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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첫만남 (근원과 재료)

by 터틀곽 2023.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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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근원과 재료)

(1:1,27)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간이 저에게 있어서 의미가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는 새성전에 입당하여 제게 주어진 첫 번째 주일 설교의 자리이기도 하고요. 두 번째로는 목사가 된 이후의 첫 번째 주일 설교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을 준비해야 할지가 굉장히 고민이 되었습니다.

 

또 우리 성도님들도 지금 약간 혼란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으실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지금 제가 목사라는 직분으로 2주차를 보내고 있는데, 제가 오라교회에서 햇수로는 8년 만으로는 7년간 전도사라는 직분으로 있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목사가 되어버려서 뭔가 익숙했던 호칭에서 새로운 호칭으로 저를 대하셔야 하는 것에 대한 혼란감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사와 목사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두고 혼돈 하실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세상적으로 생각해보면, 제가 무슨 승진을 해서 직급이 올라갔다고 볼 수는 없고요. 그렇다고 무언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문적인 빛나는 성과를 내어서 어떤 학위를 받아서 석사에서 박사가 된 것도 사실은 아니거든요. 물론 제가 안수를 받기 위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논문도 쓰고 심사도 받고 여러 과정들을 거치기는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2주 전의 저와 오늘의 저의 상황이 무언가 눈에 띄게 바뀐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저의 생김새가 달라지거나 신체의 변화가 있어서 갑자기 날개가 달렸다든지, 머리 위에 불꽃이 보인다든지 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게 안 보이시죠? 정상입니다.

 

그래서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전의 저의 모습과 지금의 저는 동일 하지만, 우리 오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기독교 사역이라고 하는 이 사역의 부르심 앞에서 여러분을 섬기도록 책임을 위임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지체들, 곧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과 삶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봉사하기 위한 소명을 위임 받은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와 같은 소명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 소명이 모든 침례교회 안에서 기능과 행정적으로도 인정이 되고, 인준을 받게 된 것이죠. 그래서 저는 이전과 같이 말씀을 준비하여 선포하고, 또 침례교회가 가진 성례전들을 섬기고 인도하면서 저에게 주어진 소명의 자리를 잘 지켜가야겠다는 다짐을 함과 동시에 저를 목사로 인정해 주시고 말씀을 전하는 일과 성례전의 자리에 저를 위임해주신 오라 교회 공동체의 사랑과 지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분께서 목사가 된 소감을 말씀해달라고 하셔서 이 말씀으로 소감을 대신 전하여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의 설교 제목은 제가 사역자로서 첫 번째 했던 설교의 제목과도 같습니다. 뒤에 괄호는 업데이트 한 것이고요. 제가 신학교에 다니면서 전도사라는 호칭으로 처음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때는 중등부와 고등부가 나뉜 교회에서 사역을 했었는데요.

제가 맡았던 부서가 중등부였습니다. 그때 교사 선생님들과 학생들과 처음 만남을 가진 자리에서 했던 설교가 첫 만남이라는 설교의 제목으로 설교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설교 내용의 기록이 남지는 않았는데 기억은 남아 있거든요. 그래서 첫마음을 기억할 겸, 그런 의미를 부여할 겸해서 준비를 하였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저에게 이렇게 큰 의미가 있는 날에 어떤 말씀을 전할까 고민을 했는데요. 제가 목사로서 이러한 직분과 소명에 대한 고민, 그리고 정의를 저에게만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너무 주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함께 각 사람의 소명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서 모두 함께 반응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많은 고민 끝에 오늘의 본문을 선택하였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가지 미리 말씀을 드리면 오늘의 설교가 굉장히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내용을 다룰 것이거든요? 그래서 흐름을 놓치시면 왜 저렇게 어려운 설교를 할까? 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담임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오라교회의 수준은 굉장히 높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괜찮다. 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기에 오늘은 조금 집중을 해주시면서 호흡을 같이 해주시면 우리 모두에게 큰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인간이 어떠한 목적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너무 진부한 내용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죠. 착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죄짓지 않고 사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 정도의 수준으로 우리는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창조된 인간은 온전함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을 미리 이루어 놓으시고 마지막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창세기 26절에서 말하는 사람은 원어로 아담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개역 성경은 2장에 가서야 아담이라고 하는 대명사로 아담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126절에서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로 만들어진 인간도 원어로는 아담이라는 것이죠. 이 아담은 사람을 대표함과 동시에 그 존재를 드러내는 뜻과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라고 하는 또는 인간이라고 불리는 아담이 창조될 때, 하나님께서는 근원과 재료를 가지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이 근원과 재료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물컵이 있는데요. 이 물컵이 존재하는 이유를 바르게 아는 것은 이 물컵의 왜 존재하는지 그 근원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 물컵은 사람이 마실 물이나 음료를 담아서 마시게 할 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쓰임 받으면 그 물컵은 의롭게 의미 있게 쓰임을 받은 것이고 만들어진 소명대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선한 용도로 아름답게 쓰임을 받은 것이죠.

