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은혜가 족하도다
(고후 12:1~10)
오늘 본문은 바울이 본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몸에 있는 육체적인 고난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 2절을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라고 3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성경을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사람이 바로 바울 자신을 말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에 동일한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
바울이 내가 직접 환상을 본 사람이다. 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내세워서 말하고 있는 이유는 당시 그 사람 이라는 표현을 쓰는 표현이 당시 랍비들이 사용하는 문학적 표현법이기에 그렇다 라는 주장이 있고요. 또 바울의 그 경험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겸손한 고백을 하기 위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14년전이라는 구체적인 시기를 언급하면서 이 사실이 허구가 아니라 믿을만한 증거임을 제시하고 있는데요. 어떤 학자들은 이 시기가 다메섹에서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실 그 당시를 말하고 있다고 하기도 하고, 또 바울이 본격적으로 사역하기 전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가졌을 당시였을 것이다 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바울이 실제적으로 경험한 환상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죠.
2절에서는 바울이 셋째 하늘로 이끌려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늘을 3층으로 구분되어있다, 혹은 7개의 하늘로 구분되어져 있다고 믿었었습니다. 첫 번째 층은 우리가 보는 대기권의 하늘이고, 두 번째 하늘은 태양과 달과 별이 있는 대기권 밖의 공간, 지금으로 말하면 우주 공간이 되겠죠. 그리고 가시적인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공간이 있다고 믿었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실제로 분리된 어떤 공간적인 의미로서의 하늘의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 우리의 가시적인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어떤 언어로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는 환상을 체험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실제 내 몸을 입고 갔었는지, 아니면 영혼이 이끌려 올라가서 보았는지는 확실히 알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당시에 헬라철학 자체가 이분법적인 사고가 강했었고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체적인 것은 악하다는 사고가 강했었기 때문에 아마 정과 욕에 제한을 받는 육체를 입고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조차 자신은 확신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죠.
그가 셋째 하늘에 올라가 낙원에 이르러 경험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들었던 것이 아니라, 아마 계시의 성격이 강한 말씀을 들었을 것으로 이해됩니다.
아마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는 너무나 신비로운 것이어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놀라운 것들일수도 있고요. 또한 비밀스러운 계시를 받은 것이 있기에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성경에서는 묵시문학의 성격을 띈 책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요한계시록이 묵시문학의 작품이고요 다니엘서도 묵시문학으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정경으로 분류된 책 안에서 그렇고요. 또 외경이나 위경등에 들어있는 책에도 묵시문학의 성격을 띄는 책들이 더러 있는데요. 오늘 이 바울의 고백 또한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묵시를 뜻하는 헬라어인 아포칼립시스는 덮개를 벗긴다, 또는 감추인 것을 드러내 보이다 비밀을 드러내다 라는 뜻을 지닌 명사로 쓰여집니다.
묵시와 계시는 같은 뜻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차이점을 두자면 계시라는 뜻은 이 피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뜻을 드러내고 있음에 대한 것이라면, 묵시는 계시 안에 포함되어 대게 종말론 적인 내용이나, 혹은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사건을 드러내는 문학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바울도 이와 같은 묵시적인 성격을 띈 환상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환상을 보았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만 바울이 밝히 드러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드러내더라도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스스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바울이 받은 계시의 내용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아닐 확률이 99.99% 정도 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이 너희는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체험하지도 못하는 이런 계시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죠.
우리가 11장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거짓사도들과 미혹케 하는 이들이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아마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가르침들을 전하는 일들을 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단이나 미혹에 빠지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어떤 특별한 계시나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자신을 더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으로 더 신령하거나 신비로운 사람처럼 말함으로서 그런 신비로운 체험을 못한 이들에게 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고자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바울은 나 또한 이러한 환상을 나도 보았으나 나도 자랑할 만한 엄청난 체험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자랑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라고 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은 6절과 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받은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내가 자랑한다고 해도 나는 사실만을 말할 것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처럼 여겨지지 아니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듣고 생각할 때에 나를 지나치게 평가할 것 같아서 자랑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받은 계시는 너무나 크고 놀라운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께서는 내가 교만해 지는 것을 막으시기 위해서 내 몸에 가시와 같은 것을 허락하셨다 이것은 내가 교만해지지 아니하도록 하는 사탄의 사자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탄에 가시가 육체에 임한 것으로 말하는 것을 보아 아마 질병중의 한 종류이지 않을까 하는 해석이 가장 많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경험하고 3일간 보지 못하다가 아나니나의 안수를 통해서 다시 보게 되죠. 그리고 난 이후에 안구질환을 얻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장 많이 합니다. 아니면 사탄의 사자라고 표현함에 있어서 간질로 인한 발작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 견해들이 있으나 바울이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지 육체의 질병중에 한 종류일 것으로 생각이 되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은 이 가시로 바울이 당하는 고통이 상당한 고통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바울은 이 고통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해서 세 번이나 간구하고 기도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 번의 간청은 정말 간절한 간청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도, 이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이죠.
하지만 자신의 간절한 간청과는 다르게 예수께서는 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를 떠나가게 해달라고 간구하지만, 오히려 주님은 바울에게 너에게 베풀어준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와 함께 나의 능력은 연약한 이들을 통하여 완전히 드러남을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께 바라는 것들은 나의 약함이 드러나기를 바라기보다는, 나를 높이시고, 나에게 주신 명예나 건강이나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우러러볼만한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대부분의 간증들이 이와 같은 것 아닌가요? 하지만 오늘 바울의 고백은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의 약함을 통해서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적대하는 이들 거짓사도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자신의 강함을 드러내려 했고, 자신의 특별함들을 더 강조함으로 인해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칭송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스스로 의로운 일꾼인척 자신을 가장하려고 했으나 그들의 열매는 결국 자신들이 높임을 받고자 했던 일들이었죠.
하지만 도리어 바울은 더욱 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함으로서 진정한 사도로서 또 참된 신자로서 살아가는 모범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이 받았던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함은 그리스도 때문에 받게된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때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강한 능력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받았던 고린도교회의 능욕도, 전도여행을 하면서 받았던 박해도, 굶주리며 옥에 갖힘에도 그 믿음이 쇠하여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욱 강하여졌던 것은 그 고난과 역경속에서 바울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들을 더욱 깊이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실 고난 받는 것을 즐겨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평안함 가운데 사는 것을 더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고난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함 속에서도 굴하지 아니하고 더욱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려는 그 때에 더 강한 능력으로 신자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바울도 9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기 위함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주는 편안함을 버리고, 나의 약함을 드러내며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함 속에 살아갈지라도, 그리스도를 붙들 때 그 때 나를 통하여 당신의 강함과 온전함을 드러내시는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우리는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 머물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까?
질문2.
나의 약함을 감추고 싶으신가요? 나의 약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드러남을 믿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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