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갈과 이스마엘
(창 16:1~16)
오늘의 본문은 아브람이 사래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되는 장면이 기록된 장입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죠.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그리고 사래에게 하갈이라고 하는 여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사래가 출산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브람의 여정이 시작되는 12장 이전 11장에 셈의 족보에서부터 기록된 말씀입니다. 11장 30절에 보면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족보가 기록된 상황에서 굳이 사래가 임신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록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사래를 통해 이삭을 낳게 하실 것이라는 놀라운 장면을 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뜻이 담긴 구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아브람이 갈대아인의 우르 지역을 떠날 때 나이가 75세 였기 때문에 아브람이 자녀를 낳을 소망이 없는 상태였던 것은 어느 정도 확인 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기업을 이을 자로 롯을 데리고 우르를 떠났던 것이죠. 오늘의 본문 마지막 절에는 이스마엘을 낳을 나이가 86세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고향을 떠난지 10년 정도 된 시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3장에 기록된 말씀처럼 롯과 갈라지게 된 아브람은 자신의 기업을 이을자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걱정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15장에 보면 자신을 떠난 롯 대신에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정한 상황이었습니다. 엘리에셀은 아브람의 집의 가산을 살피는 충직한 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아브람의 자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서 자녀가 태어나지 않자 사래가 아브람에게 하갈을 통해서 자녀를 낳을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이 하갈이라고 하는 여종은 애굽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에 그곳에서 얻게 된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2절에 보면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래의 이 말이 태를 여시고 자녀를 낳게 하시는 일을 주관하시는 책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말처럼 들리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느껴지는 어감은 이 책임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서 자녀를 낳지 못하는 일의 책임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으니 자신이 생각한 방법으로 자녀를 낳기를 아브람에게 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일 중 하나였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나의 후손을 통해서 계속 살아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멸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고대 근동 지역 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마다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은 불이익을 받았던 사실이 많이 있었죠. 당시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을 모두 여성에게 덮어 씌웠던 나쁜 풍습이 있었던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한편으로 옛 중동지역의 관습에 따르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은 남편에게 자신의 몸종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몸종이 계속 여주인을 섬기는 한, 그 몸종에서 난 아이는 여주인의 아이로 여기는 그러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하갈이 사래의 몸종이었죠.
이와 비슷한 내용이 창세기 30장을 보면 야곱이 라헬을 통하여 자녀를 낳지 못하자 라헬이 자신의 여종인 빌하를 통하여서라도 자녀를 낳으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화가 중동 지역에 있었던 것이죠.
이제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고 하갈이 임신을 하였습니다. 자녀를 임신했다는 것은 정말 축복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아브람과 하갈을 통하여 이루어진 임신은 축복이 아니라 다툼이 시작되는 시발점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나라에도 이 역대기를 살펴보면 혈통의 문제로 엄청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도 그 일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갈은 자신이 임신을 하자 자신의 주인인 사래를 멸시하였습니다. 그러자 멸시받는 사래가 아브람에게 가서 자신이 받는 모욕에 대해 아브람에게 하소연을 하죠. 말이 좋아 하소연이지 정말 바가지를 열두 바가지 정도는 긁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람이 지혜롭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사래는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한다고 하였는데 아브람은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 마음대로 행하라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하고 하갈은 그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떠나 도망갑니다.
말 그대로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이죠. 자녀를 낳지 못해서 사래가 권한 방법으로 자녀를 임신하였더니 여종은 주인을 무시하고 주인은 화가 나서 남편에게 말하고, 남편은 나 몰라라 하고 주인은 다시 여종을 학대해서 쫓아내 버리는 한국 아침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제일 괴로운 사람이 누구일까요? 아브람일까요? 사래일까요? 하갈일까요? 다들 자기의 사정이 있고 괴로운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한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성급함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15장에 아브람에게 너의 몸에서 날 자가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당시에 사래를 통하여 나을 것이라는 약속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고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대로 일을 진행하였던 아브라함과 사래는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분열을 일으키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간 하갈은 갈곳이 없어 광야에 머물지만 천사를 만나 다시 아브람에게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물론 10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하갈의 자녀를 통하여서도 큰 민족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지만, 나를 학대하였던 여주인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 발걸음이 얼마나 괴로운 발걸음이겠습니까?.
그리고 나중에 등장하지만 결국 이삭이 태어나고 이스마엘과 하갈은 다시 한번 쫓겨나게 되는 그런 상황에 쳐해지게 됩니다.
사람의 실수와 잘못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어려움과 고난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방법대로 벌어진 일들에 있어서 책임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하갈은 여주인을 무시하였고, 사래는 그런 여종을 학대하였으며 아브람은 책임감을 가지고 가장의 역할을 마땅히 행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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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와 아브라함이 조금 더 이 상황을 지혜롭게 풀어갔다면 어땠을까요? 하갈은 사래를 멸시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사래는 임신한 여종을 더 위하여주고, 아브람은 임신하지 못했던 사래를 더 위로하여 주었다면 어땠을까요?
그 실수와 잘못들을 조금 더 선한 방법으로 풀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먼저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방법을 의지하기보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신뢰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뜻이며, 어디까지가 우리가 해야할 영역일지를 발견하는 것도 믿음 안에서 배워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일거야. 라고 생각하는 무지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가는 훈련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갈과 사래의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갈등이 아니었을까요? 제가 이 상황에 처해보지 않아서 정확하게 진단할 수는 없지만, 4절에 기록된 멸시와 6절에 기록된 학대라는 단어는 정말 부정적인 단어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감정의 흐름대로 살아가다 보니 이러한 극단적인 갈등 앞에서 깨어진 관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순간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했던 경험들이 종종 있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혀를 제어하고 감정을 다스리라는 말씀이 성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우리는 맡겨진 일에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갈등이 벌어졌을 때 이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사람은 아브람 이었습니다. 자신의 자녀를 임신한 여종을 돌보고 사래를 위로해야 하는 역할은 아브람의 역할이었죠. 하지만 아브람은 자신의 자녀가 잉태된 이 순간에도 그 가정을 돌보는 책임을 사래에게 전가하며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도록 방임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갈이 그 집을 떠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책임이라는 한자는 꾸짖을 책, 빚 책 자를 씁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꾸짖음을 당하거나 빚을 질 수도 있는 것이죠. 임자는 맡길 임자를 씁니다. 그만큼 어려운 것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책임의 자리가 무겁고 어렵기 때문에 회피하게 된다면 이러한 갈등 상황에 놓일 수도 있게 되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인 일도 책임이 따릅니다. 신자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영적인 책임입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십자가를 지는 책임이 우리에게 부여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책임을 잘 완수한다면 그에 대한 보상과 혹은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들을 책임감있게 완수하고, 또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잘 다스려서 평화를 깨는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피스 메이커로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순간적인 화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서 벌어지게 된 부정적인 사건이 있으신가요?
질문2.
나의 삶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무엇인가요? 나는 그 책임을 잘 완수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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