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에게 복종
(고후 10:1~11)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이 아이가 부모중에 한 사람을 더 사랑한다던지, 혹은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엄마가 말할 때는 엄마의 말을 잘 안듣고 무시하다가 아빠가 나타나서 인상을 한번 쓰면 갑자기 조용해지는 그런 모습을 종종 보곤 하죠. 제가 클 때 좀 그랬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좀 훈육대장을 하셨고 물론 어머니도 혼내실 때는 무섭게 혼내셨지만 상대적으로는 어머니를 좀 더 편하게 대하고 말을 잘 안듣기도 하고 그러다가 아버지가 이노무 자식이 라고 말하심과 동시에 잔뜩 겁을 먹고 군기가 바짝 들었던 때가 있습니다.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커서 생각해보니 여전히 어머니와는 더 관계가 편하고요. 아버지랑은 좀 대면대면 합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했던 것이 바로 바울인데요.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면 바울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알 수 있는데요. 제가 집에서 보는 성경에는 이 단락에 대해서 인신공격에 대한 바울의 변론 이라고 적혀져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던 상황에 처해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에는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조금더 정확한 번역은요 얼굴을 대면할때는 나를 유순하다고 하지만, 떠나 있을때는 강경하다고 말하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여, 나는 그리스도의 온유하심과 관대함으로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순하다 라는 단어가 순하고 착한 이라는 단어로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이 히랍어타페이노스 라고 불리는 단어의 원뜻은 짓눌려있다. 굴욕감을 느끼다 초라한 신분, 비굴하게보임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를 대면할 때 너희는 나를 초라하게 대하고 비굴하게 바라보고, 나에게 굴욕감을 주지만, 편지를 쓸 때는 담대하게 강하게 편지를 쓴다고 말하곤 하는데 하지만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로, 또 너희를 관용으로 대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과 함께 있을 때에도 바울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고 또한 서면으로 고린도교인들을 권면할 때는 왜 그렇게 우리에 대하여 강경하게 말합니까? 라는 입장을 취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2절을 보면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게. 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바울과 아볼로를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 처신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더욱 강경한 태도로 대하였으며, 나아가서 고린도교회 모든 교인들에게 이 강경한 태도로 나아가지 않도록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3절과 4절에서 육신에 대한 내용을 개진하고 있는데요.
3절에서 말하는 육신으로 행하나 라고 하는 말은 우리는 육신을 입은 존재인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요. 공동번역 성경에는 속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두가지 번역이 다 맞는 번역이지만 4절의 말씀을 해석하기에는 단지 육체를 입은 존재라기 보다는 이 속된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흐름에 맞는 번역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4절에서는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바울을 말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베소서 6장 12절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오늘의 본문 4절과 느낌이 비슷하죠?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이 무엇입니까?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인데. 이들을 상대할 때에 우리가 육신의 속한 것으로 이 세상의 방법으로 이들과 싸운다면 그것이 어떤 유익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주관자들이 이 세상의 방법으로 우리를 억압하고 짓누를 때에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이 세상의 방법으로 그들을 억압하고 짓눌러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죠. 그 말씀이 4절의 말씀처럼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방법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들과 상대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4절 후반부의 말씀처럼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잘못된 이론을 무너뜨리고 계속해서 5절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적하며 높아진 오만한 것들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능력으로 우리는 나아가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과학과 지식과 어떤 도덕과 철학 등 모든 지식을 통틀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는 오만한 것들 그러한 이론들 지식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대적하는 것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 밖에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여러 이론들로, 또 과학을 들이대면서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라고 하기도 합니다.
어떤 철학과 진화의 증거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무지하다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에 속한 이 모든 지혜와 오만을 무너뜨리는 능력으로 어떤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사실 모태신앙으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떠나서 지낸적은 없습니다. 그러한 문화에서 자라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예수님을 믿는 부모님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것이 아닙니다.
저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시고 이 세상에 말하는 어떤 상식과 지혜를 뛰어넘어 예수님을 뜨겁게 만나고 경험한 체험적 신앙이 나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무너뜨리시고 제게 오셨고 그런 주님을 만났기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각자 한 사람을 만나주시고 그 뜨거운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경험되어졌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1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한번 더 자신을 변호하는 이유는 만약 고린도 교회의 교인인 너희가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으로 인침을 받고, 모든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여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고 있다면 나 바울에 대해서 내가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든지, 혹은 나를 초라하고 비굴한 존재로 무시하면서 편지로만 강경하게 말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한 고린도교회의 특징이 7절에 등장합니다.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너희는 사실을 왜곡해서 보고 있다. 사실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다 라고 말하면 그 사람이 그렇게 담대하게 고백한 것처럼 너희는 그러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인지 속으로 다시 생각해보아라 너희 스스로를 평가해 봐야 할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외모로 판단하고 있다. 내가 사도의 권한을 추천서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따랐던 12명의 직속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너희는 외모로 나를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몇 번이고 자부하듯이, 너희도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음을 자부하며 너희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는가! 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결국 바울은 말과 행동이 다른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너희의 신앙과 너희의 태도가 정말 신자로서 그리스도에게 속해있는 믿음인지, 너희가 그렇게 평가받을 수 있는 존재로서 나를 대적하고 있는 것인지를 그 중심을 향해 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마지막 11절의 말씀으로 바울은 내가 떨어져 있을 때에 편지로 써서 여러분을 권면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동하는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기억하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10절의 말씀을 발판으로 바울의 권위를 세우는 말씀이죠.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편지를 통해 심히 찔림을 받아왔습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라고 말하면서 바울을 깎아내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내가 편지로 쓰나 너희와 함께 있으나 아무런 차이가 없는 존재임을 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신앙의 상태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눈에 보이는 바울의 권위도 인정하지 아니하고 그를 깎아내리고 폄하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권위도 인정하지 못했던 이들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참 신앙과 경외함이 그들에게 있을리 만무합니다. 그로인한 무질서와 음란함들이 고린도교회에 만연했던 것이죠.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신앙과 순종과 헌신은 하나님을 향하여 또 교회 공동체의 리더십과 비전을 향하여 겸비된 믿은인가요? 바울의 권면처럼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평가해야만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방법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이 세상의 방법으로 따라 싸우는 삶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고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 곧 마귀들과 악의 영들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말씀과 진리로 모든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오직 한가지 길임을 기억하면서 신실하게 주님만을 따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우리는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음을 점검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영혼의 상태는 진실로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습니까?
질문2.
내가 싸워야 할 상대는 누구입니까? 나는 그들과 어떤 방법으로 싸워야 하며 나의 승리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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