 

그런데 이 물컵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와서 이 물컵이 만들어진 근원적 의미에 집중하지 아니하고 이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나? 이 재료가 무엇인가? 아 이것은 모래와 점토로 구워낸 딱딱한 것이구나. 이것을 어디에 쓸꼬? 라고 생각하면서 이 물컵에 물이나 음료를 담아서 다른 사람의 얼굴에 뿌리는 용도로 쓰거나, 아니면 이 컵을 무기로 삼아서 다른 사람의 머리를 치는 용도로 쓰거나,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렇게 종종 쓰이죠. 아니면 흙을 파는 용도로 쓰인다면 어떨까요? 만약 그 물컵이 다른 사람을 망신 주거나 사람을 해치는 용도로 쓰게 된다면 그 물컵은 불의하게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 쓰임은 물컵이 만들어진 소명대로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모래와 점토라는 재료로 딱딱하고 튼튼하게 구워낸 이유는 물이나 음료를 담아서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용도로 쓰기 위해서 이것을 만들어낸 것이구나. 라고 이 근원에 대해서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이해가 되시죠?

 

그러면 먼저 근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 2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26절의 포인트는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하나님을 의미하죠. 이 형상과 모양은 인간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인간 존재의 근원이죠. 창세기 11절부터 25절까지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존재하는 근원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세계를 다스리는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먼저 정확하게 짚고 나서 성서를 이해해야 하는데요. 만약 이 말씀을 사람이 주체가 되어 이해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 문제가 이 다스림에 대한 오해와 착각 때문인데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다스리게 하자는 말씀은 억압과 군림, 파괴와 정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스림은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선하고 좋은 것들을 지키고 보존하고 가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이야 시대가 발전하여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대표성을 띄는 전쟁이나 억압이 없지만, 이전의 서구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타인을 얼마나 억압하고 지배하려고 했습니까? 십자군 전쟁부터 시작하여서 유럽국가들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화 할 때도 선교라는 명목하에 그들을 억압하고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기록된 말씀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자신들이 주체가 되려고 했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악을 저지르게 된 것이죠. 물론 지금도 이 말씀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생각과 뜻대로 끌어다 쓰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인 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억압하고 차별하고 군림하려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죠. 이것은 말씀의 주체를 잘못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좀 돌아가면요.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주체가 되셔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조물인 인간을 통해서 창조된 피조 세계를 잘 다스릴 수 있는 청지기적 역할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떼어 주셔서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본래 하나님께서는 형상과 모양이 없으신 분이시죠.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빛이시고 생명이시기 때문이죠.

 

우리가 이해하는 형상과 모양은 형체를 가진 어떤 것,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각과 차원의 한계 때문이죠. 우리가 쓰는 언어와 생각과 상상력은 우리가 가진 지각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이 형상과 모양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해석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역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역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하나님의 지혜이며 계시적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으로 이해하는 영역이 아니라 믿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영역이라는 것이죠. 만약에 누군가가 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백프로 이해하고 해석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가 많은 사람이니 멀리하시면 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여러 주석가들이나 성경 연구가들이 연구한 내용을 종합해서 우리의 지성의 한계로 그 말씀을 유추하여 이해하는 것과, 또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조명하여 주시고 계시하여 주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의 틈을 살며시 들여다 본 것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너무 어려우신가요? 제가 설교를 쓰면서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목사가 된 이후의 첫 설교인데, 설교를 잘 해야 할 것인데 그리고 잘하고 싶기도 한데 나는 지금 잘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설교를 쓰는 내내 들었습니다.

 

제가 청소년부 모임을 하면서 아이들과 말씀을 나누다가 아이들이 종종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을 지을 때가 있는데요.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하는 나쁜 습관을 갖고 있거든요? 이해가 될 때까지 다시 하는 그런 습관이 있어요. 이해가 되시죠? 아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무엇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자유의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자유의지가 인간이 가장 하나님을 닮은 신성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성은 육체에 종속된 것들의 발현이지만, 이 자유를 가진 자유의지는 인간에게만 부여된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것이죠.

