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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압살롬이 돌아오다

by 터틀곽 202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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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이 돌아오다

(사무엘하 14:12~24)

 

어제의 본문을 통해서 드고아 여인이 암몬을 죽인 압살롬에 대한 비유를 풀어내어 다윗의 마음을 떠보았던 본문을 보았는데요. 이 비유라는 것이 사실 모든 상황에 적합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보편적이고, 또 객관적인 상황에서는 인정하고 받아들일 만한 요소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특정 상황이나, 특정 인물에게는 적용이 안 될 수도 있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예전에 저와 같은 회사에서 일하던 직원이 갑자기 저희 부서로 보직 이동이 되었었거든요. 당시에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는데, 알고 보니 음주운전을 하는 바람에 면허 취소가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일하면서 들어보니 본인은 운전한 것이 아니라 대리기사가 자기의 차를 찾지 못할까 봐 골목에 주차되어있던 차를 조금 옮겼다. 그래서 대리기사가 운전해준 차를 타고 집으로 왔는데, 누군가가 그 장면을 신고해서 집에 경찰이 찾아와서 면허가 취소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사실인지 아닌지 제가 확실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팩트는 술을 마셨고, 운전대를 잡았고 결국은 신고가 돼서 면허가 박탈된 것이죠.

 

음주로 인한 사고로 인해서 가정이 파탄 나는 경우를 우리가 이미 뉴스를 통해서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음주운전과 관련해서는 사회적인 잣대가 좀 많이 엄격해지기는 했죠. 개인적으로 음주운전에 대한 처벌이 아직은 좀 약하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이제는 음주에 대한 인식이 이전보다는 좀 엄격합니다.

 

제가 그렇다고 면허가 취소된 그 직원을 아주 상종 못 할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왜 이 직원을 자르지 않냐고 항의하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이도 저보다 많이 어렸고 본인은 자꾸 실수라고 하니까, 그냥 인생의 선배로서 술 조심해라. 건강도 건강이지만 음주운전은 정말 하면 안 되는 거다. 라는 식으로 충고와 권면만 했을 뿐이죠.

 

그런데 보통 공인에 대해서는 그 잣대가 많이 엄격하죠. 연예인들도 그렇고, 국회의원도 그렇고요, 또 운동선수들도 이 음주운전에 대해서는 좀 심각하게 대처를 하는 편입니다. 보통 연예인들이 이 음주에 단속되면 연예인 활동을 못 하는 경우도 종종 있죠. 이유가 무엇인가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인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어제와 오늘의 본문의 내용을 이미 우리가 살펴보아서 알고 있지만, 자녀들의 문제들로 인해 심각한 상황에 빠지게 된 다윗의 가족사를 지금 보고 있는데요. 암논은 자신의 배다른 누이인 다말을 강간하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은 오랜 시간 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아오다가 결국은 암논을 죽이고 도주하게 됩니다. 아침드라마에서도 다루지 않을법한 치욕스러운 일이 다윗의 왕가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죠.

 

물론 지금 시대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의 가문에서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지면 단번에 탄핵이 될만한 일입니다. 자식 문제까지 볼 것도 없죠. 밧세바를 취한 일만 가지고도 탄핵 요소가 차고 넘치는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자녀들의 문제도 그러하죠.

 

하지만 다윗은 고대 이스라엘의 왕 아닙니까? 당시에도 왕이었기 때문에 왕이 가진 절대권력으로 인해서 밧세바를 취하였던 것이고, 또 자녀들의 치욕스러운 문제 앞에서도 버티고 서있을 재간이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다윗은 공인이었습니다. 사실 공인이라기보다 사울 가문의 실패를 딛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영광스러움을 다시 빛나게 할 인물로서 세움 받은 왕이었던 것이죠. 이 다윗이 가진 대표성은 이스라엘이 가진 정체성을 대변하는 그런 대표성을 띤 인물과도 같았던 것이죠.

 

하지만 언젠가부터 다윗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고사성어 중에 비육지탄 이라는 말이 있죠. 삼국지에 나온 유비가 했던 말인데 허벅다리에 살이 쪄서 한탄스럽다는 뜻의 사자성어입니다. 예전에는 쉴새 없이 말을 타고 다녀 전장을 누비느라 허벅지에 살이 찔 새가 없었는데, 이제는 말을 타지 않아서 살이 많이 찐 것을 느낌으로 한탄스럽다는 말의 뜻이죠. 살이 계속 찌고 있는 저로서도 통탄해야 할 일이라고 느껴지긴 하는데요.

