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딸들
(창 6:1~10)
오늘의 본문은 홍수설화가 시작되는 첫 부분이 기록된 구절입니다. 이 홍수와 관련되어서 참 많은 해석들이 존재합니다. 전 우주적인 그러니까 지구에 국한된 모든 땅이 물에 잠겼다는 주장이 입니다. 이 주장을 뒷 받침 하기 위해서 본래 이 땅이 여러 판이 있죠. 본래는 이 땅이 하나였는데,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언어를 나누시면서 이 판이 지각변동으로 인해서 떨어져 나간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랜드 캐년에 화석층을 살펴보면 바다생물들이 화석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전 지구적인 사건이다. 그랜드 캐년은 쌓인 물들이 한꺼번에 빠진 증거다. 라고 하는 창조과학회의 주장이 있습니다. 또 다른 주장은 근동지역 중에서 노아가 살고 있었던 지역에만 국한된 홍수가 일어났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성경에만 대홍수의 사건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고대 수메르 문화, 또 메소포타미아 문화, 알래스카나 그린랜드의 홍수설화 등 각 나라와 지역마다 전해져 내려오는 홍수에 관한 설화등이 존재 합니다. 찾아보니까 한국에는 700개나 되는 홍수의 설화가 있다고 하고요. 또 제주도에도 매오름에 관련된 홍수 설화가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기록된 홍수의 사건이 여러 문화권으로 퍼져가면서 다른 줄기를 낳았을 수도 있고요. 아니면 세계적으로 나타났던 홍수의 사건들이 각 나라의 문화권 안에서 특정한 방식과 전승으로 내려오게 된 일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이 홍수의 사건이 역사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느냐. 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믿음의 영역으로 대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인간이 다가갈 수 있는 사실에 근거하고, 또 역사적인 배경으로 해석하기가 어려운 부분들이 존재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기 때문에 믿는다. 라는 주장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의 바른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내용 안에도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오늘의 본문의 난해한 구절 중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의 등장입니다. 첫 번째 해석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실 때 창세기 1장에서의 인류 창조와, 창세기 2장에서의 인류 창조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는 우주적인 창조의 섭리 안에서 인류를 창조해 내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은 육체와 혼만 있는 존재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으로서는 3절에 나오는 존재들이 그렇게 육체로만 존재하는 인류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리고 2장에서의 인류 창조는 흙으로 빚어낸 아담의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한 존재입니다. 5장의 말씀을 어제 우리가 함께 보았죠. 아담의 후손들은 굉장히 넉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무드샐라는 969세나 살았고 왠만하면 팔백년에서 구백년을 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인 6장 3절에 보면 그들의 날은 백이십년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아서 확실히 큰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들은 영적인 존재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족속이 있다는 주장, 그리고 이 땅에 육체로만 존재하는 인류가 또 존재했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사람의 딸들로 존재했던 이들은 모두 다 심판을 받게 되고, 이후에 영적인 존재인 노아의 8명의 가족만 남아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번성해갔다고 보게 됩니다.
또 다른 해석은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한 창조였지만 죄로 인해서 타락한 인류가 오랜시간동안 번성 하여서 하나님 없이 살았던 긴 시간을 통해 여러 인류가 나타났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에 반하여 아담의 후손들 특히 아담의 세 번째 아들인 셋의 자녀들, 곧 4장에 기록된대로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그 말씀을 근거로 경건하게 남겨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렀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결국 노아도 셋의 후손임을 창세기 5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이 주장이 가장 전통적인 주장이며 해석이기도 합니다. 명쾌하게 해석이 되지 않는 부분은 신앙의 영역으로 남겨두면서 영적인 의미로 이해하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 1절을 보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났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는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창조를 이루실 때 인류에게 명령하신 명령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고 하신 그 복이 모든 인류에게 임했던 것이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잊은 채로 번성하게 된 인류로 인해서 나타난 여러가지 문제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밝히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 셋의 자녀들 경건하게 하나님을 기억하는 민족들은 가정을 이루는 결혼관에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신앙의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들도 시간이 지나자 어떤 율법이 주어지진 않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유산을 물려주지 못하고 자기의 정욕대로 사는 죄를 범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드러난 인간이 저질렀던 악행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은 말 그대로인 아름다움이 가진 원형적인 온전함과 선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관점으로서 육체적인 아름다움, 곧 눈에 보이는 정욕 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여인을 취했던 그들의 행위의 악함을 의미하는 말씀 입니다.
