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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주의 도를 내게 보이소서

by 터틀곽 2022.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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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도를 내게 보이소서

( 25:4~7)

 

오늘의 본문인 시편 25편도 다윗의 시입니다.

 

성경 연구가들은 시가 다윗의 노년기에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젊은 시절 범했던 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점과 그의 많은 원수들의 계교에 대해서 언급하는 점에서도 그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25편은 좀 특별한 문학구조를 띄고 있는데요.  22절로 구성된 이 시는 각 절의 시작이 히브리어의 알파벳 순서를 띄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한글로 치면 기억, 니은, 디귿, 리을, 미음 순으로 기록된 것이죠.

 

시편에는 종종 이러한 형태의 문학구조가 종종 등장합니다. 이러한 문학구조를 통해서 시를 구성한 것은 이유가 있는데요. 당시 사회학적으로 이러한 문학 기법이 유행했었을 수도 있고요. 또 다른 이유는 시를 쉽게 외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래도 어떤 패턴이 있으면 암송 하는데 있어서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끔 시험 보기 전 어떤 항목들을 외울 때 저도 많이 사용했던 방법 중에 하나 입니다. 전체가 생각이 잘 나지 않을 때 맨 앞에 시작하는 첫 번째 글자나, 혹은 자음이라도 기억이 나면 뒷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딱 생각이 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문학 구조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 자체가 아주 매끄럽게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내용 자체가 서로와 서로를 보완하고 있지 않고, 기승전결이 있는 구조는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한 구절 한 구절이 각각 독립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전체적인 주제의 흐름이 있는 시는 아닙니다.

 

하지만 굳이 흐름을 찝어내보고자 하자면,  25편은 기도와 묵상의 반복적인 형태가 나타납니다. 1절부터 7절까지는 기도, 8절부터 10절은 묵상, 11절은 기도, 12절부터 15절은 묵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16절에서 22절까지는 기도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 드린 대로 이 시편은 각 절의 시작이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하고 있기에 그 각 구절을 독립된 하나의 고백으로 보아도 됩니다. 그래서 한 구절 한 구절씩 오래 묵상하고 깊이 있게 곱씹을수록 깊은 은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모두 한 절씩 살펴보고 묵상을 나누기엔 너무나 많은 시간이 소모될 것 같아서요. 오늘 저는 4절부터 7절까지의 기도의 내용을 묵상하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은 4절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다윗은 노년의 나이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또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바라보며 이 시를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전히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라는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기를, 주님의 도를 따라 가르침 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길은 말 그대로 길을 얘기합니다. 길이 아닌 곳이면? 가지 말아야 하죠. 개척자의 정신으로 길이 아닌 곳을 개척하고 가시덤불에 찢기고 구덩이에 빠지면서 길을 개척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따라 걸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또 주의 도는 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경로, 혹은 방향을 의미합니다.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를 보여주는 이정표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죠.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집이 생긴다고 합니다.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터득한 생활의 지혜가 축척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나름 젊은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살아왔는데요. 몇 년전부터 저도 배우려는 자세보다는 내가 정립한 틀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신앙생활도 년 수가 길어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틀을 자신 스스로가 정하기도 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사람의 생각과 방법을 먼저 구상하고 틀을 맞춰 놓은 후에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을 재단하여 맞추려고 하는 무지한 일을 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윗의 간구는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주님의 길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응당 우리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일진데, 사실 우리들의 삶의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의 길을 배우려는 자세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주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계시하시고 말씀과, 기도와, 또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보여주시기도 하시지만 우리는 오히려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주님의 뜻을 떠나 나의 생각에 좋을대로 행하는 불순종의 삶을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평생의 삶의 고백으로 주님의 뜻을 간구하는 삶을 살았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주님의 뜻을 간절히 구할 수 있었던 것은 5절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다윗은 하나님만이 진리이신 것과 또 하나님만이 자신의 구원의 하나님임을 깨달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예수님이 진리이신 것이며,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신앙을 취사선택 하고자 하는 욕망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내가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택하여 따르고자 다짐하지만,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거나, 양심에 거리낌을 받을 때가 오면 슬그머니 발을 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또 우리는 성급함과 초조함 덕에 신앙을 취사선택하면서 적당히 타협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내가 진리의 편에 설 것이라는 확고하지 않은 신념을 신앙인 것 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열매를 맺을 때 필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농부의 가장 큰 수고는 열매를 보기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번 달에 고린도전서를 묵상하였는데요.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음을 우리가 보았는데요. 사랑의 속성 중에서도 가장 먼저 등장하는 요소는 오래 참음 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라는 말씀을 통해 사랑의 가장 큰 덕목이 오래 참음인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그만큼 어려운 것이 인내입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앙의 성장도, 우리가 맺어야 하는 신앙의 열매도 인내를 거치며 영글어 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빠른 결과를 요구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빨리 빨리 응답해주셨으면 좋겠고, 나의 믿음도 빨리 성장하여 하나님의 뜻을 뭐든지 빨리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한국의 정서가 약간 뭔가 빨리 해치우는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것도 한몫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우리는 뭔가 빨리 응답받고, 결정짓는 것을 원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문화에서도 성경을 통독하는 그런 운동이 있죠. 이것도 누가 1년에 통독을 몇 번했는지를 가지고 대회를 열기도 하고 상품도 주고 하는 일들을 많이 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운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도록 장려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단지 횟수를 늘리고 많은 시간 성경을 읽는다 한들 그 뜻을 깨달아가고 깨달아진 뜻이 내 삶에 스며들고 체득되는데 까지는 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게 됩니다.

