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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질그릇에 담긴 보배

by 터틀곽 2022.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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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후 4:1~12)

 

사람은 살아가면서 내가 어떤 존재이며,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내가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가 명확하여 질 때, 그 삶에 생명력이 깃들고, 열정과 가치로움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고 기질마다 다르지만, 내가 추구하는 이상향을 바라보면서 조금 더딜지라도 그 길을 향하여 꾸준히 걸어가는 것을 통해 인간은 내가 왜 이 삶을 살아가고 지탱하고 있는지를 기억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사람마다 그 이상향이 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돈을 향하여, 어떤 이는 명예를 향하여, 또 어떤 이는 가족을 위하여, 어떤 이는 안정된 삶을 향하여 살아갑니다.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있겠지만 우리 모두는 내가 그리거나 바라는 어떤 이상향을 향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가치관과 어떤 존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가 꿈꾸는 이상향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자들은 인식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고린도후서를 묵상하면서 바울은 계속해서 직분과 사역에 대한 내용을 개진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3장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자신의 존재의식을 분명히 바라보면서 살았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사도로서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그리고 이 직분을 주신 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이 고린도후서 3장에 나타나 있고요.

 

오늘 본문의 시작도 바울이 고백했던 직분과 그 영광을 드러내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나누었던 말씀입니다만, 함께 묵상하지 못하셨던 분들을 위해서 그 내용을 잠시 말씀드리자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공동체로부터 온전한 신임을 얻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고린도교회는 서로 당을 나누어 갈라져 있는 상황이었고 바울을 인정하지 않는 교인들로 인하여 바울은 상심한 마음속에서도 이 사역의 직분을 주신 이가 성령님이시며, 사람의 추천서로 인해서 인정받는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이 직분과 자격을 주신 이가 성령 하나님임을 고백하면서 바울을 배척하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의 자격을 인정하고 받아 주기를 바라는 내용이 3장의 말씀입니다.

 

그 이후에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바울은 사도의 직분에 담겨있는 복음의 능력과 광채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요.

 

본문 1절에 기록된대로 바울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바울은 이 직분을 맡은 것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서 낙심하지 않는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수고와 사역을 통해 세워진 공동체가 오히려 바울을 배척하고 존중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흔들리지 아니하고 낙심하지 않는 이유로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 때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떠한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인지를 늘 기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믿는 이들을 핍박하고 공회에 넘기는 일에 앞장서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매섹에서 예수님을 뜨겁게 만나고 회심하여 변화된 인물이 바로 바울이죠.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큰 용서와 긍휼함을 입은 존재인지를 깨달아 알았던 것이죠. 그로 인해서 자신이 감당하는 이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정진할 수 있는 이유는 바울이 받은 은혜의 크기와 깊이를 심령에 사무치도록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사역해 왔는지를 2절을 통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부끄러운 일들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며, 간교하게 속이지도 않았으며 말씀을 왜곡하거나 그릇 가르치지 아니하였고 오직 진리를 드러내기에 힘썼음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진리를 따라 살기에 힘썼던 인물이었음을 우리는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바울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배경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이죠. 우리가 이렇게 세세하게 바울의 상황과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의 대부분이 바울을 통해 기록되었으며 우리는 기록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경안에 담겨 있음을 배우면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 이라는 인식이 우리 안에는 이미 자리하고 있지만 바울이 이 서신서를 기록하던 그 시점에는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수고와 해산의 고통으로 세운 교회 공동체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이 이런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맡은바 사명을 끝까지 완수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도의 직분이 누구로부터 왔으며, 이 직분에 담긴 영광스러운 가치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신이 얼마나 큰 은혜와 긍휼하심을 입은 존재인지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가 주님이심인 것을 선포하며,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종이 되어 섬기는 것을 고백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응당 나를 미워하고 박해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좋은 마음과 좋은 언어가 나가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가 월요일날 3장을 함께 묵상하면서 말씀드렸었지만 이렇게 바울을 정서적으로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교회가 있으면 그 교회를 향해서 여러분이 좋을 대로 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사도의 추천서가 있는 지도자를 원한다면 그런 사람을 추천받아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십시오.

 

나는 돌보아야 할 교회가 너무나 많습니다.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갈라디아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등등 이미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니 여러분은 여러분이 좋은 대로 행하시길 바랍니다. 라고 끊어냈어도 상관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5절에 기록된 바울의 고백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죠. 네 원수를 사랑하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까지도 가주어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내어 주어라,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울의 고백을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말씀을 읽는 것은 참 쉽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이루면서 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원수가 왜 원수입니까? 나에게 원한을 갖게 한 인물이 바로 원수 아닌가요? 영어성경에는 에너미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뜻이 적이에요 적 나를 해하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원어로는 증오, 혐오와 같은 단어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해를 가하고 나를 넘어뜨리려는 존재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와서 내 뺨을 때리고 내 겉옷을 빼앗아가고, 억지로 나에게 해를 가하는 이를 향해서 좋은 마음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할까요. 싫어하는 대상을 피할 수 없이 언젠가는 만난다. 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제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면 확 밀어버리라는 뜻도 담겨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성화가 덜되서 그런 것 같습니다만 그만큼 원수를 용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부모님의 원수도 갚고 친구의 원수도 갚고 인간은 태생적으로 원수를 갚아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존재인 것이죠.

어찌 보면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바울에게 하고 있는 행위가 이런 원수와 같은 행위 일수도 있습니다.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내가 너희의 종이 되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이유를 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바울은 이 6절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빛의 창조와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빛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빛이 있으라입니다. 이 빛은 단지 어떤 광명채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빛이 비춤으로 인해서 어둠과 혼돈은 물러가고 모든 사물의 존재가 드러나며 질서가 세워지게 되었죠.

 

바울은 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비춰진 빛의 능력이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을 아는 빛으로 우리 마음에 비춰져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곧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지식을 이 빛으로 표현함으로서 이 빛이 자신에게 비춰짐으로 인해 바울 자신의 정체성과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성을 밝히 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 까지는 어렵더라도, 많이 양보해서 용서까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원수를 향하여 종이 되는 것은 정말 가능한 일일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빛이 자신에게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자신의 마음에 비취어지자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오늘 4장의 말씀에 큰 핵심이며 주제라고 볼 수 있는 말씀을 7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선함과 긍휼하심과 은혜와 능력을 보배로 고백하면서 이 보배가 질그릇 안에 담겨있다 라고 고백합니다. 질그릇은 바로 바울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 고백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존재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죠. 질그릇은 귀히 쓰는 그릇도 아니고 쓰다가 망가지면 쉽게 버리는 그릇입니다. 그만큼 존재가치가 높은 물건이 아닌 것이죠. 바울은 자신을 그러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귀한 보배가 담겨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8절에서 10절까지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정말 말씀을 이루면서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의 삶을 바라보고 묵상할 때면 너무나 큰 괴리감을 느낍니다. 오늘 나는 이라는 찬양을 우리가 다 들어보신 적이 있죠.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우리는 이렇게 연약하디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다 바울과 같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울과 같은 사람도 자신을 깨지기 쉬운 질그릇이라 말하였는데 하물며 우리는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그릇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우리 스스로는 소망이 없는 존재임을 깨달음으로서 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간구하며 나아가야 할 존재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고 선한 것이 없지만 이 연약한 질그릇 안에서 영광을 받아 주시고, 우리가 주님의 보배로움을 담아내는 정결한 그릇이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베푸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에 달려나가는 바울의 고백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우리와 동떨어진 말씀이 아니라,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도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가기에 힘쓰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하루 하루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날마나 새로워지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은혜로 함께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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