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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by 터틀곽 2022.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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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1~11)

 

오늘부터는 전도서의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편과 함께 지혜의 다섯두루마리로 불리는 전도서는 지혜서로 분류됩니다. 예전에 몇 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전도서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는데요. 오래 전 기억이어서 전도서의 배경을 다시 한번 잠시 설명하고 오늘의 본문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데요.

 

우리가 보통 전도서를 기록한 저자가 솔로몬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유는 전도서 11절의 시작 때문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라고 시작하는 이유 때문이죠. 112절에도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솔로몬을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외에도 2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온갖 부귀를 누린 자 또 가장 지혜로운 자. 라고 자신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을 떠올리게 되죠. 하지만 전도서 어디에서도 이 저자는 자신이 솔로몬이라고 하는 명확한 증거를 대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아들, 아들로 번역된 벤 이라는 단어는 직계 아들, 혹은 생물학적 아들을 부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자손, 혹은 후손을 지칭할 때 쓰이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전도서의 저자는 자신을 교묘하게 감추면서 이 책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신을 다윗의 자손이며 예루살렘의 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솔로몬 뿐 아니라 그 이외에 어떤 왕이 이 전도서라는 책을 저작하였다면 반드시 자신의 이름을 넣었을 것입니다. 왕이 집필 활동을 하였다면 그것은 반드시 보존해야 했을 것이며 왕실을 통해서 대대로 보존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자들의 의견은 전도서의 히브리어 본문에는 아람어와 바사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이 책은 아주 후대에 기록된 책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는 제사장, 예언자, 지혜자로 구분되는 전문적인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지혜와 철학들은 여러 문학 양식을 통해서 지혜를 구전과 기록으로 전승 하였으며 그렇게 전승된 지혜들이 하나의 책으로 묶인 것이 전도서를 이루었다는 주장입니다.

 

전도서의 시작은 덧없음으로 시작됩니다. 1절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소개하고, 바로 2절에서는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말합니다. 이 헛되다 라는 단어를 헤벨이라고 부르는데요. 헤벨이라는 단어가 기억이 나시나요?

 

이 전도서의 상반부의 전체 주제가 바로 덧없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헤벨을 외친 이후에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라는 물음을 시작으로 전도자의 근본적인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너가 그렇게 수고하며 너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이 유익한것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좀 황당한 질문 같기도 합니다. 단편적으로 보자면 허무주의자 같은 탄식과도 같은데요.

 

오늘의 본문은 아니지만 13절을 보면 지혜자는 자신이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여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인생을 면밀히 관찰하고 깨달은 바가 허무하다. 헛되다, 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라. 최선을 다해서 살아라. 라고 다그치고 용기를 북돋아주어도 잘 살까 말까인데 지혜자라고 하는 사람이 내가 면밀히 살펴본즉 다 인생을 살아보니 다 헛되더라. 라고 말하며 김빠지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책은 지혜서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지혜자라고 하는 이 책의 저자는 단순한 허무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도서를 읽어가면서 발견하게 될 것이라 생각 됩니다. 큐티의 본문이 이번달과 다음달 까지는 전도서를 묵상하게 될 것 같은데요. 함께 전도서를 묵상하시면서 이 지혜서 안에 담긴 삶의 지혜들을 또 고대 히브리인들이 노래했던 지혜들을 발견해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13절의 말씀은 1장에서 6장까지 전반부를 이끌고 가는 주제어와도 같습니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사람의 온갖 노동의 이익이 무엇이냐? 라고 묻고 있는 질문은 독자들에게 어떤 답을 구하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라 이 질문에 독자가 동의하도록 만드는 수사학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신의 관찰을 풀어놓는데요. 4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3절의 말씀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4절부터 7절까지의 논거는 자연에서 마주하게 되는 자연의 순환적인 질서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자연의 질서는 반복되고 순환되는 끝없는 반복의 연속이고 순환입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는 것 이것은 인류의 반복입니다.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습니다. 이 사이클을 거부할 수 있는 인류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왔다가 떠나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이 땅은 그저 그대로 있을 뿐임을 말하고 있죠.

 

5절에서 말하는 해가 뜨고 지는 것도 동일 합니다. 그러나 해는 언제나 다시 떠오르죠. 단 하루도 해가 뜨지 않은 날이 없듯이 해는 여전히 뜨고 집니다. 바람이 부는 것도 그렇습니다.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불다가 이리 돌다 저리 돌다 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강물은 다 바다를 향해서 흘러갑니다. 그런데 강물은 또 나온 곳으로 되돌아가 거기에서 다시 흘러내린다. 이는 물의 순환을 이야기 하죠.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나가지만 바다를 채우지도 못하고 증발된 물은 다시 하늘에서 비가 되어 내리고 이슬로 내려 강으로 돌아가 또 그 강물은 또 다시 바다를 향해 흘러갑니다.

