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창 17:15~27)
소크라테스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유명한 말을 남긴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바로 네 자신을 알라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철학적으로,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객관화 시키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것은 사실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내가 나를 주체화 시킴에 있어서 지극히 관대하거나, 또는 반대로 지극히 부정적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관적인 나를 객관화 시키는 과정을 겪어감으로 인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달아 가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기도 합니다.
요즘 그래서 유행인 것이 MBTI 라고 성격 유형 테스트를 많이 하기도 하고요. 다들 해보셨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테스트가 스마트폰으로도 있고, 또 인터넷에서도 찾아서 금방 진행할 수 있습니다. 또 애니어그램이라고 해서 나의 강점이 무엇이고 나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테스트도 많이 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내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를 조금 더 객관적이고 또 통계적으로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객관화를 위한 포괄적인 통계자료로 참고할 수 있을 뿐이지 내가 어떤 유형의 사람에 가깝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명확하게 주체화시키거나 나를 대변하지는 않습니다.
요즘 왜 이런 성격유형검사나, 이런 것들이 많이 유행할까? 라는 생각을 좀 해보면요. 나는 이런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싶거나, 혹은 어떤 상황들이 내게 주어졌을 때 내가 느끼는 여러 감정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응 내 성격은 원래 그래. 라던지, 나는 이런 유형의 사람이니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당연한 거야.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살아가다 보면 내가 이런 면이 있었나? 라고 느끼는 상황이 오기도 하고요. 또 시간이 지나면서 성격과 성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의 나와 나이가 들은 이후의 나는 좀 다른 사람인 것 같은 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계속 묵상하고 있죠. 이제 족장사가 시작되면서 아브라함의 여정을 묵상하고 있는데요. 75세때 아브람을 부르셨던 하나님께서 구십구세가 된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어 주시십니다. 어제의 본문이었죠.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는 그의 아내인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라고 하십니다.
아브람의 이름의 뜻은 높은 아버지, 존귀한 아버지 라는 뜻이었지만 아브라함이 되면서 많은 민족의 아버지, 많은 무리의 아버지 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사래와 사라의 이름의 뜻은 히브리어 사르에서 파생된 단어인데요. 이 단어는 둘 다 지배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번역하자면 여군주, 혹은 왕후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죠. 그런데 사래에서 사라 라고 하는 이름의 뜻은 여러 민족의 어머니. 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18절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75세때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바꾸어주신 나이가 구십구세 였습니다. 백살에서 한 살 모자란 나이죠.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며 너는 복이 될지라! 라고 언약하셨던 때부터 이름을 바꾸어 주신 시간의 흐름이 24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습니다.
그냥 뭐 성경에서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생각할 수 있지만요. 내 삶에 대입해보면 이 세월이 결코 만만한 세월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저에게 내가 너한테 엄청난 선물을 줄거야. 진짜 상상도 못 할 선물인데 어마어마 한거야. 모든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할 만한 선물을 줄거야. 라고 얘기를 했다고 가정해본다면, 저는 그때부터 그럼 그 선물을 도대체 언제 줄 것인가 너무 궁금하겠죠? 하루 하루가 정말 애타는 심정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선물을 안 주는거에요.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24년이 지나서 내가 그때 선물 준다고 했던 것 기억하고 있지? 라고 물어본다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이실 건가요?
저는 이렇게 얘기할 것 같습니다. 야 이 사기꾼아. 안 믿어. 무슨 선물은 선물이야. 라고 얘기하지 않을까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너무하시네요! 라고 말은 하진 않았지만 오늘의 본문 17절과 18절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속마음을 들여다본다면 아마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 그때 저하고 약속하셨을 때가 제 나이 75세였습니다. 지금은 99세가 되었고 제 아내 사래는 90세가 되었습니다. 이미 이렇게 늙어서 될 때까지 그 언약이 성취되지 않았는데 이름이 바뀐다고 몸도 바뀝니까? 이제 그만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스마엘이라도 낳았으니 이 아들이나 기억해 주시고 잘 살게 해주십시오. 라는 속마음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초입에 소크라테스 이야기를 하면서 네 자신을 알라. 라는 명언을 잠시 말씀드렸잖아요. 오늘의 본문의 아브라함을 보면 자기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객관화가 잘 되었다는 말이죠. 그리고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아내 사라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객관적으로, 통계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지금의 자신들을 통해서는 자녀를 출산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제가 이제 백살이에요. 아내는 구십살이고요. 이제 그만하세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제가 월요일에도 잠시 말씀드렸었지만 사라는 11장 족보에 기록될 때부터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라고 명시된 여인이었습니다. 아직 자녀를 낳지 못했더라. 가 아니라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원래 사라는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몸의 상태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노인이 된 아브라함과 자녀를 낳을 수 없는 몸을 가진, 또 아브라함과 같이 노인이 된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낳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위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요?