 

사무엘하 111절과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번역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그 다음 해 봄에, 왕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에게 자기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의 군인들을 맡겨서 출전시켰다. 그들은 암몬 사람을 무찌르고, 랍바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은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서 거닐었다. 그때에 그는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옥상에서 내려다 보았다. 그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다.

 

왕이 되어 태평성대를 누리자 다윗은 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왕궁을 거닐었습니다. 그리고 목욕하는 여인을 보는데요. 그 여인이 바로 밧세바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죠. 다윗은 성군이었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합하였고,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여 조공을 바치게 하던 왕이었지만, 왕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력에 취하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자 죄악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들어와 다윗을 무너지게 만들어버렸습니다.

 

물론 밧세바를 취한 이후, 나단의 질책과 그녀와 동침하여 얻은 아들이 죽은 그 과정을 거치면서 다윗은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무언가 다윗이 흐리멍텅하여졌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본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요압이 보낸 드고아 여인의 말에 휘둘려서 그 비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요동하였습니다. 그 여인의 말은 피할 수 없는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객관적인 비유였지만, 다윗은 그 비유 뒤에 숨어 압살롬을 보고 싶어하는 그 마음앞에서 요동하며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이미 말씀드렸듯이 다윗은 실패한 사울 가문과는 달라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의 마음을 보시고 다윗과 함께하여 주셔서 그의 이름을 아주 높이 세우셨지만, 어느샌가 다윗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멀리하여 어두움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이 어린이날이었잖아요. 어린 두 자녀를 키우다 보니 4월 말이 되면 아이들이 곧 어린이날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하루에도 열 두번 물어봅니다. 아빠 어린이날에 뭐할 거에요. 아빠 어린이날에는 뭐 사줄 거에요? 어린이날은 예스데이라는거 해봐요. 예스데이가 뭐냐면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해도 다 예스를 해주는거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자라나는 꿈나무인 아이들의 성품과 자존감을 위해서 이런 것이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 그리고 1년에 단 하루라도 아이들이 마음껏 행복할 수 있는 그런 날이 만들어진 것은 너무나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이죠.

 

하지만 뭐든지 예스를 해줄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어린이날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감수성 때문은 아니죠. 제가 주일날에도 말씀드렸듯이 뭐든지 예스를 하지 않는 것은 지켜야 할 경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는 바로 아이를 향한 사랑 때문이죠.

 

다윗이 정말 압살롬을 사랑했다면, 힘이 듦에도 그 죄를 강력하게 묻고 그에 합당한 징계를 내렸어야 함에 마땅합니다. 하지만 빛을 잃어버리고 어두움에 잠식된 다윗은 드보아 여인의 비유와 자신을 기분 좋게 만드는 그 감언이설에 마음이 풀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대화 뒤에 요압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해내죠. 그렇다면 더더욱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러한 장치들이 자신을 하나님과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것들임을 깨달아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의 그러한 간청에 못 이기는 척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이번에는 요압의 뒤에 숨은 것이죠. 그러고는 최소한의 장치로 궁전으로는 보내지만 내 얼굴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정도면은 압살롬이 알아듣겠지. 라는 생각이거나, 이 정도 했으면 하나님께서도 내 마음을 알아주실 거야.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궁에 들어온 압살롬은 결국 다윗의 얼굴을 보았고 다윗은 그런 압살롬에 의해 자신의 왕권을 내주고 도망가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모든 삶에서 완전한 거나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했던 다윗도 이렇게 무너지는데 저와 여러분이라고 완전한 삶을 살아가기는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와 다윗도 저렇게 무너지는데, 나라고 뭐 별수 있나 그냥 적당히 살아야겠다. 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성서가 기록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너무나 연약한 우리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에 조명을 받아야 하는 것이죠. 다윗도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했지만, 죄를 범함으로 인해, 교만함으로 인해, 다른 여러 요소로 인해 무너질 수도 있구나. 그러기에 기도하고 깨어있음으로 빛으로 나아가야 하겠다. 라는 쪽으로 우리의 삶을 계속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죠.

 

비록 우리가 다윗처럼 왕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크고 작은 문제들 앞에서 신앙의 여정 가운데서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압처럼 가까운 측근의 의중과 드보아같은 사람들의 감언이설을 의지해야 할지, 아픔과 괴로움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을 선택해야 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하시기를 소망하고 갈망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나를 가장 연약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알고있음에도 잘 포기가 안 되는 죄나 문제들이 있으신가요?

 

질문2.

다윗이 압살롬을 불렀지만, 압살롬을 보지 않은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얼굴을 보지 않음으로 문제가 해결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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