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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by 터틀곽 2022.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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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12:1~9)

 

오늘부터 창세기의 족장사가 시작됩니다. 이 족장사의 시작은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인간의 역사의 흐름과 함께 하고 계심을 증거하는 중요한 시작점입니다. 창세기 12장 이전, 1장부터 11장까지의 말씀에서도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였고,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 전의 말씀은 사건의 연계성에 더 중심을 둔 기록이었다면, 이제 창세기 12장부터 시작되는 족장사의 이야기는 역사의 흐름과 이스라엘의 태동에 중심이 맞춰진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죠. 바로 아브라함의 등장입니다. 먼저 불려진 이름은 아브람 이라는 이름이죠. 제가 저번주 금요일에도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창세기 11장 후반부 11절부터 31절까지는 다시 족보가 등장합니다. 이 족보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인류에게 명령하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묘사 라고 말씀드렸었는데요. 5장에서는 아담으로부터 셈과 함과 야벳까지, 10장에서는 셈과 함과 야벳을 통해 아프리카부터 근동지역까지의 광활한 땅에 많은 민족이 발현되었음을 기록하였고요. 1111절부터는 다시 셈의 족보가 시작되어 아브람까지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아브람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죠.

 

121절을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당시에는 가족과 씨족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것이 생존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요즘은 사람들이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자주 떠나가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어디를 가던지 살 수 있는 집을 구할 수도 있고, 또 일할 수 있는 일터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지역과 직업의 문제를 선택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는 일들이 빈번 합니다.

 

하지만 아브람의 당시는 정착된 농경사회도 아니었고, 유목민으로서 지내던 근동지역이었기 때문에,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사실은 단지 아버지와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의 형제들 정도만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한 씨족이 부락을 형성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고, 또 함께 의식주를 공유함으로서 먹고 살아가는 문제도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아브람이란 인물을 선택해서 그 공동체로부터 분리 시켜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여건으로 아브람을 부르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2절과 3절의 말씀이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12장에 기록된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말씀이죠. 아마 아브라함을 생각하다보면 바로 떠오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전 개역 한글 성경에는 이 복이 될지라 라는 말씀을 복의 근원이 될지라. 라고 번역하여서 아브라함을 생각하면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공식처럼 여기게 될 때가 많죠. 물론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이 말씀은 이전에 11장에 기록된 말씀과 대비된 말씀이 기록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1장에는 바벨탑을 건설하는 인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중 4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탐 사건에서 인류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던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탑을 높게 쌓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탑을 쌓으려 했던 그 의도가 문제였던 것이죠. 탑 꼭대기를 하늘까지 쌓아보자 라는 것은 그 당시에 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었고 하늘에서 자신들을 내려다 보신다는 생각을 가졌었기 때문에 탑을 높게 쌓아올려서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서겠다. 라고 하는 교만함이 문제였던 것이죠.

 

그 교만함은 탑을 높게 쌓은 이후 우리 이름을 내자 라는 교만함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 이름을 내자 라는 것은 그들이 가진 명예욕과,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였던 인류의 타락한 본성을 동시에 드러내고자 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인 122절의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하셨던 언약중에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범죄한 인류는 스스로 높아져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고, 또 자신들의 이름을 더 드높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벨을 세웠던 인류를 심판 하신 이후에 아브람 이라는 인물을 세우셔서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시는 방법, 그리고 그 하나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드러내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은 복과 저주에 관한 말씀입니다. 3절에 기록된 말씀이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말씀은 아브람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사람이 가져야할 소명 의식에 대한 말씀으로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주체가 누구인가요? 축복하는 자, 혹은 저주하는 자 인가요? 아닙니다. 내가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십니다.

 

아브람아 너가 나아가는 길에서 누군가 너에게 복을 베푼다면, 그 사람에게 내가 같은 복을 베풀어 줄 것이야. 그리고 누군가가 너를 저주한다면, 내가 그에게 저주를 내릴 거야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복과 저주에 주체가 되심을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브람에게만 국한된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말씀임을 반드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복과 저주의 선언적인 말씀이 누구에게 주어졌고, 그 말씀을 받은 이가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이 말씀은 누구에게 주어졌나요? 네 아브람이라고 하는 인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받은 아브람은 어떤 삶을 살아갔습니까?

 

4절에 기록되어 있죠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세 였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아브람이 붙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주어졌죠.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너의 이름을 창대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저주할 것이다. 라고 하는 엄청난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언약의 말씀을 아브람이 붙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아브람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부모 세대로부터 신앙교육을 잘 받아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을 때 그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붙들었는지 성경에서는 드러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추측해 보건데 이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 라고 하는 지역은 우상을 섬기던 지역이었습니다. 달을 숭배하는 사상이 이 우르 지역에 있었다고 해요. 아마 아브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우상을 가까이 하던 삶이 더 익숙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브람은 오랜 시간동안 자녀가 없었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1130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우르 지역을 떠날 때 기업을 이을자로 롯을 데려가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죠.

 

이렇듯 아브람은 자신으로부터 큰 민족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 또 축복과 저주에 대한 말씀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만한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5절의 말씀을 보면 아브람은 가나안 땅까지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우르에서 가나안 땅 까지의 거리는 1500키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라고 합니다. 어느정도 되는 거리인가 제가 대충 지도에서 보았는데요 서울에서 중국을 지나 몽골까지 가는 거리가 한 1500키로 정도 되더라고요. 바다를 건너 일본 끝까지의 거리가 그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생각보다 먼 거리죠? 칠십오세의 나이의 아브람이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고 얼마나 큰 민족을 이루려고 그 거리까지 나아갈 결심을 하였을까요? 그냥 우르에서 사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살아보지도 않았던 지역, 전혀 다른 문화와 인종들이 살고 있는 땅을 향해, 자녀도 없어 자신이 죽으면 기업을 대신 이을 롯이라는 조카를 데리고 그 길을 떠났을까요?

 

바로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 아브람이 살았던 삶의 모습을 보면 정말 믿음의 조상이다. 라고 일컬을 만큼 순전하고 온전한 믿음의 행보를 보였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아브람은 자신에게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따라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명확한 길이나, 정답 같은 해결책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될까요?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을까요? 라는 것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에 기록된 아브람의 모습을 보면 신앙의 길은 어떤 정해진 해답을 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의 길은 신앙을 통하여 약속된 복을 누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단지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 내 이름이 창대해지기 위해 나를 축복하는 자들에게 복이 임하고 나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내려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체적인 어떤 복이 눈 앞에 보여지지 않더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그 사실 하나를 붙드는 것, 그 언약이 성취될 것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려진 이유였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생애에 이삭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을 소유하지도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가나안 땅은 사래와 자신이 묻힐 작은 굴 하나 뿐이었습니다. 이름이 드높여지지도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을 통해 믿음의 역사가 쓰여지고 그 혈통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까지의 족보가 내려옴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온전한 순종의 길을 나선 아브람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믿음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주님의 음성과 감동이 들려올 때 순종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순종의 결과는 어떠하였나요?

 

질문2.

주님의 음성과 감동이 들려올 때 불순종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내가 불순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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