누군가 예를 들면 좋은데 참 예를 들기가 좀 민망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에도 아브라함은 엎드려서 웃었다고 했고, 사라도 다음 장인 18장에 이 말씀을 듣고 웃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로 예를 들기가 좀 민망하니까 만약에 저희 아버지 어머니를 통해서 막둥이가 태어난다면? 이라는 상상을 좀 해봤는데요.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나를 시험하지 마옵소서. 왜 나를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보인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도 분명히 웃었거든요? 이 웃음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하나님. 말도 안됩니다. 불가능합니다. 저는 할 수 없어요.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게 네게 아들을 나을 것이다. 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의 반응이 23절 아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벤 때는 구십구세였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의 포피를 베었으니 구십구세였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할례의 시행, 아브라함이 시행한 이 할례가 성경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할례입니다. 어제의 본문이지만 1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말씀은 23절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입니다. 이 할례의 행위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4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기회가 되신다면 이 로마서 4장 전체를 읽으시고 묵상하시면 아브라함을 향한 바울의 평가를 통해 아브라함의 의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가 되실거라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라를 통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하셨을 때 자기 자신을 객관화 하면서 웃기도 했습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그 약속을 믿었기에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기를 선택하고 결단 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지금까지의 아브라함의 인생의 여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아버지의 집을 떠났지만, 약속했던 땅 가나안에 가서 살다보니 가뭄이 찾아와 애굽으로 피했습니다. 애굽에서는 아내를 누이라고 했다가 왕에게 아내를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를 돌려받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오랜 세월동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사래가 자신의 여종인 하갈을 통해서 자녀를 낳자고 하여 그렇게 했더니 하갈이 본처를 멸시하고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여 여종을 쫓아냈습니다. 그때의 아브라함의 나이가 86세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13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다가 이제 갑자기 찾아오셔서 아들을 낳을 것인데 사라를 통하여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아브라함의 처지였다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아브라함의 속 마음을 일일이 다 알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미루어 짐작하기는 하나님께서 언약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하셨을 때, 속으로 웃었던 것을 보아 객관화 했던 것을 보아서 절대적이고 온전하고 순전한 믿음은 아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그 말씀대로 행하는 순종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순종이 아브라함이 붙든 의였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식선에서 살아가는 것, 객관적인 상황을 추구하는 것, 나의 성향과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아는 것, 등 지극히 일반적인 상황을 옳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다수가 하는 이야기들이 더욱 통계적으로 맞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이 통계는 수학적으로 대부분 비슷한 값을 도출해 내기 때문에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인 것, 통계학적인 것이 우리에게 훨씬 가깝고, 이질감이 없고, 안정적이고, 예상할 수 있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믿음은 때때로 주관적이시고, 비상식적이시고, 불편하고, 이질적이고, 예측할수도 없으며 내 성격과 성향을 무시하기도 하시기에 때로는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러한 믿음을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물론 살아가면서 아브라함과 같은 특별한 일들이 우리에게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가 믿음으로 선택하고, 믿음으로 결단해야 하는 시기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정말 큰 일이든지, 아니면 작은 일이든지 간에 우리의 삶에서는 끊임없는 믿음의 도전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발휘되는 순간은 바로 그 순간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그 순간 우리는 오늘 아브라함이 행했던 믿음의 결단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심령에 새겨진 할례의 언약, 마음에 새겨진 할례의 언약이 살아있다면,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신대로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실 때, 또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실 때, 그 상황이 어렵고 불편한 상황일지라도, 아브라함이 그 언약을 믿음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웠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참 믿음의 고백과 순종을 드림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선택하기를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함께 하나님께 믿음의 고백을 찬양으로 올려드리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는데요.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오늘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상식을 넘어선 말씀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언약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하고 할례를 행하였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이 믿음을 요구하실 때, 또 순종을 요구하실 때 우리의 삶을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고백으로 올려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출타 중이신 담임목사님의 국내선교회 사역을 붙들어 주셔서 그 일을 통해 많은 교회들이 새힘을 얻는 은혜가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건축가운데도 우리 주님 께서 늘 함께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뜻가운데 건축의 모든 여정이 아름답게 진행되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