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시27:1~14)
사람은 살면서 두려워하는 일들과 마주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각자마다 두려움을 느끼는 포인트가 조금씩 다르죠. 저는 개인적으로 고소공포증이 있습니다. 높은데 올라가면 오금이 저려서 제대로 서 있지를 못해요. 다리에 힘이 쫙 풀려버립니다.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좀 있어서 사실 비행기를 탈 때도 좀 두렵습니다. 높이 올라가기도 하고, 또 비행기가 떨어지진 않을까? 하는 그런 두려움이 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다윗은 두려움에 대한 내용으로 시를 시작합니다 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다윗은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라는 구절을 통해서 자신은 두려움에서 승리하였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윗은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앞과 뒤에 등장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라. 그리고 생명의 능력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고백이 평안함과, 안정감 속에서 고백 되어진 것이 아님을 2절과 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늘 다윗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수요일에도 말씀 드렸었지만 다윗의 인생이 평탄하지가 않았죠. 악인들은 내 살을 먹으려고 다가왔고 대적과 원수가 있었고, 또 군대가 대적하여 진을 치는 그러한 상황들을 늘 다윗의 인생과 함께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고비라는 것이 아무리 자주 넘는다고 해서 면역이 되거나, 아무렇지 않아지는게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게도 공통된 두려움이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애착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마주하게 될 본인도 그렇고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가족이나 지인들에게도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죠.
가끔 유투브를 보다보면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전혀 생뚱맞은 영상을 보여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제도 자기 전에 짧은 동영상을 봤는데요. 추천 동영상에 ‘가장의 죽음’ 이라는 제목의 짧은 동영상을 우연치 않게 봤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의 나이가 제 또래 인것 같더라고요. 아내가 어린 딸을 데리고 와서 병상에서 죽음을 앞둔 아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라고 시키는 장면과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한다고 너무 고마웠다고 말하는 장면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남성이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면서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다큐멘터리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다윗의 고백은 내가 누구를 두려워함도 없으며,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내게 악인이 있을지라도, 대적과 원수가 내 앞에 있을지라도,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다가오며 전쟁이 일어날지라도 내게는 두려움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의 고백이 죽음을 초월한 고백으로 올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삶의 구원이 누구로부터 왔으며, 누구에게로 돌아갈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기에 위와 같은 고백을 올려 드릴 수 있는 것이죠.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죽음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의 고백은 다윗의 처지와는 조금 다르긴 합니다.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휴전 국가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평안함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도 하죠.
하지만 늘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이가 드리는 고백에는 더 진정성이 있고 깊이가 있는 고백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죽음이 가진 의미가 우울하고 부정적일지라도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나아갈 새 생명의 길과 우리를 구원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저도 삶의 애착이 강한 사람이거든요. 아버지가 오랜 시간 병상에 계셔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고요. 그래서 저는 저의 건강을 위해서 종종 기도합니다. 보통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건강의 문제가 있던지, 아니면 노환으로 인해 육체의 기능이 다함으로 인해 마주하게 되는 육체의 종말을 맞이하는 것으로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죽음 앞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무엇을 구하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이 죽음의 위기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내게 건강함을 주시고 나의 대적들을 멸하여 주시고 등등의 고백을 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다윗은 전혀 다른 것을 구합니다.
4절의 말씀이죠.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물론 다윗이 방금전에 말씀 드렸던 대적의 멸망이나, 위기 가운데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그런 고백을 아예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여러 고백 중에 대적들을 멸하여 달라는, 또는 위기와 고난 속에서 건져달라는 고백들도 많이 등장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4절의 고백은 다른 많은 요청의 기도와는 좀 다른 고백임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보통 문법을 배울 때 비교급과 최상급이 있는 것을 배우죠.
그런데 4절에서 고백하는 다윗의 고백은 최상급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최상급을 넘어 어떤 비교와 견줄 수 없는 오직 단 하나의 소망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바라는 것을 구하겠다. 라는 이 고백은 시제가 미 완료 시제로 쓰여졌습니다. 해석하자면 다윗은 한 가지 일을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 구하여왔는데, 앞으로도 이를 계속해서 구할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죠.
