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 완성되는 직분
(고후 3:1~11)
이번달은 고린도후서를 묵상하게 될 것인데요. 본래 저번주 수요일부터 큐티 본문이 고린도후서로 시작되었습니다. 1장과 2장의 내용을 지나서 오늘은 3장의 말씀으로 시작하는데요. 본서의 1장의 말씀은 인사말과 바울이 고린도로 향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기록되었고요. 2장에서는 죄인을 향한 사랑의 태도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3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은, 두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는데요 먼저 1절부터 6절까지는 바울 본인의 사도직에 대해서, 그리고 7절부터 11절까지는 영의 직분에 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떠나 있을 당시에 고린도교인들에게 배척을 받게되는 위기와 좌절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직한 마음으로 고린도교인을 향해 자신의 심정을 고백한 서신서가 고린도후서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바울의 당시에는 사도들의 추천서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신임을 받는 그런 문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로 신임하는데 있어서 사도들의 추천서가 큰 입김으로 작용이 되었다는 것이죠.
지금으로 말하자면, 교회 공동체가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함에 있어서 그 사람이 가진 여러 스펙을 따져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교단에서 공부를 하였는지, 학사인지, 석사인지, 박사인지, 유학은 했는지, 어떤 교회에서 어떤 사역들을 했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 교회에 적격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청빙 과정을 거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린도전서에서 살펴보았듯이 고린도 교인들은 나는 바울에게, 혹은 아볼로에게, 혹은 게바에게, 혹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하면서 하나 되지 못하고 여러 분파로 나뉘어져 있음을 보았었죠.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 중에는 바울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바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오늘의 본문 3장 1절에 기록된 것처럼 바울은 사도들에게 추천을 받아서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향하여 무적격자라고 공격했던 것이죠.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바울과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과 묘한 신경전이 있음을 발견할수도 있는데요. 아무튼 바울은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열두제자들 이들이 이후에 사도성을 가진 인물들이 되었죠.
바울은 직속으로 이런 열두제자에 속해 있지도 않았었고, 이 사도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은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철저한 유대인으로서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색출하고 잡아서 율법으로 정죄하는 일에 제일 앞장을 서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와 불편함을 가진 이들이 바울을 좋게 바라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오히려 바울을 배척하고 인정하고 있지 않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해서 나 바울이 누구인지, 또 내가 어떻게 여러분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추천하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추천서를 보내거나, 추천장을 받을 필요가 있는 존재인가? 라고 오히려 고린도 교인들에게 되 묻고 있는 것이죠.
2절과 3절의 말씀에서도 너희는 우리의 편지다, 우리 마음에 기록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듯이 나와 여러분은 서로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사도바울과 아볼로의 사역의 결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임을 말하며 이것은 먹으로 쓴 것 곧 사람의 추천서로 인하여 된 것이 아니라, 심령에 새겨진 것임을 기억하라,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확신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바울이 이처럼 구구절절하게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이런 글을 쓰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그 입장이 되보지 않고서는 그 마음을 느끼기가 쉽지는 않지만 상상을 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만약에 제가 어느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을 했어요. 정말 모든 시간과 애정을 쏟아가며 한영혼 한영혼 마음을 다해 목양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워지고 자립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 중에서 어떤 무리들이 곽승환 전도사님은 아직 목사님도 아니라며? 목사도 아닌데 이렇게 교회의 지도자가 되도 되는거야? 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유학도 안갔다 왔다면서 요즘 유학가서 공부 많이 한 사람들도 많고 박사학위 받은 사람도 많은데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가 되야 하지 않겠어? 라고 말하면서 이제 전도사님은 우리 교회에서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죠.
아 상상만해도 너무 서운합니다. 인간적으로 내가 저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양육하고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워나가도록 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쏟아 사랑했는데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는가? 라고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지금 바울의 처지가 딱 이런 처지인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서는 그래? 너희가 나를 그렇게 대한다면, 나도 더 이상 너희와 관계하지 않겠다. 그렇게 추천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너희가 좋게 생각하는 사람을 추천받아서 지도자로 세워라. 나는 나를 따르는 이들만 따로 모아서 새롭게 시작하겠다.
이렇게 말을 해도 고린도교회는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바울의 모습을 보면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도성을 인정해 줄것과 우리의 관계가 먹으로 쓴 추천서의 관계가 아니라 마음속에 새겨진 그런 관계가 아니냐 라고 말하면서 고린도교회 공동체에게 동의를 구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바울이 고린도교회만 세운 것이 아니라 서신서를 보면 정말 많은 교회들을 케어하고 순회하면서 그들을 세워나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게 하는 공동체라면 좀 서운한 감정은 들지라도 끊어내는면서 다른 사역지에 집중하는 것이 사역하는데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를 5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바울이 인간의 도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이러한 서운함과 섭섭함과 불합리함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맡은바 사명을 다해 고린고교회를 품은 이유는 자신의 사도적인 권리와 직분이 스스로 세우고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만족의 이유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이기 때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 본문에서는 만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요. 이 단어의 뜻은 본래 자격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무슨 일에든지 우리 자신 스스로 생각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의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처지와 감정대로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도 적인 직임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수고와 헌신에 대해 도전하고 업신여기는 이들을 향해서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과, 소명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6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말하는데요.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영으로 함이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라 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으셨다. 아까 만족이 자격이라는 단어로 쓰여졌다고 말씀 드렸었죠? 새언약의 일꾼의 자격을 주셨다. 라고 이해할 수 있죠. 그런데 율법의 종이 아니라 성령의 종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성령님은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살리는 영이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출애굽기 34장 29절 30절에 말씀에 모세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당시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과, 율법을 받아서 내려오니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쳐다보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7절의 말씀처럼 이렇게 돌에 써서 새긴 율법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곧 사라질 광채의 영광 때문에라도 그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성령으로 받은 직분인 이 영의 직분, 생명의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럽겠느냐.
이렇듯 없어질 것도 영광스러웠다면, 성령께서 주시는 영원한 영광은 얼마나 더 영광스러울 것인가!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의 본문을 통해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해야 할까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의 가치와 영광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 또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면서 때로는 인간적인 서운함이나 서러움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내가 마음을 다해 품고 사랑했던 사람들로 인해서 오히려 상처를 받기도 하죠. 보통 사역자들이나 목자나 교사들이 이러한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때 인간적인 감정과 마음으로는 많이 서운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사역을 계속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직분을 주신 이가 성령 하나님임을 기억하면서 내게 맡겨주신 소명의 자리를 지키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부르심임을 고백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기에 또 나를 믿으시기에 사역의 자리로 부르시고, 내게 사명을 주시고, 소명을 따라 살게 하신이가 우리 성령 하나님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사역과 자격을 자랑할 이유도 없으며, 또한 인간적인 서운함으로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묵묵히 나를 믿으시고 힘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성령이 주시는 능력으로 사역하고, 그 능력으로 사랑하며 그렇게 공동체를 세워나가기를 힘써야 할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소명의 자리를 지키며, 또 기도의 자리를 지키며 성령님과 함께 충만한 영광을 누리며 기뻐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나를 힘들게 하거나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지체가 있었나요? 나를 힘들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질문2.
내가 감당해야 할 영광스러운 직분은 무엇인가요? 이 직분을 주신 이가 성령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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