 

한국 기독교는 모태신앙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못하니까 모태신앙이다라는 농담을 종종 하는데요. 그래도 모태신앙이 가진 긍정적인 장점들도 있습니다. 왠만한 일에 대해서는 흔들림이 없는 것이 장점입니다. 갑자기 타오른 불은 식을때도 급격하게 식어버리지만 은근히 데워진 뚝배기 같은 그릇은 그 따뜻함을 오래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진리와 구원의 하나님의 가르침이 보이지 않는다면, 종일토록 이라도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의 자세를 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빠르게 소비 되어지는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 신앙생활도 빠르게 4영리로 복음을 배우고, 교회에 오자마자 여러 양육프로그램을 참여하면서 신자를 찍어내듯이 만들어내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만한 신앙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종일토록 주님을 기다리는 것,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기 위해서 주님의 뜻과 나의 욕망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내기 위해 오랜 시간 성찰하고 하나님의 음성의 또렷함이 들리기까지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6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이 말씀은 시편 23 6절의 말씀과 비슷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다는 것은 7절의 고백을 드리기 위한 고백인데요.

 

7절에는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다윗은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자신을 기억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어렸을적에 가끔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천국에 가면 나의 모든 인생이 비디오 테잎에 전부 다 녹화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촤라락 펼쳐지면서 내가 범한 죄들이 카운팅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몇 개의 죄를 지었을 것이며, 앞으로 몇 개의 죄를 더 짓게 될 것인가. 그리고 만약 천국에 들어가는데 죄의 개수가 한정되어 있다면, 그 한정된 수는 몇 개일까?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 지금까지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았는데, 그리고 정말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그런 추하고 더러운 죄와 생각들도 있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정말 율법적으로 제 자신을 몰아붙이면서 살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에 죄를 안 짓고 살았을까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행위로 드러나는 죄를 범하면서 살지는 않았지만, 말이나 생각으로 범하는 죄들,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는 죄들 불순종과 게으름과 나의 의를 추구하는 죄들은 지금도 범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나의 모든 행위와 나의 마음의 소원과 생각을 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정죄하신다면, 나는 소망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하심은 나의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아예 기억하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이사야 43 25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이 얼마나 은혜의 말씀인가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허물을 도말, 없애신다는 말씀이시죠.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없애실 뿐만 아니라 아예 기억조차 하지 아니할 것을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은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용서까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까지 지우지는 못합니다. 용서는 했다고 하지만 남아있는 기억이 우리를 괴롭힐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쓴 뿌리로 남아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인자하심은 우리의 죄를 도말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깊이 만났을 때 이 은혜의 깊이 아래 잠기어 있을 때 우리는 참된 용서를 깨닫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를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이 놀라운 은혜가 먼저 우리에게 부음바 되어질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힘과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오라 가족 여러분,

 

하나님께 사랑받은 존재임을 믿으십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십니까? 주님의 길과 주님의 도를 구하면서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걸어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며 종일토록 주님의 음성 듣기를 사모합시다. 또한 우리의 죄를 말갛게 씻기시고 우리의 죄를 기억지도 아니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나도 다른 이들을 그렇게 용서하고 사랑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짧은 4구절로 은혜를 나누었지만,  25편에 기록된 말씀 전체를 깊이 묵상하셔서 은혜의 샘 아래에 있는 깊은 은혜들을 건져내어 그것으로 여러분의 영적인 목마름을 해갈하시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시편의 말씀을 통해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했고, 어떻게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는지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깊이 있는 사랑의 관계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셔서 늘 주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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