예전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간구 할 한가지의 일이 있는데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사는 것 그리고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의 성전에서 이 모든 것을 사모하며 사는것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집에 산다는 고백은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처럼 성소에서 상주할 것을 소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죠. 여호와의 집에 살고자 하는 다윗의 고백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에서 늘 하나님의 임재가 자신과 함께 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늘 주님의 음성을 듣길 소원하고,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과 교제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고백이죠.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히브리어로 노암 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선함, 매력,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동양의 정서에서는 아름다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여성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의미가 크게 다가오지는 않지만요 심미적인 관점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 인자하심과 긍휼하심, 또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바라볼 때 경험되어지는 충만함과 경이로움과 신비함들이 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조화로움을 의미하기도 하고, 완전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을 경험하면서 누렸던 기쁨과 경이로움에 사로잡혀서 나의 평생 동안 그 아름다움을 앙망하고, 사모하고 싶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게 다윗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던 것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필요한 복이나 건강이나 다른 부수적인 것들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 그 자체였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잠시 두려움에 대해서 말씀드렸지만 다윗도 두려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9절의 말씀인데요.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
주님의 얼굴을 숨기신다는 표현은 기도를 거절하심이나 또는 진노하심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더 가까운 표현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던 것은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도움으로 살아왔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정말 누구보다 하나님 사랑하기를 힘쓰고 고백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부름 받은 선지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한 많은 인물 들이 성경에 등장하지만, 이렇게 다윗처럼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했던 인물은 다윗이 유일무이 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처지가 어땠던지, 상황이 어떠하던지를 상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고백했던 것이죠.
하나님을 단지 신적 존재로, 의지할 대상으로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흠모하였던 것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드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서로 사랑이 불타는 남녀 간의 사랑도 저런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이 들 만큼 하나님을 의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의 말씀에 부모님이 나를 버렸다는 것은 실제로 부모를 떠나 살았기에 관계되는 구절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님과의 사랑에 비교하면서 결국엔 자신을 구원하시고 영접하실 이가 하나님임을 고백하면서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끝까지 책임지시고 받아주실 이가 하나님 한분 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면서 살아갑니다. 부부의 연을 맺기도 하고 부모와 자녀의 연을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좋은 목자와 리더를 만나기도 하고 마음을 나누는 동역자와 친구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사랑했던 부모님도 우리 곁을 떠나게 되고, 아내도 남편도 떠나갈 수 있습니다. 자녀들도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가게 되죠. 또 내가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과 이별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 가운데 관계가 깨어지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의 관계는 이렇게 불완전하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아들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은혜들을 베풀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시는 사랑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사랑을 삶을 통해 발견하고 경험하며 끝까지 그 사랑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아왔음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알수록, 그 사랑의 깊이가 더해질수록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죠.
우리는 어떠한가요?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더불어 다른 것들도 함께 사랑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들도 사랑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즐거워 하는 것을 함께 즐거워 하고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은 멀리 하는게 사랑의 관계이죠. 하지만 나의 즐거움과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끊지 못한다면, 그 대상이 얼마나 슬퍼하고 마음 아파 할까요?
그래서 사랑하기에 희생하기도 하고, 사랑하기에 용서하고, 사랑하기에 참고 인내해 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 주님의 길과, 주님의 도를 깨달아 아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 하나님을 추구하기 위해서 주님을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을 시편의 고백들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조금 더 지고지순하며 진정성 있는 사랑의 관계 가운데로 나아가길 소원합니다. 단지 우리의 구할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어떤 수단으로 여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깊은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서,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가고, 참된 순종과 헌신과 의탁의 관계 가운데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내가 마주한 두려움들이 있나요? 나는 그 두려움을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있나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환경 앞에서 나는 주님을 의지하고 있나요?
질문2.
주님의 아름다움과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경이로운 사랑 앞에 존재의 기쁨을 누렸던 때가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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