또 4절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나오는데요. 네피림이라는 단어입니다. 정확하게 네피림이 어떤 존재인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기는 어려운데요.
여러 해석이 있지만 가장 신빙성이 있는 해석은 거인족을 의미합니다. 기골이 크고 장대한 인물들이죠. 개역개정에는 갑자기 네피림이 등장하여 어떤 구분된 족속으로 이해하게 되지만 바른 번역의 순서로는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라고 하는 족속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용사들이었고 유명한 이들이었다. 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른 해석입니다.
위에서 말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 바로 네피림이라고 하는 기골이 장대한 거인족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태어난 족속들이 하는 행위가 옳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5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죠.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죄의 문제가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창세기를 크게 구분지어 보자면 1장과 2장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 그리고 3장부터 11장까지는 타락과 범죄, 그리고 심판에 대한 내용이 연속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12장부터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스라엘의 족장에 대한 역사가 시작되죠.
범죄한 인간의 악함의 절정이 오늘의 본문 5절에 등장하는 것처럼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했고, 또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였다고 성경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도 비록 에덴에서의 풍성한 삶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여지와 생애를 남겨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정욕대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6절 이하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창조세계를 보시고 한탄하시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이죠.
그리고 노아라는 인물을 새롭게 등장시키셔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은혜받은 인물을 굽어 살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 본문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사실 이 6절의 말씀을 이해하고 소화 시키기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서는 어떤 신정론에 반하는 그런 구절이 아닌가? 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자신이 창조한 창조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손으로 지은 사람을 보며 한탄하고, 또 근심하실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우리가 함께 찬양했듯이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데 이정도면 하나님의 실수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 하나님께서 근심하셨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에 오점이 있었다. 실수가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런 말을 하기에 좀 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연약하심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연약함은 어떤 하나님의 불완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지신 긍휼하신 그 성품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의 죄악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려고 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과 인류를 향해서 오래 참으시고, 그들이 바른길로 돌아오길 바라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이 말씀에 담겨있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로움은 한탄과 근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으로 까지 나아감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공의는 하나님을 가장 하나님 답게 만드는 하나님의 성품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자의 특권은 창조물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두들 찰흙 빚기나 지점토 놀이를 해보신 적이 있으실 거에요. 작품을 만들다가 좀 이상한 부분이 나오면 그 부분을 다시 때어내고 뭉치고 치대서 재반죽을 해서 작품을 수정하는 경험을 다 해보셨을 것입니다.
내가 만든 작품을 내가 마음대로 수정하고 변경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그 작품의 소유주 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야 너 무슨 작품을 그렇게 만들었냐?’ 라고 말하면서 내 작품을 뭉개버리면 그때는 싸움이 나는거죠. 남은 그렇게 할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내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단번에 허무시고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는 것에 대해서 피조물 입장으로서 왈가왈부 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 하고 대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하나님의 순간적인 분노의 마음이 아니라, 범죄 한 인간을 향한 공의로운 심판의 결과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노아라는 인물을 통해서 다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구하는 인물, 의로운 이들을 구원하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창조주가 피조세계를 재창조 하는 것에 대해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 함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창조세계를 긍휼히 바라보시고 남아있는 한명의 의인과 그 가족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등장하지만 하나님은 홍수 이후에 무지개를 세워서 다시는 인류를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은혜를 보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뜻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 라고 하는 말씀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성이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물론 종종 훌륭한 인품을 가진 사람들,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위로는 의로움을 드러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며 우리가 가진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불의함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임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셈과 함과 야벳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새로이 준비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 영원히 지속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시다. 고난의 길을 걸어가더라도, 여전히 그루터기와 같은 이들을 남겨두시고, 하나님을 온마음 다해 섬기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희망의 역사가 써내려져 갈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노아와 같은 믿음의 사람이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나의 지식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그때 이해를 넘어 신앙으로 나아간 경험이 있으신가요?
질문2.
하나님의 공의로우심 안에 담겨진 놀라운 자비와 사랑이 있음을 고백할 수 있나요? 심판과 사랑의 속성을 모두 가지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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