 

여기서 지혜자는 가고, 온다. 라는 말을 자연에 빗대어 사용함으로써 삶과 죽음을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모든 자연은 순환을 반복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삶도 삶의 시작과 죽음의 순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가 오는 흐름은 반복되지만 한 인간의 삶은 결코 반복되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고대 유대인들의 사상이었습니다. 불교와 힌두교 에서는 윤회 사상이 있죠. 그래서 현세의 삶에 사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내가 이번 생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떤 계급과 환경 아래서 살아가지만 내가 다시 환생했을 때 곤충이나 동물로 태어날지, 귀신이나 악신으로 태어날지 혹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신적 존재로 태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단 한 번 뿐인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안에서 만세전부터 예비하신 질서 안에서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죠. 전도자는 덧없음을 이야기하면서 세대의 순환과 반복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사그라지고 새로 시작되는 세대 안에 있는 오직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것은 묵상하면서 깨닫게 된 개인적인 결론이지만 사실 전도자가 주목하여 보게 하도록 하는 것은 양면의 동전과도 같은 것 이라고 생각됩니다. 인생은 덧없기도 해, 하지만 너의 그 인생은 단 한번뿐인 인생임을 명심하도록 해. 라고 하는 두 개의 양면을 보도록 하는 것이죠.

 

지혜자는 흑백논리처럼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야. 그리고 이다, 혹은 아니다. 라는 명백한 답을 주고 있지도 않으며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약간 모호한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수사법을 사용하면서 독자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질문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전도자는 독자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질문하도록 하는 철학적인 사유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 한 번 더 말씀드릴게요.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입니다. 폴 부르제라는 프랑스 작가가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각하고 사고하고 지혜를 구하지 않은 채로 살아가면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면서 살아가는 그 삶을 넘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을 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생각하는 삶이 어떻게 보면 유별나 보이고, 남들보다 튀는 것 같고, 둥글둥글하지 못한 것 같고, 괴짜 같아 보일 수 있고 독특해 보일 수도 있지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여있는 물 과도 같습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죠. 여기서 썩는다는 뜻은 그 자신의 삶 너머에 있는 지혜의 샘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방식이 옳다고만 믿는 수동적인 형태의 인간을 만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쓸데없이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은 오히려 번민을 가져오지만 이러한 지혜서를 통해서 나의 삶을 돌아보는 것은 삶의 환기를 가져옵니다.

 

한 세대는 가고 다른 세대는 오고, 해는 떴다가 지고 또 다시 뜨고 바람은 남으로 북으로 불다가 다시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물은 강이되어 바다로 흐르고 그 물은 다시 강으로 흘러가는 이 모든 순환과 반복은 언제 시작했는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순환이며 반복이기에 어찌 보면 허무해 보이지만, 이 순환과 반복이 깨어진다면, 어제 떴던 해가 오늘 뜨지 않는다면, 어제 불었던 바람이 오늘 불어오지 않는다면,

물이 다시 강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 창조세계는 어떻게 될까요?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종말과도 같은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지혜와 경륜 속에 지속되는 자연계의 순환과 반복은 인류에게 주신 축복이며 선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 또 다시 태어나는 우리의 후손들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헛되이 보이지만 헛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이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성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8절부터 11절의 말씀은 자연계로 표현된 순환을 인류가 가진 역사의 눈으로 다시 해석한 것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고 우리는 예전에 있던 것으로 오늘을 살고, 우리의 후대들도 여전히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겠지만 그들이 새로운 것이라 하는 것도 다 후대에 있었던 것들일 것입니다.

 

자연의 반복과 역사의 반복은 인간의 작고 초라함을 드러내기도 하며, 인간이 가진 허황됨 꿈을 꼬집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지혜자의 질문인 것이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이 질문에 꼭 어떤 정답을 내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답을 내리도록 우리를 부추기고 있지도 않죠. 지혜자는 내가 생각해 보니 이렇게 생각되는데 너의 생각은 어떠니? 라고 묻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저도 정답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말씀과 함께 두 가지 질문을 드리고 말씀을 더 묵상하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길 원하는데요.

 

 

질문1.

지금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그 생각은 나를 어떻게 만들어가고 있나요?

 

질문2.

반복되는 삶에 지치고 허무한 것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내가 찾는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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