지역이었습니다. 2410절에 보면 엘리에셀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나홀의 성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 나홀은 아브라함의 할아버지의 이름이죠. 그런데 이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가나안의 거리가 한 800킬로 정도 떨어진 거리입니다. 하루에 낙타를 끌고 십 리 정도를 간다고 보았을 때 한 20일 정도는 쉬지 않고 걸어가야지만 도달할 수 있는 거리기에 가까운 지역은 아니죠.

 

그곳에서 여인을 찾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그 여인이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듣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나올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엘리에셀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주인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며느리를 얻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고향 자신의 족속에서 찾으라고 하신 것은 다시 그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타지역에서 지내는 것보다 친족들이 있고 고향에 돌아가면 이삭이 훨씬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기에 이와 같은 부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엘리에셀은 5절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

다시 말하면 딱히 나를 따라 오고자 하는 여인이 없다면 이삭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이신 거죠? 라고 아브라함에게 묻고 있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 앞서서 회귀본능에 대해서 말씀을 잠시 드렸었잖아요. 연어가 다시 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강력한 본능을 말씀드렸는데요.

 

아마 엘리에셀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아들인 이삭만큼은 고향으로 돌아가 정서적인 안정감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려고 이삭의 아내를 그곳에서 찾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향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고 향수를 일으키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 모이신 분들은 대부분 고향에서 살고 계셔서 잘 이해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만, 고향을 떠난 이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있습니다.

 

저도 본래 고향이 서울이잖아요. 그리고 또 대전에서도 한 10년 정도 지냈었습니다. 가끔 처가댁이 있는 대전이나, 또 본가가 있는 서울이나, 또 할머니가 계신 강릉을 방문하면 약간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 뛰어놀았던 골목길, 군것질을 하던 작은 가게들, 물론 많이 바뀐 부분들이 있지만, 그곳에 다시 돌아가면 좀 애틋한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대전에 가면 꼭 제가 다녔던 신학교를 한번 방문하기 위해서 노력하고요. 그리고 처음 신혼집을 꾸렸던 동네를 일부러 지나쳐서 가기도 합니다. 또 서울에 가면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가 가까운 곳에 있고요. 또 예전에 다녔던 동네 교회가 있습니다. 그곳을 걸어 다니다 보면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애틋한 감정이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엘리에셀은 그러한 정서적인 안정감이 있었던 주인의 고향. 그리고 주인의 친인척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그 땅으로 이삭과 함께 돌아가야 하나요? 라고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절대 그렇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6절의 말씀이죠 새 번역 성경에는 절대로 나의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가지 말아라. 라도 말합니다.

 

이유가 7절과 8절에 등장하죠. 새 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주 하늘의 하나님이 나를 나의 아버지 집, 내가 태어난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나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이 땅을 너의 씨에게 주겠다' 하셨다. 그러니 주님께서 천사를 너의 앞에 보내셔서, 거기에서 내 아들의 아내 될 사람을 데려올 수 있도록 도와 주실 것이다. 그 여인이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너는 나에게 한 이 맹세에서 풀려난다. 다만 나의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가지만은 말아라.“

 

아브라함이 이와 같이 단호하게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고향 땅에서 떠나가게 하시고, 내게 언약하시기를, 내게 맹세하시기를 이 땅을 지금의 가나안 땅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땅을 내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너가 택한 여인이 이 땅으로 오려 하지 않는다면 너는 나와 맺은 맹세에서 자유함을 얻게 될 것이다. 다만 이삭은 그리로 데리고 가지는 말아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향 땅을 향한 그리움보다, 이삭의 아내를 가까운 곳에서 찾고자 하는 편안한 길보다 아브라함이 기억했던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가나안은 타지였습니다. 그것도 고향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척박한 땅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끝까지 기억했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과 맺으신 언약이었고, 그 언약의 말씀이 언약을 통해 낳게 된 이삭을 통해 그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믿었던 것이죠.

 

회귀본능은 연어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회귀본능이 있냐 하면 옛사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죄악 된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 새사람이 되기 전 내가 추구하고 살았던 육신의 정욕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연어는 사력을 다해 힘들게 돌아가지만, 우리가 옛사람으로 돌아가기는 매우 쉽습니다. 오히려 물살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회귀가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연어가 회귀본능을 가지고 물살을 거스르는 사력을 다하는 것처럼 새사람으로 살고자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에 힘쓰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의 결단과 그 언약을 이루고자 하는 열심과 그것을 가장 믿음직한 종에게 의탁하는 모습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회귀본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길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새사람으로서의 거룩한 회귀본능인가요? 아니면 옛 구습을 쫓아 정욕의 본성을 향한 회귀본능인가요? 연어가 본능적으로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알아 사력을 다해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듯이 우리의 삶의 방향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향하고 새사람으로서 살아가기를 힘쓰는 회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함께 이 찬양을 고백하길 원하는데요. 주 말씀 향하여, 라는 찬양을 함께 고백합시다. 찬양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주 말씀 향하여 달려가리라, 주님의 영광 안에 살게 하소서. 이 고백이 실제로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도록 간구하는 마음으로 함께 이 찬양을 고백합시다.

 

사랑의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지 아니하고 언약으로 주신 자녀인 이삭이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행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함께 보았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 나의 삶이 주님을 향한 거룩한 회귀본능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는 삶이 되게 하시고, 또한 나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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