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지혜와 의로움의 한계
(전 7: 15~29)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전도서는 크게 두 파트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는 1장부터 6장까지의 말씀을 전반부로 볼 수 있고요. 7장부터 12장까지는 후반부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7장은 6장의 후반부에 기록된 누가 알겠는가? 무엇이 좋은가? 라는 그 질문에 답하는 구체적인 담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지혜자는 개인적인 관찰과 경험을 강조하면서 내가 보았더니. 라는 1인칭의 방식을 사용했었다면 전도서 7장부터는 2인칭의 명령형 문장이 많이 등장합니다.
1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지혜자는 사람의 지혜로 행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하였는데요. 이후 15절부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인간사의 현실을 적나라 하게 이야기 합니다.
15절이죠. 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전반부에서도 다루었던 주제이기도 한데요. 허나 전반부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있으니 인생이 참 허무하다. 의롭게 살아도 멸망하고, 악하게 살아도 장수하는 이들이 있으니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 라는 내용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생에 수고한들 이것을 바꿀 수 있겠는가? 유익이 있겠는가? 라는 허무함을 이야기 하였죠.
그런데 7장에 와서는 그 허무함에 대한 지혜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들어갑니다. 15절에 대한 지혜자의 해석은 16절과 17절입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간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이 두 구절 사이에는 문학적인 기법이 들어가있죠. 16절을 a,b,c 그리고 17절을 a’b’c’ 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a와 a’는 너는 지나치게 의롭지 말라, 그리고 너는 지나치게 악하지도 말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b와 b’는 지나치게 지혜롭지도 말라, 그리고 지나치게 어리석은 자도 되지 말라. 로 구분할 수 있고요. c와 c’는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려 하는가, 그리고 어찌하여 너의 때가 아닌데 죽으려 하는가. 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7절의 말씀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응당 인간이라면, 악하게 사는 것, 그리고 어리석은 것은 멀리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16절에 의롭게 사는 것, 그리고 슬기롭게 사는 것도 주의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요. 이러한 해석은 고개를 갸우뚱 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의로울수록, 또 지혜가 쌓일수록 성화되어져가는 과정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개인의 수행과 고행을 통해 어떤 영역에 다다르기를 바래왔었던 것이죠. 이러한 사상은 동양사상과 서양사상 어디에나 있었는데요. 특히 동양철학에서는 불교와 도교가 그렇습니다. 자기 수련을 통해 열반에 이르게 되면, 깨달음을 얻게 되면 부처가 되는 것이죠. 이러한 영역에 들어가기까지는 자신을 극한에 몰아넣는 고행을 통해서 모든 번뇌를 벗어버리고 끝없는 지혜를 추구하여 어떠한 영역에 다다르는 것을 의미하죠. 그래서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되면 신선이 되거나 부처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16절의 말씀에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려고 하지도 말고 지나치게 지혜로우려고도 말라. 왜 스스로 패망의 길을 걸으려 하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왜 지혜자는 과잉된 의로움을 피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는 지혜와 의로움에 관하여 지나친 확신에 빠지지 말라는 경과와도 같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16절에 대한 해석은 18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넣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이 조금 더 쉽게 풀이하였는데요.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하나를 붙잡되, 다른 것도 놓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극단을 피한다.
지혜자는 극단을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지혜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신성과 인성 사이의 간격을 인정할 줄 알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적절한 위치를 아는 사람임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지나치게 의로워지려 하는 사람들, 지나치게 지혜를 추구하는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 교만하여 패망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인 것이죠.
의로움이든 지혜든 양극단을 피하라는 조언은 동양철학의 중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중용은 좋고 나쁨, 의로움과 악함,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극단을 피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충돌하는 모든 결정에서 중간의 도를 택하는 철학사상이죠.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도 이 중용에 대한 사상을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전도서 7장에서도 이 중용의 지혜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혜자는 이 깨달음을 가르치면서 이 지혜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합니다.