 

곧 우리는 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빛 가운데 나아가 빛의 자녀로 살아갈 수도 있고, 또 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어두움 가운데 거하며 마귀의 자녀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마귀의 자녀는 좀 너무 심한 발언 아닙니까! 라고 생각이 드실수도 있지만,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난다고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고요.

에베소서에서는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빛과 어두움의 경계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빛과 어두움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죠.

 

그래서 창세기 127절에는 그 말씀을 그대로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라고 기록된 것이죠.

 

우리가 인간의 근원을 이야기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요. 그렇다면 첫 번째 질문이었던 인간의 근원을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빛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 세계를 사랑하며 잘 가꾸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이 피조세계는 자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또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까지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 인간이라는 단어가 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사람 인자에 사이 간자를 쓰는데요. 이 사이 간자가 경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경계를 가진 존재이며, 또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경계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경계가 흐트러지거나 허물어지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 경계라는 의미를 생각할 때 단순히 어떤 선을 넘어가면 안되는 것, 어떤 다른 힘을 범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지만 혹은 하고 싶지만 어떤 경계가 있기 때문에 하지 않거나 못 하는 의미로서 경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조금 부정적인 이미지죠. 예를 들어서 이 경계 밖으로 나가면 안된다. 혹은 이 경계 안으로 들어와선 안 된다. 라는 이미지로만 경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게 인간의 본성 아닙니까? 왜 하지 말라고 하지? 라고 생각은 하지만,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는 파악하지 않은 채 자신에게 주어진 경계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는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경고의 이미지로서의 경계라든지, 휘장으로 가려진 지성소를 넘어오면 죽는다는 경고의 이미지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까 주체에 대해서 말씀드렸잖아요. 창세기 1장이 하나님을 주체로 쓰여졌다는 말씀을 기억하시죠?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린 선악과나 지성소의 근원적인 의미를 인간의 관점으로 끌고 내려오면 그 경계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생각됩니다. 저희 애기들도 가끔 저에게 물어요. 하나님이 선악과를 안 만드셨으면 이라던지, 아담과 하와가 안 따먹었으면 우리는 에덴에 계속 살고있었겠죠? 라고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 안해보셨나요?

 

뱀이 그것을 노린 것이죠. 뱀은 하와에게 뭐라고 질문합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는 질문으로 하와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그런 말씀을 아예 하신 적이 없으시죠? 말씀을 왜곡 시키는 것입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하셨죠. 다만 선악과는 먹지 말도록 경계를 세우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나 안 따먹나를 시험하기 위해서 몰래 숨어서 지켜보시려고 유혹의 상징을 세워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와가 따먹는 순간 옳거니 딱 걸렸구나. 역시 너희들은 이것 밖에 안되는 존재이군. 이라는 식으로 세워두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세우신 이유는 신과 인간 가운데 사랑의 경계를 두고자 하심입니다. 에덴의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도록 충만을 베풀어 주시고 인간에게 하나님을 가장 닮은 자유의지를 주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 창조하셨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경계를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두신 것이죠.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가 해야 할 근원적인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동산에 있는 모든 충만한 것들을 누리고 취하면서 이 모든 것을 베푸신 창조주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고, 경계의 상징인 선악과를 바라보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에덴에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를 찬송하고 경배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임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 그들의 존재와 창조의 근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킴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과 은혜의 경계를 범하도록 어두움의 경계로 그들을 이끌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이 인간 됨의 근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음으로 인해서 신앙과 삶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죠. 이 근원은 아담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 모든 인간에게 부여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컵이 그 근원이 상실되면 존재하는 의미가 함께 상실되듯이 인간도 그 근원이 상실되면 이상한 모양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맞는 것인가? 라는 본질적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죄로 인해서 틀어지고 붕괴된 구조 안에서 지리멸렬하게 흩어지고 찢기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 이유는 우리가 창조된 재료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번에는 우리 존재의 재료에 대해서 묵상해보길 원합니다. 첫 사람으로 등장하는 아담이라는 단어는 붉다. 붉게 물들다. 라는 뜻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 붉다. 라는 뜻도 히브리어로는 아담이라고 읽습니다. 창세기 2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흙도 히브리어로 아다마 라고 읽습니다. 그리고 흙이 가진 색이 붉은색이기도 하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재료가 바로 흙임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27절에서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죠.

