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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중보자 아브라함

by 터틀곽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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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자 아브라함

(18:16~33)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물론 다른 동물들 혹은 곤충 들도 무리를 지어서 살아가곤 합니다. 그런데 동물이나 곤충이 무리를 이루는 것은 사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생존에 있어서 무리를 이루는 것이 더욱 유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상위 포식자에게 잡혀 먹지 않기 위해서 무리를 이루고, 생존을 위해서 서로 돕는 행위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생존의 이유 때문에 관계를 맺지는 않습니다. 물론 고대 사회에는 인간도 생존을 위해서 관계를 맺고 서로를 보호하는 일도 있었지만, 인간은 생존만을 위해서 다른 이들과 연대를 맺지는 않습니다.

 

우정이라는 단어가 있죠. 참 좋은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이 우정이라는 단어는 보통 오랜 시간 동안 사귐을 나눈 벗의 깊은 관계를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이 우정입니다. 오늘의 본문 17절을 보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깊은 유대관계를 보여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정말 아브라함의 입장으로서는 최고의 찬사와 감격 적인 말씀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기쁘고 감격적 일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시게 되었을까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관계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의 때부터 지금까지 등장한 여러 인물이 등장했지만, 아브라함을 향하여 내가 너에게 숨길 것이 없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이와같이 아브라함을 가까이하시고 신뢰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삶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과 맺어온 깊은 신뢰 관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서 처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 언약 이후에 아브라함의 삶의 태도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 신앙을 보시고 이와 같은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 아닐까요?

 

물론 아브라함이 늘 옳은 선택과 변치 않는 신실한 믿음의 자리에 거했던 것은 아님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애굽으로 내려가기도 했고,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는 거짓을 말하기도 하였고, 또 하나님의 언약을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하고 사라의 여종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으며 하나님께서 언약을 갱신하시면서 말씀하실 때도 속으로 웃으며 마음속으로 자신의 한계를 재단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또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즉각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신의 나이와 처지를 고려하고 상황을 판단하기보다 순종의 모습을 보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볼 수 있죠. 또 조카인 롯과 재산의 문제로 갈등을 겪을 때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신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보다 낮은 사람에게 먼저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내어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떠난 롯이 어려움에 처하자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쟁에 뛰어들어 롯을 구출 해주기도 하였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그 언약을 오랜 시간이 걸리도록 성취하지 않으셨음에도 그 언약을 가볍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99세가 되는 나이에 할례를 행하며 자기에게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든 삶을 보시고 비록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보였을지라도 또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아브라함을 믿어주시고 기다리셨음을 오늘 이 2절의 구절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이죠.

 

또 창세기 5장에는 에녹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에녹도 가까이 하셨음을 보게 됩니다. 에녹에 대한 묘사 또한 하나님과 동행했다 라는 묘사를 통해서 에녹이 어떠한 인생을 살았을지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죠.

 

이와 같이 에녹을 통해서도 또 아브라함을 통해서도 우리 인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갈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직접적인 음성이나, 환상을 통하거나 천사를 만나거나 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기록된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우리의 삶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교회 공동체의 일을 통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과 감동하심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죠.

 

우리의 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그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만 한가지 주의해야 할 사실은 이러한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서 오는 감동이나 깨달음이 어떤 선언적인 메시지가 되어 그것이 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우월감을 가지도록 하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어딜가나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라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특별한 존재인양, 그런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종종 있음을 보게 되는데요. 그것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진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말씀드립니다.

 

예언적인 말씀과 선포는 예언자를 통해서 밝히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비밀도 아니며, 숨길 일도 아니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으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미혹하는 영들에 있어서 속지 않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하나님과 관계하고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누리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우리의 신앙이 더욱 순전하여 지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을 가르쳐 주십니다.

 

18절부터 21절의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소돔과 고모라를 서로 비교하시는 듯한 화법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십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복을 얻을 것이며 그 자녀들과 식구들에게 여호와의 도를 지키게 하기 위하여 너를 택하였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악행과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그 부르짖음에 대해서 판단하시겠다고 아브라함에게 이르십니다. 21절에 보면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아닌지 보고 알려고 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만 사실 이 말씀을 보아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이미 소돔이 심판받을 것은 기정사실이었습니다. 창세기 1313절에 보면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듯이 그 사람들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셨음을 밝히 말씀하고 있죠.

 

그리고 내일과 모레의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소돔 사람의 악행이 얼마나 음란하고 악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마 소돔 사람의 죄악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소돔과 고모라 사람을 심판하실 것을 알고 하나님께 묻습니다. 의인과 악인이 함께 죽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정의를 행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라고 아브라함이 부탁을 하고있는 것이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렇다면 소돔에서 의로운 사람 50명이 있다면 그 지역을 용서하겠다고 하십니다. 그 당시 소돔의 인구가 얼만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50명이라는 인원은 그리 많은 수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후에 아브라함이 만약에 45명이라면요? 40명이라면요? 서른명이 있다면요? 스무명이라면요? 마지막으로 열명을 찾으신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라고 묻습니다.

 

시장에서 흥정하는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은 여섯 번이나 그 인원을 번복하며 소돔 땅에 진노가 임하지 않기를 돌려서 간곡히 부탁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그곳에 자신의 조카 롯이 있기 때문에 그 롯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께 간곡히 구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러자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의 거듭되는 번복에도 화를 내시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의 요구에 성실하게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열 명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구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설마 소돔에 열 명의 의인이 없겠는가? 라는 생각을 했기에 거기까지만 구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한 심판이었습니다. 이후 19장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더욱 그러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소돔에는 열 명의 의인이 없어 멸망 당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동시대에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거주하던 헤브론과 롯이 거주하던 소돔은 약 30키로 정도 되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나누시는 깊은 관계로 나아가는 복과 은혜를 누리는 사람인 반면에 롯이 거한 소돔 땅은 의인 10명이 없어 심판을 받는 지역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극명하게 갈리는 이 두 인물과 두 지역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만족과 부유함을 누리기 위하여 소돔을 선택한 롯은 곧 심판을 받게 될 처지에 놓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기뻐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과 그 언약이 더욱 강화되는 선택받은 언약의 자녀임을 확증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라는 사실입니다. 롯이 거주하고 있는 소돔 땅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신 헤브론 땅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땅들은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이 말인즉슨 나는 얼마든지 헤브론에 거할 수도 있으며, 또 얼마든지 소돔에 거할 수도 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면 아브라함의 삶의 여정이 옳은 길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것은 아브라함처럼 살아가기를 선택할 것인지, 롯처럼 살기를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 어려운 것이죠.

 

롯의 선택은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내 삶이 더욱 편안하고 안락할 수 있는 나를 스스로 경계하지 않고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것은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고 택함 받은 자녀로서 거룩함을 이루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단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으로 알고 성취해야 하고 이뤄내야 하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아브라함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시고, 또 죄악이 가득한 소돔에는 심판을 내리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단지 심판받는 것이 두려워서 억지로 순종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서 사는 그 삶이 신자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길임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생각해 볼 두 가지 질문을 나누고 말씀을 더 묵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질문 1.

나는 헤브론에 거하기를 원하나요, 소돔에 거하기를 원하나요? 나의 삶의 영역은 어디쯤에 있나요?

 

질문2.

나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음을 기쁨과 감사로 원하고 있나요? 나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다른 이들을 믿음으로 세워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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