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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강성하여지는 다윗

by 터틀곽 2023.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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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하여지는 다윗

(사무엘하 3:1~11)

 

사울이 죽은 이후 이스보셋은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에 의해서 이스라엘 족속의 왕이 되었고 다윗은 유다의 성읍에 올라가 헤브론에서 유다족속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족속과 유다족속은 서로 전쟁을 하며 갈등 관계에 빠지게 된것이 어제까지의 본문이었죠.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31절부터 시작하는데요. 여기서도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되었고, 다윗은 점점 강하여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11절까지 본문을 읽었는데요.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도 다윗의 집이 강성하여 지는 내용과 사울의 집이 몰락해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절부터 5절까지 말씀을 통해서 다윗이 여섯 아내를 통해 여섯 아들을 낳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고대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크게 이상하지 않은 문화적 요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성경을 이해할 때 아니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서 일부일처제로 살지도 않고 왜 저렇게 많은 아내를 둔거야?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지금 현재 대한민국 땅에 살고있는 우리의 문화적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그런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요.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쓰이던 시대의 상황이 우리의 시대와 다르니 그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여섯 아내와 여섯 아들을 두었다는 이 기록을 남긴 이유는 다윗의 집안이 강성하여 짐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세사회나 고대사회에서는 자녀가 많을수록 그 가문이 왕성하여지고 힘이 있는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생산하는 것에 있어서 많은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가 창세기에서도 보았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까지 이들은 자손을 낳는 문제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자녀를 낳는 것은 고대사회에서는 생존과 더불어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처럼 의술이 발달해서 어떻게 해서든 자녀를 낳을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기 때문에 자녀를 생산하다가 산고 중에 아이가 죽거나 산모가 죽는 일도 허다했겠죠. 그래서 더욱 이 자녀를 낳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아내도 많았고, 그 아내들이 자녀를 잘 낳았음을 기록함으로서 다윗의 가문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가문으로 세워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서 6절에는 사울의 가문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으니라.

 

사울의 집에서 권세를 잡은이가 누구라고 말하고 있냐면 아브넬이 권세를 잡았다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를 미루어보아 사울의 혈통이었던 이스보셋이 왕권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권력은 아브넬이 쥐고 있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넬을 통해서 이스보셋이 이스라엘 족속의 왕이 되었지만, 그 실권은 오롯이 아브넬에게 있었던 것이죠. 결국 아브넬은 충성스럽게 사울의 가문을 섬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스보셋을 앞세워서 나라를 세운 것에 불과 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꼭두각시 왕을 세워놓고 그 뒤에서 조종하는 그런 형태를 아브넬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죽기 전에 이런 후계작업을 해놓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응집력은 이스보셋에게 큰 배경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오히려 아브넬이 군대장관으로서 군사를 움직일 수 있는 실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스보셋은 그저 혈통만 사울의 아들이었던 것이죠.

 

그러니 얼마나 아브넬의 눈치를 보면서 살았을까요? 그러던 중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다. 7절에 보면 사울의 첩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요.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 라고 화를 냅니다.

 

그 일이 실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성서에서 정확하게 그 사실 관계를 증언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듯이 이미 권력의 최상위에 있었던 아브넬이 그런 행동도 서슴치 않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왕의 후궁이나 첩들에게 손을 댄다는 것 자체가 그 왕가를 무시하여 수모를 주고 본인의 세력을 세워가기 위해서 행하는 일종의 쿠데타와도 같은 행위인 것이죠. 바로 그 일을 아브넬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보셋은 그 일에 대해서 왕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아브넬을 꾸중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미 이스보셋보다 세력이 커진 아브넬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노발대발하며 오히려 이스보셋에게 화를 냅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매우 분하게 여겨 내가 유대의 개 머리냐? 라고 묻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형제와 친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다윗의 집에 넘기지 아니하고 목숨을 구해주었거늘 이 여인에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풀어보면 이런 뜻이죠. 너가 나를 개처럼 생각하는 것이냐? 내가 아니었으면 넌 당장에 다윗에게 잡혀가서 죽었을 것인데, 내가 큰 은혜를 베풀어서 너와 너의 형제와 친구들을 구원하여주고 왕으로까지 삼았는데, 감히 나에게 대들어?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이스보셋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스보셋을 향하여 이 나라를 빼앗아 다윗에게 바치겠다고 이스보셋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브넬을 두려워하여 이스보셋은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사무엘하의 저자는 이 두 가문의 구도를 극명하게 가르면서 다윗은 점점 강성하여 지고 사울의 집은 몰락하고 있는 과정을 그려냅니다. 이는 사울이 범죄하였을 때 사울에게 명하신 그 심판의 말씀이 성취되어지는 것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다윗과 그의 가문과 그에 반하여 이 세상이 가진 힘의 구조와 몰락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복을 받은 가문으로서의 은혜를 누립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언약처럼 많은 자손을 기업으로 받는 은혜와 복을 누리죠.

 

하지만 사울의 가문은 그 권력과 힘의 구조가 이 세상의 방식대로 굴러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방식이죠. 우리는 지금도 약육강식의 시대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경쟁하고 힘이 없으면 잡아먹히는 것이 당연한 구조 안에서 살아갑니다. 교육,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모든 영역에서는 이 약육강식의 구조 안에서 살아갑니다.

 

티비만 보아도 얼마나 부조리한 사회 현실 가운데서 살아갑니까? 800원을 횡령한 버스기사는 법정의 판결로 해고를 당하고, 연구비를 수억씩 횡령하고 힘 있고 인맥이 있는 이들은 면제 해 주었던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의 내용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의 자화상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은 이런 이들의 말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후의 내용에 등장하지만 아브넬도, 그리고 이스보셋도 다른 이들에 의해서 비참한 죽임을 당하는 결말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죠. 하지만 늘 정의가 승리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적어도 이 땅에서는 악한 이들이 더욱 잘 살아가는 그런 불의함이 계속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서를 기록한 전도자도 그런 행태를 보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라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자임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만연하게 또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불의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깨어서 반응해야 합니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하고, 불의한 것을 불의하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세상은 다 그런거니까, 원래 이 사회의 구조가 그런거니까. 라고 두 눈을 감고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 우리 안에 자리 잡아서 이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 나라가 충돌되는 힘이 신자에게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불의를 볼 때마다 나가서 데모하고 가스통에 불을 붙이고 화염병을 던져야 할까요?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 안에서 바른 삶과 의로움을 향해서 꿋꿋이 걸어가야 합니다. 때로는 비난과 조롱을 당할 때도 그 걸음을 멈추지 않고 우리가 마땅히 행할 일을 감당하며 끝까지 그 진리를 향한 바른 길을 옳은 길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바로 우리 신자가 감당해야 할 걸음입니다. 그 걸음을 통해서 세상을 향해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전무결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넘어지고 타협하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일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맞춰가야 합니다. 그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다보면 우리의 삶에서 주님께 드릴 열매들이 맺혀질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이스보셋과 다윗의 삶의 방식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질문2.

이 세상의 불의와 부조리들 앞에서 교회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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