19절에는 지혜를 가진 지혜자가 성읍을 다스리는 열명의 권력자보다도 더 강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자는 그 지혜조차도 과잉이 되지 않고 절제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있는데요. 20절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아주 짧게 정리를 하자면, 지나치고 선하게 살거나 지혜를 추구하려고 애쓰지 말아라, 우리는 죄 가운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임을 기억하여라. 우리가 스스로 선하고 지혜롭다고 여기며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모든 욕망을 버리라. 네 존재를 잊지 말아라. 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죄의 보편성은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그 예가 21절과 22절에 기록되어 있죠.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
솔직하게 말하면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나아가서 흉을 보거나 저주하는 마음을 가진 경험이 인간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지혜자의 이러한 가르침은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양심에 귀 기울이게 만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중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는 더 많은 이중성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그런 책임감과 신앙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을 잘 알기에 나 자신은 스스로 의로울 수 없는 존재임을 금세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앉아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찬송과 기도를 올려드리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는 누군가를 정죄하고 판단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그런 존재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상태로 나를 내던지지 않고 절제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하는 가르침을 받았기에 말씀을 따라 살기에 애쓰는 것 뿐이지, 이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는 23절 아래로 이 지혜를 사용해서 모든 것을 시험해보았던 자신의 경험을 계속해서 이야기 합니다. 지혜를 통해 무엇인가 깨달으려고 애를 썼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지혜자는 23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 하였도다 24절에서도 지혜가 무엇인지 너무 멀고도 깊다.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을까? 라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혜를 찾고자 하였으나 사물의 이치를 찾고자 하였으나 그가 조사하고 연구하여 깨달은 결과를 세 가지 탐색 결과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중 첫 번째는 어리석음은 마치 유혹하는 여자는 올가미 같다는 것입니다. 올무와 포승같은 여인에게 어리석은 자들은 걸려 넘어지고 말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지혜서, 특히 잠언에서는 낯선 여인을 주의하라는 경고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들은 그 여인에게서 벗어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지만 지혜와 양심을 버려둔 채 하나님을 멀리하는 이들은 올가미와 덫을 놓는, 또 사슬로 결박하는 죄에 잠식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28절에는 두 번째 관찰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내 마음이 계속 찾아 보았으나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내가 찾았으나 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지 못하였느니라
이 말은 좀 모호한 수수께께 같은 말씀 같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여성은 지혜를 소유할 수 없다. 라는 의미로 해석하면서 여성 혐오 의도가 이 문장에 들어있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지혜자가 여성에 대해서 이러한 편견에 젖어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원어에서는 27절에 전도자가 이르되 라고 하는 이 문장 구조가 아메라 코헬렛(코헬렛은 지혜자, 전도자를 의미하는데요) 이라고 말했는데요. 이 아메라 라는 단어는 라고 3인칭 여성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코헬렛 그녀가 말했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는 번역입니다.
만약 지혜자가 여성혐오자였다면 7절에서 지혜자인 그녀가 말했다. 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8절은 해석하기가 좀 모호하고 까다로운데요. 이것을 여성과 남성에 대비하지 아니하고 숫자를 통해서 해석하는 방법이 더 바른 해석입니다. 천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찾기 힘들다. 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른 해석입니다.
지혜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해서 숫자를 이용해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때 남성과 여성을 먼저 내세운 문맥을 사용하면서 이 과장법을 더 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하였음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지혜자는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라고 말하면서 이 7장의 결론을 말하고 있는데요. 지혜자가 깨달은 사실은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만드셨지만 인간이 스스로 꾀를 내어 지혜에 도달하지 못한 존재를 만들어버렸다. 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에서는 노아의 홍수 때 인간의 상태를 이렇게 말하였는데요.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의 질서를 거스리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꾀를 냈을 때부터 지혜를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직하게 창조하셨으나 인간 스스로가 그 단순한 진리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지혜있는 채 한 불완전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죠.
지혜자는 이 7장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달리 온갖 기획과 책략을 도모하는 인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면서 글을 마무리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지혜를 발견할 수 있지만 외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것은 어렵게 느껴지고, 내가 생각하는 꾀를 따라 사는 것이 더 편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지혜는 스스로 올무가 되어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 될수도 있음을 지혜자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전도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고 그 지혜를 따라 살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양 극단의 지나침을 경계하기 위해서 내가 취해야 할 중용의 자세는 무엇일까요? 내가 극단으로 치우쳐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질문2.
나 또한 언제든지 죄를 범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시나요?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여 겸손하게 자라갈 수 있을까요?
'곽군의 느릿느릿'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 자녀의 영광 (0) | 2022.12.23 |
---|---|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1) | 2022.12.23 |
모든 일에 때가 있다 (2) | 2022.12.13 |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 | 2022.12.09 |
내 인생의 끝 (2) | 2022.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