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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이스보셋의 죽음

by 터틀곽 2023.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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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보셋의 죽음

(사무엘하 4:1~12)

 

우리가 함께 나누지는 않았지만, 토요일의 본문에 3장 후반부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후반부의 내용이 바로 아브넬의 죽음입니다.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허수아비로 세워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지만, 이스보셋이 자기를 책망하고, 또 다윗의 집이 강성하여지자 아브넬은 유다 땅으로 넘어갑니다. 다윗은 그러한 아브넬을 받아들이지만, 다윗의 장군이었던 요압이 아브넬을 조용히 불러내어 살해합니다. 그 이유가 아브넬이 요압의 동생이었던 아사헬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사헬의 피를 흘리게 한 아브넬은 그 피의 값을 자신이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한 나라를 좌지우지 해보려고 했지만,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게 되었고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 이후의 내용이 오늘의 본문인데요. 본문 1절을 살펴보니 이스보셋이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스보셋이 얼마나 놀랐던지 손의 맥이 풀렸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온 이스라엘도 놀랐다. 라고 기록하고 있죠.

 

이 구절은 아브넬이 제1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입증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이스보셋은 자신의 배경이기도 한 아브넬이 죽자 맥이 풀려 버렸습니다. 몸의 기운이 쇠진하여버린 것이죠. 얼마나 충격이 컸는지에 대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자신을 떠나 반역을 하여 다윗에게로 넘어간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응당 기뻐해야 하는 것이 더 합당한 마음일텐데 그의 죽음의 소식 앞에 맥이 풀려 버린 이스보셋은 그래도 아브넬을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도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와 같은 이유는 고대 사회에서는 한 인물이 국가의 운명을 의존할 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를 보면 한 명의 장수가 그 군대의 사기를 좌지우지 하기도 하고, 또 한 나라를 움직이기도 하는 것을 보면 아브넬이 그 당시에 이스라엘에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진 인물인지를 체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 나라를 지탱하고 있었던 인물을 잃었습니다. 나라의 존망의 위기가 닥쳐온 것이죠. 그러자 그때 그 위기를 틈타서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2절에보면 이스보셋에게 군 지휘관 두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죠. 한 명은 바아나요 다른 한명은 그의 형제인 레갑이었습니다. 참 이스보셋은 주변에 있는 인물들이 어쩜 하나같이 변변치 않은 인물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군 지휘관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잘 협력하여 통치하고 지켜야 할 인물들이지만 아브넬이 죽자마자 이들이 계략을 꾸며 이스보셋을 죽이려 합니다.

 

이 사람들의 출신을 보니 베냐민 지파 사람이라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사울과 같은 지파의 사람이죠. 이스보셋도 사울의 아들이니 당연히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좁게 보자면 한 가족이고 친척이 되는 사람들인 것이죠.

보통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인데, 욕심과 야욕 앞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존재인지는 이처럼 성경에서도 기록되어 있고, 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저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사울과 함께 된 베냐민 지파로서 가족과 친척이 되는 관계에 있었지만, 이스보셋을 죽임으로 인해서 얻게 될 보상에 눈이 멀었습니다. 꼭 우리 현대 한국사회에서 보험금을 부당하게 타내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나 자녀를 잔인하게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같은 일을 그들이 행했던 것입니다.

 

바아나와 레갑은 아브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이 일을 계획했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들을 지켜줄만한 위인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더불어 이스보셋을 신뢰하지 못하는 여러 이해관계를 생각했겠죠. 그리고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의 배를 칼로 찌르고 이후에 머리를 베어 밤새도록 달려 헤브론에 도착하여 다윗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바칩니다.

 

그리고 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죠.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며 아뢰되 왕의 생명을 해하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 하니

 

그들이 밤을 새워 헤브론을 향해 달려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제 다윗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바치면 우리에게 큰 선물과 공을 치하하는 마음으로 높은 자리를 내어주겠지? 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저번 주 금요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러한 방법이 바로 세상의 길과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원수는 밟아서 싹을 자르는 것, 아예 복수할 여지를 만들지 못하도록 그의 자손들까지 찾아내 죽이는 것이 인류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마도 그들은 다윗이 사울의 전리품을 가져온 아말렉 청년의 죽음에 대해서 듣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이죠. 우리가 3장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사울의 전리품을 다윗에게로 가져온 아말렉 청년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듯이 이들 또한 그와 같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을 오늘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데 8절과 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각각 등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8절에는 레갑과 바아나가 말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들은 무어라 증언하고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 되신 왕의 원수를 사울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다. 라고 증언하고 있죠.

 

그리고 9절에서는 다윗이 말하는 증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라고 증언하고 있죠.

 

둘 다 똑같이 여호와께서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지만, 그 둘의 증언이 다릅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를 여기서 말하는 왕은 다윗을 말하고 있죠. 다윗 왕의 원수인 사울의 집에 갚으셨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혀 틀린말은 아니죠. 사무엘을 통해서 그의 집안이 몰락할 것을 심판의 메시지로 주셨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의롭게 포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악인이 의인을 죽였다고 말하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의 행위를 단죄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레갑과 바아나는 실제로 다윗의 호위병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다윗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어떠한가요?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증언은 레갑과 바아나의 증언과는 다른 고백의 하나님이십니다. 레갑과 바아나는 자신의 탐욕과 악행을 포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종종 그런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거창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내게 말씀하셨다. 라던지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하셨다. 라고 말은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속내에는 자신이 높임과 영광을 받기를 원한다던지, 이 일에 대한 책임과 결과가 하나님께 있다는 책임 전가라든지 하는 그런 속내가 담겨 있는 사람들의 간증을 종종 듣습니다. 이상하게 그런 말과 행동은 좀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다윗은 어떻습니까? 내 생명을 사지에서 건지신,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 가운데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는 증언입니다. 다윗이 정말 곤경에 처했을 때, 두려움과 공포와 외로움 가운데에 버려졌을 때, 그때 자신을 건지시고 위로하셨던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죠.

 

이 증언은 레갑과 바아나를 부끄럽게 하는 증언입니다. 다윗이 목숨을 잃을 뻔한 그러한 위기상황 가운데에서 자신의 목숨이 보전되었던 것은 어떤 다른 이들의 도움과 공적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셨던 것이지, 저들의 악행이나 도움으로 인하여 그 목숨이 보전되지 않았던 것을 확고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증거되는 하나님 이름의 증언이 어떠한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내 생명을 환난 가운데서 건지시는 이로 증거되고 있는지, 아니면 레갑과 바아나처럼 나의 탐욕과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만약 둘다 아니라면 내 인생 가운데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지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레갑과 바아나도, 또 사울의 전리품을 챙겨왔던 아말렉 청년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정말 열심을 다해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봤을 때 그들의 열심히 얼마나 특심이었습니까? 아멜렉 사람은 민족을 배신할 결단을 가지고 다윗에게 나아갔고, 레갑과 바아나는 자신이 섬기던 왕을 죽이는 결단을 내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관점과 방식으로서는 정말 칭찬 받을만한, 정말 높임을 받고 칭송을 받을만한 일을 했던 인물들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 방식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과 그 관점으로 살아가는 이에게는 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도 우리의 만족과 성공과 탐욕을 위하여 애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의 삶을 살아가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질문1.

나의 열심의 방법은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나요? 이 세상의 인정을 받고 있나요?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있나요?

 

질문2.

내 생명을 환난 가운데서 건지시는 분은 누구신가요? 나의 삶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나는 누구의 도움을 받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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