 

이 땅과 흙은 원어로 읽을 때, 아다마 에페르라고 읽습니다. 아마다는 땅, 흙을 의미하고 에페르는 먼지, 티끌 재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땅에서 취한 먼지와 티끌이라는 의미입니다. 다 타버리고 흩날리는 재를 지칭할 때도 이 아파르 라고 하는 단어를 쓰는데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 땅에 있는 것으로 지으셨습니다. 사실 이 땅이 가진 의미도 잘 생각해보면 하늘이라는 것과 대비되는 구조 안에 있습니다. 발로 디디며 사는 땅은 고대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선한 것이나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위에 있는 하늘의 것은 신령한 것이지만, 땅에 있는 것은 그와 대비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죠. 히브리인들이 외출 이후에 발을 씻지 않으면 부정하게 여긴 것도 이와 비슷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창조 때 처음 생겨난 땅에 있는 것들 중에서도 얼마나 좋은 것들이 충만했겠습니까? 오염된 것이 정말 하나도 없는,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황토나 지점토 같은 존귀하고 고급진 재료로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땅에 있는 것 중에서도 가장 천한 것으로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재와 먼지, 티끌 같은 것으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이죠.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 인간을 만드신 재료만 묵상해보아도 인간으로 하여금 내가 어떤 존재인가?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다마 라고 불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아담이라고 하는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하고 특별한 은혜인 근원을 망각했을 때 우리는 나 자신의 존재가 아다마 에페르 곧 땅의 티끌임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죠.

 

인간이라는 이유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의미를 붙여가면서 인간이 무언가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의 재료는 사실 아주 미천한 것으로 만들어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죽어서 비석이라도 하나 세우려고 많은 애를 쓰면서 수고하며 살아가지만, 우리는 땅에서 취하여진 가잔 비천하고 미약한 아다마 에페르 땅의 먼지와 같은 재료로 만들어진 사실이라는 것이죠.

 

그 인간의 역사가 어떠한가요? 성경을 살펴보아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역사도 그렇고 또 우리가 살아왔던 인류의 역사도 그러하지만, 우리 인간은 살아감에 있어서 많은 그릇됨과 실수와 죄와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창조가 이루어진 이후 하나님의 충만함 안에 살고 있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주신 에덴에서 모든 것을 먹을 것으로 주신 충만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경계하신 그 단 하나의 결핍인 선악과를 선택합니다. 이 또한 자유의지로 그들이 선택한 것이죠.

 

그리고 창세기 65절에서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습니다. 창조의 근원을 잃어버린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여기까지의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 인간은 참 이상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재료는 어떻습니까? 천하디 천한 땅의 것 중에서도 티끌과 같은 것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하나님을 가장 닮은 신적 형상인 자유의지가 담겨져 있고 그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인 루아흐 하나님의 생기가 담겨져 있는 것이죠.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재료는 정말 미천하고 천한것이지만 우리의 근원과 존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우리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며 빛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고, 또 반면에 단지 이 땅의 재료처럼 이 땅만을 바라보며 어두움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는 것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이 땅의 것을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자면 골로새서 32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에 있는 지체는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곧 우상숭배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타락하게 한 뱀이 받은 저주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창세기 314절이죠. 평생토록 배로 기어 다니는 것입니다. 아주 상징적이죠. 아담의 재료인 흙과 가장 가까운 곳에 밀착해서 기어다니면서 흙을 먹을 것이라는 저주입니다. 그 뱀이 먹는 흙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땅의 것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생애를 먹으며 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뱀과 같은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창세기를 근원과 재료라는 관점으로 창세기를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근원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어떤 근원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바울이 자신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고백한 것은 자신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발견한 것이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당대의 석학이었고 가장 뛰어난 지식을 가진 바울은 자신의 모든 배경과 지식을 배설물로 여기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존귀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한 결단과 고백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신의 근원을 깨달아 알았기 때문이죠.

 

저와 여러분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땅의 것에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 안에 계십니까? 날마다 이 근원의 문제를 마음속 깊이 품고, 창조의 원형으로, 새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우리가 그 근원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고 헤매일 때, 혹은 우리가 사탄의 꾀임에 빠져 육신의 정욕과 이 땅의 것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그때는 나의 재료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기억하면서 우리의 존재를 묵상하고 다시 그 은혜의 근원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안으로 나아가기를 다짐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창조하실 때, 이 땅의 하찮은 재료로 우리를 빚으셨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심어주시고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셔서 창조의 근원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소망과 존재의 의미를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주어진 생을 살아갈 때, 아무 의미 없이 이 땅의 것들을 꿈꾸며 소망하며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근원적 질문을 품고 근원적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빛으로 살아가기에 힘쓰는 인생이 되어 우리의 삶이 주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서 풀어지고 깨달아지고 충만해지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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