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일에 때가 있다
(전 3:1~15)
오늘의 본문은 전도서에서 가장 잘 알려진 시 한편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바로 시기와 때를 의미하는 시입니다. 지혜자는 양극적인 삶 속에서 모든 것이 때를 따라 아름답게 이루어졌다. 라고 말하며 이 시간의 신비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삶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시기와 때에 대한 이야기를 노래하고 있고, 이후에 9절부터 11절까지 말씀을 통해 그 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3장 1절은 나머지 시행의 표제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은 시구가 연결된 것처럼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라고 해서 뒤의 2절이 이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마소라 본문 이라고 하는 가장 기준되는 사본을 보면, 동사가 없는 명사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위해 정해진 시간, 하늘 아래 모든 일을 위한 그때
라고 읽는 것이 원래 번역인데요. 이렇게 놓고 보면 나머지 시행을 주도하는 제목처럼 느껴집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다고 하는 이 기한 이라는 히브리어 ‘제만’은 정해진 시간 혹은 때를 뜻합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어떤 특정한 시간, 혹은 찰나를 가리키는 시점을 말하는 것인데요.
전도자는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모두 제 때에 알맞게 일어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을 양극적인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는데요. 전도자는 이 삶의 복잡한 문제들을 아주 간결한 시로 구성하여 나타내고 있습니다.
2.태어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심긴 것을 뽑을 때.
3.죽을 때와 치료할 때, 헐어버릴 때와 세울 때
4.울 때와 웃을 때, 애곡할 때와 춤출 때,
5.돌들을 던질 때와 돌들을 모을 때, 포옹할 때와 포옹을 멀리할 때.
6.추구할 때와 포기할 때, 지킬때와 버릴 때.
7.찢을 때와 꿰멜 때, 침묵할 때와 말할 때.
8.사랑의 때와 미움의때, 전쟁의 때와 평화의 때.
오늘의 본문의 시에는 양극으로 구성된 쌍이 14개 등장합니다. 시 시의 완결을 구성한 것을 보면 시인이 얼마나 고민하고 고심하면서 이러한 시를 썼는지 감탄스러울 따름인데요.
먼저 첫 소절인 3장 2절을 살펴보면 태어날 때와 죽을 때를 말하며 삶의 시작과 끝을 노래합니다.
태어나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는 사람의 한계를 생각해보라는 것이죠. 인간은 한계 아래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출생과 죽음 사이의 제한된 시간 아래서 살아가며 이 법칙을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출생이 있다면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재밌는 것은 3:2절의 시작을 날 때와 죽을 때라는 인간 혹은 동물까지 기식하는 모든 움직이는 생물의 날 때와 죽음을 말함과 동시에 식물도 삶과 죽음의 과정을 겪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는 말은 식물의 출생과 죽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렇게 2절의 말씀은 땅 위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삶과 죽음의 한계 아래에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후 8절까지는 부정과 긍정의 양극적인 상황의 평행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3절과 4절은 죽일 때와 치료할 때, 헐 때와 세울 때, 그리고 울 때와 웃을 때, 슬퍼할 때와 춤출 때를 말하고 있죠.
사람의 죽음은 노화로 인하여 죽음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기치 않은 사건을 통해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죠. 또 반대로 인간의 삶에는 치유의 순간도 찾아옵니다. 그리고 이 치유는 육신의 질병에서의 치유를 말하기도 하지만 성경을 살펴보면 민족의 회복, 혹은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벗어남도 회복과 치유의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죠. 나아가서 깨어진 가정이나 관계도 치유와 회복의 과정으로 되살아 날 수 있습니다.
헐어버릴 때와 세울 때는 보통 건축을 할 때를 떠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앞 구절이 죽일 때와 치료할 때를 언급한 것을 보았을 때 앞 소절과 연결하기에는 조금 어색하죠. 시는 독자들이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고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가는 장치가 있기 때문에 앞선 시상과 함께 어울리는 상황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허물 때와 세울 때는 삶의 양면성 그 자체를 말 할수도 있고, 또 전쟁을 말하는 것 일수도 있습니다. 그 이후의 4절의 말씀이 울 때와 웃을 때, 슬플 때와 춤출 때를 말하는 것을 보아서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시인의 의도에 맞는 해석일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는 희노애락이 늘 함께 하죠. 늘 행복한 사람도 없고, 늘 슬픈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기뻤다가 내일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슬퍼할 수도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이죠. 빈도수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양극의 감정을 느끼고 경험하면서 성장해 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슬픔이 찾아오면 이것이 지나가고 웃을 때가 찾아올 것을 생각하면서 극복해야 할 것이고, 또 기쁜날이 찾아왔을 때는 마냥 그 감정에 취해있지 않고 언젠가 닥칠 곤경과 환난 앞에서 겸손해야 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돌을 던질때와 돌을 거둘 때, 포옹할 때와, 포옹할 때를 멀리할 때도 있습니다. 이 돌을 던질 때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그 의견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해석은 독자들의 자유니까요. 자유롭게 생각해도 무리는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사람의 관계를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뒤에 이 안을 때와 안을 일을 멀리 할 때는 사람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죠. 누군가를 안는다 포옹한다. 라는 이 표현은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 오가는 관계임은 분명합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의미할 수도 있고요. 친절한 환대나 단순한 인사를 가리키기도 하죠.
