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인간의 본성
(창 4:1~15)
오늘의 본문은 아담의 후손인 가인과 아벨 두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인해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죠.
본래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하심 안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들을 취하고 다스리며 살아야 할 직분을 상실하게 된 아담과 하와는 범죄한 인간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본래 새로운 시작은 진취적이고 아름다워야 하지만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모습일 뿐입니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에 나타난 특징들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는데요.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이후 23절에서는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흙으로 지음받은 존재는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흙으로 지음 받았지만 그 코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자 생령, 살아있는 영적 존재가 되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서 의미가 생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생기를 상실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교리적으로 완전한 상실이다. 아니다 부분적 상실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미 에덴에서 쫓겨난 상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의미를 상실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의 빛을 잃어버린 인간의 모습이 계속해서 4장에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가정을 이루고 가인을 낳고 아벨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라는 이름의 뜻은 얻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요 아벨은 약한 바람, 혹은 덧없음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큰 축복과 기쁨의 순간이죠. 가인을 낳고서는 얻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둘째인 아벨을 낳고서는 그 이름을 덧 없음 이라는 의미로 붙여서 부릅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만 예뻐하고 아벨은 미워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여주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듯이 첫째를 낳고 키울때보다 둘째를 또 셋째를 향한 애틋함이 커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죠.
하지만 아담은 둘째 아벨을 낳고 나서는 그 이름을 덧없음, 연약한 바람 이라고 부르는 이름을 붙여줍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그 이름이 가진 운명적인 상황을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인 과정을 거쳤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이름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겠죠.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 아담으로서도 처음 겪는 일이었겠죠. 모두가 첫 아이를 낳을 때 부모로서는 첫 경험이지 않습니까? 아담도 첫 번째 자녀인 가인을 낳고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자녀라 말하며 기뻐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아벨을 낳고서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라는 고백 없이 덧없다. 라는 이름을 붙여버립니다. 왜 둘째를 낳고서는 이런 냉랭한 반응, 냉랭한 이름을 지어주었을까요? 이는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에 대해서 이 일들이 부질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녀를 양육하고 키우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일인가요? 자녀를 얻은 기쁨도 잠시 출산의 고통과 어린 자녀를 키우는 이 일도 참 부질없는 일이다. 덧없는 일이다 라고 생각할만큼 기쁨과 충만함이 없었습니다.
자녀를 낳는다는 것 정말 신비한 일입니다. 나의 혈통을 통해 나와 닮은 존재가 탄생하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담도 첫째 아들 가인을 낳고 나서 그 신비로움과 기쁨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아담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자녀를 낳는 것으로 만족감을 누리고 기뻐했다면 또 다른 자녀를 낳았을 때, 또 계속해서 자녀를 낳음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에덴에서 누렸던 하나님과의 풍성한 은혜와 교제를 잃어버린 아담은 자녀를 낳는 것으로도 만족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새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덧 없음이라고 지으며, 상실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인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의 본문을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리고, 아벨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청년부 수련회 때 강사 목사님이 이 구절을 말하면서 하나님은 고기만 좋아해서 안받으셨을까요? 라는 농담을 하시더라고요. 물론 아니죠.
그분은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셨습니다.
곧 양을 드려야 하는 이유, 아벨은 그것을 알았기에 그의 제사가 성공적으로 하나님께 열납되고, 가인은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다. 라고 해석하셨습니다.
말씀드렸듯이 그러한 해석은 구속사적인 관점의 해석입니다.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아벨이 양을 드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죄사함을 의미하죠. 양을 잡아 죽임으로 인해 자신이 죽임당해야 할 존재임을 기억하고 자신의 죄를 그 제물에 전가하여, 제사를 지냄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것이었죠. 아벨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제물과 제사를 받으신 것이다. 라고 말하는 관점이 바로 구속사적인 관점으로서의 해석입니다.
그리고 가인은 구속제물로 드리는 제사방법을 준수하지 아니하고 곡식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 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관점은 구속사적인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가인과 아벨 둘 다 똑같이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실 제물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율법으로 주신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유월절 제사를 지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을 때, 그때 제사의 방법을 율법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의 종류에서 곡식을 드리는 소제의 방법 곡물에 기름과 유향을 섞어서 드리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곡식으로 드린 가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해석은 너무 구속사적인 방법으로 끼워서 해석하려고 하는 조금 억지스러운 해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사의 방법, 양을 드린것과 곡식을 드린 이 방법론적인 문제 때문에 가인의 제사를 안 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까요?
결론적으로 어떤 명확한 사실관계를 성경에서 밝히 드러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추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인과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라는 기록을 통해서 가인의 평소의 삶의 태도나 삶의 방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7절에 기록된 대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라는 말씀을 통해서 가인의 삶이 선을 행하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굽히거나 삶의 방향을 조절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8절에 기록된대로 아우 아벨을 쳐서 죽여버립니다. 이는 성경에서 드러난 최초의 살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가인을 향해서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냐고 물으시지만 가인은 어디있는지 알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이 말은 살해 당한 아벨의 직업인 목자를 암시하면서 내가 동생을 지키는 목자입니까? 라고 자신을 변호하는 그런 뻔뻔한 대답을 하나님 앞에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가인의 모습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도 드리고 하나님을 인식하면서도 살아가지만, 그 이면의 모습에는 분노와 거짓과 술수가 가득한 모습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본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가인은 그 동기를 실체화 시키고 실행시킨 사람인 것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동기는 있으나 실행하지 않은 것 뿐입니다.
오늘의 이 단락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중심 주제는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성경에 처음 등장한 살인 사건이다. 라는 것이 아닙니다. 피흘림의 제사만을 원하시는 구속사적인 하나님을 드러냄도 아닙니다.
이 단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중심 주제는 7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드린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자 안색이 변하고 분을 내는 가인을 향해서 왜 너가 얼굴이 벌게져서 화를 내고 있느냐? 라고 물으신 것이죠.
만약 너가 선을 행하였다면 너가 낯을 들고 나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나와 관계하였을 것이다. 나는 너의 제사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죠.
하지만 가인은 그의 부모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범죄를 동일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선을 행하라. 죄를 다스리라. 라고 명령하셨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더 분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동생을 죽이는 피를 나눈 형제를 죽이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살인을 할 때 우발적인 경우는 별로 없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일로 미운 마음이 들었다가 그 마음을 다스리지 않고 그 마음을 안에서 점점 증폭시켜 갑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증오로 바뀌고 결국 누군가를 죽이기 까지 내버려두게 되는 것이 죄의 속성이라는 것이죠.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듯이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죄를 다스리고 우리의 마음을 선하게 다스려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지킬만한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는 말씀 또한 우리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고 지켜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되지 아니하고 빛의 자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를 힘쓸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능력으로 죄를 다스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육신의 정욕은 죄를 원하지만 죄를 다스림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행실을 이 땅가운데서 이뤄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내가 가장 잘 다스리지 못하는 죄의 문제는 무엇인가요? 내 문 앞에 엎드려 있는 죄는 무엇인가요?
질문2.
하나님을 떠난 삶은 곧 죄를 범함과 굳어진 마음으로 변질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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