돌을 던지거나 모으는 것도 이 관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이 듭니다.
또 찾을 때와 잃을 때 지킬 때와 버릴 때도 있습니다. 찾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물건을 찾거나 사람을 찾을 때 쓰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간구할 때도 찾다라는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잃다라는 말도 어쩌다 실수로 잃어버릴 때도 잃다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것을 포기하는 상황에서도 잃다 라는 단어를 사용하죠.
지킬때와 버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키는 것은 사수하고 아주 중요한 것을 보호할 때 지키기도 하지만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것을 거부하거나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하죠.
찢을때가 있고 꿰멜 때도 있고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이 찢는다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도 은유적 표현으로 쓰이는 단어인데요. 옷을 찢거나 마음을 찢거나라는 의미는 통회하는 마음 상한 마음을 사용할 때 이 마음을 찢다,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 쓰다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후에 꿰메는 것은 상처를 봉합하거나 슬픔이 지나간 이후에 회복되어지는 과정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사야서에서 심판을 이야기 하고 이후에 회복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찢을 때가 있으면 회복할 때도 있다는 것이죠.
잠잠할 때와 말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인간은 수만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표현하는 존재이죠. 다른 동물들도 소리로 소통하지만 언어를 쓰지는 않습니다. 인간만큼 언어를 깊이 있게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이유는 언어를 단지 소통의 의미로만 사용하지 않고 여러 가지 표현의 방식으로 말하고 소통하고 표현하고 때로는 언어를 통해서 누군가를 공격하기도 하고 치유하기도 하는 도구로 쓰기도 하죠.
말하는 것이 지혜를 드러내기도 하고 부족함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잠잠한 것도 부족해 보이지만 어떤때는 오히려 지혜를 드러내기도 하죠. 때에 따라서 말을 하거나, 또한 잠잠한 것은 지혜를 드러내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간결하지만 깊이 있는 은유의 구성이 절정을 이루는 전도서 3:8절의 마지막 행은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전쟁할 때와 평화의 때를 노래합니다.
2절부터 7절까지 기록된 이 모든 시구는 인간의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삶의 다양한 영역들을 노래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한 구절로 귀결시키는 구절이 바로 8절의 말씀인데요.
이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는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로가 사랑하면 평화의 나라가 도래하고 미움이 발전하면 전쟁의 발판이 됩니다. 하지만 이모든 것도 때가 있음을 지혜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제 9절에서는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는 1장 3절의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라는 말씀이 기억나시죠?
지혜자는 또 다시 이 수고가, 너의 애씀이 이와 같은 일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너가 무엇을 더 보탤 수 있는가? 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전도자는 10절과 11절에서 자신의 관찰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요.
개역개정에서는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해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라고 번역되었는데요.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제 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2절부터 8절까지의 내용들이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혹은 벌어지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1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는데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신의 섭리에 대한 가장 위대한 진술이라는 극찬을 받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서 겪게되는 슬픔과 기쁨, 상처와 회복, 웃음과 눈물 등의 양극의 상황들 안에서 성장해 갑니다. 이것이 단편적으로는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운명을 비켜가거나 바꾸어보려고 애쓰며 노력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도 하죠.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이와 같은 일을 어찌해볼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내던져 지는 것 같은 것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서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고,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는데 그것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새번역에는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번역하였는데요.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바라보며 나의 지난날을 인도해 가셨던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으며, 앞으로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실 하나님을 바라보게도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지혜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작과 끝을 다 깨달아 알 수는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죠.
이 3장의 시는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양극단의 일들을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우리의 삶을 마주하며 묵상하게 만들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인도하시는 이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마지막에 드러냄으로서 우리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롭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후에 12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지혜자가 깨달은 깨달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
이제 나는 알았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언제나 한결같다. 거기에다가는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니 사람은 그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지금 있는 것 이미 있던 것이고, 앞으로 있을 것도 이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신 일을 되풀이하신다.
이는 애쓰며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고백이죠. 지혜자가 깨달은 것은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선을 행하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깨닮음. 그리고 살면서 먹고 마시는 일차적인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크신 선물임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먹고 마시는 일 이외의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내기 때문에 불행이 다가옴을 기억하라는 말과도 같죠.
언제나 변함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어진 인생을 감사하며, 선을 행하며 살아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질문1.
지금 내가 해야 할 때가 있다면 그 때는 어떤 때입니까?
질문2.
내 삶에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아름답게 이루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시나요? 나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묵상할 때 나를 온전케 하실 하나님을 믿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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