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을 건널 준비
(수 3:5~10)
장마가 시작되고,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건강관리를 잘 하셔서 무더운 여름을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날씨가 더워지고 습해지면 불쾌지수가 올라갑니다. 그쵸? 불쾌지수가 올라가면 이상하게 별것 아닌 일에 속상하고 짜증 나는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내가 지금 짜증이 올라온다, 뭔가 불쾌하거나 속상하다는 느낌을 받으신다면, 혹시 내가 지금 덥거나 습한 곳에 있는가 살펴보시고 에어컨이 있는 곳이나, 시원한 곳으로 가셔서 마음을 잘 정돈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죠. 그래도 이 여름을 잘 극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5월에는 라합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기억이 나시죠? 감사합니다. 라합의 내용이 여호수아 2장에 등장하죠. 오늘은 여호수아 3장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3장에 이르러서 이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향한 본격적인 여정에 돌입합니다. 3장의 내용은 바로 요단강 도하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본문은 다섯 구절만 읽었지만 3장의 전체적인 내용은 요단강을 건너기 위한 준비, 요단을 건너는 방법, 그리고 실제로 요단을 건너는 세 가지 큰 주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 주제 중 우리가 가장 관심이 있고 주목하여 보는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주제입니다. 요단을 건너는 방법과 실제로 요단을 건너는 장면이죠. 이 안에서도 우리는 영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고 그 메시지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만 저는 오늘 첫 번째 주제인 요단을 건너기 위한 준비와 왜 요단강을 건너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요단을 건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이 요단을 건너야만 여리고를 향하여 나갈 수 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사실 가나안 정복의 시작이 되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아주 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힌트를 드리자면 지금 요단을 건너야하는 이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들입니다. 1세대들은 경험했지만 2세대들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홍해를 건넜던 것을 다시 한번 재현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출애굽 1세대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출애굽을 하여서 홍해를 건너는 놀라운 체험을 가진 세대들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고, 뒤로는 바로가 보낸 군대가 자신들을 잡으려고 돌격중이었습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죠.
이때 출애굽 1세대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애굽애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하느냐? 차라리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것보다 낫겠다. 라고 말하면서 모세를 원망했죠.
그러자 1세대의 지도자인 모세는 백성에게 너희는 두려워 하지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자 홍해가 반으로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으로 건너가고 뒤따라오던 애굽의 군대는 바다에 수몰되어 수장되었습니다.
1세대들은 이런 놀라운 사건을 경험한 세대죠. 이후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2세대들은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듣기는 들었으나 실제적인 경험이 없는 세대였습니다. 게다가 1세대를 통과하여 가나안을 약속받은 이는 여호수아와 갈렙 밖에 없었기에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 요단강 앞에 서 있는 2세대들은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을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죠. 홍해 사건이 기록된 출애굽기 14장 3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들 앞에 요단강이라는 강을 마주하게 하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나가는 첫 번째 관문은 출애굽 1세대가 경험하였던, 홍해를 건너는 것과 아주 흡사한 믿음의 도전 앞에 서 있게 된 것이죠.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출애굽 1세대들에게 행하셨던 동일한 기적을 2세대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셨을까요?
여러 이유 중에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되는 두 가지 이유를 나누고자 하는데요.
첫 번째로는 요단을 건너는 것은 죽음을 통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과 2절에는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고린도 전서를 기록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았다고 기록 함으로써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적인 침례를 경험한 민족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침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무엇인가요?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해서 물에 잠김으로 그리스도와의 죽음과 연합되고, 물에서 일어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서 경험한 침례의 의미는 그들은 물 벽 가운데 마른 땅으로 지나면서 경험되어진 것입니다. 갈라진 홍해를 지나 뭍으로 나왔을 때, 그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애굽의 군대는 홍해의 물이 합쳐지면서 그 안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 옆에 갈라진 물 벽을 보고, 또 본래대로 합쳐진 바다에 수장당한 애굽 군대를 보면서 출애굽 1세대들은 자신이 저 죽음의 바다를 하나님의 은혜로 통과했다는 사실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홍해사건을 경험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태어나 체험적인 신앙이 없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요단을 건너게 함으로 인해 인간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케 하신 것입니다. 빠지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강물을 가르고 죽음을 통과하여 새로운 생명의 땅으로 나아갈 것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요단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도하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경험케 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던 것이죠.
두 번째 이유는 새로운 세대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또한 언약의 성취를 살아내야 하는 민족임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오늘의 본문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출애굽 1세대처럼 그들을 쫓아오는 애굽의 군대나 다른 이방 군대는 없었지만, 새로운 세대들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가나안에 살고있는 일곱 족속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가나안 땅의 의미는 단지 그들이 유목민의 삶을 청산하고 그 지역에 정착해서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영토적인 터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광야 세대들에게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땅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언약의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세상 다른 족속들에게 제사장 나라로 세워져 하나님의 뜻을 세상 가운데 선포해야 하는 소명을 이루어야 할 땅 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차지하는 방법은 막강한 군사력이나, 어떤 탁월한 병법이나, 외교적인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이 일을 친히 행하실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위의 10절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깨달아 알아라, 요단강을 마르게 하는 이 기이한 일을 너희가 경험함으로써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죠.
결국 새로운 세대들에게 너희가 언약 백성으로서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은 이와 같다. 제사장 나라로 세워질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살아야 함을 선언하여 주시는 말씀이며,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는 이 기이한 일을 시작으로 하나님 나라의 언약 백성으로의 삶의 방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요단을 건너기 위한 준비에 대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호수아는 새로운 세대들을 향해 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요단을 건너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말씀은 1세대들이 홍해를 마주했을 때와는 좀 다른 상황입니다.
출애굽기 14장 8절의 말씀을 보면 출애굽을 할 때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담대히 나아갔다. 라고 기록되어있는데요. 바로 아래에 10절을 보면 바로가 가까이 올 때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고 모세에게 매장지가 없어어 우리를 여기서 죽게하느냐? 라고 따지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에서는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는 말씀이 나오죠. 1세대는 아무것도 모른 채 갑자기 홍해를 맞이하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넜다면 새로운 세대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을 듣고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성결이라는 것은 옷을 갈아입다는지, 아니면 옷을 빤다던지, 여인을 멀리한다는 등의 외부적인 성결 행위를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장 내일 요단강 도하가 시작될 것인데 그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여호수아가 말한 성결은 마음의 성결, 곧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자세를 가다듬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공동번역에는 성결하라는 말씀을 목욕 재계를 하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는 것은 너희가 구별된 민족임을 인식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은 존재의식의 변화를 의미함과도 같습니다. 요단을 건너기에 앞서서 너희가 어떤 민족인지를 기억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와 너희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 광야 길을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는 것이죠. 새로운 세대들은 마음을 성결하게 하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고 복기하는 것을 통해서 민족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자신을 성결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행했던 우선순위의 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성결은 우선순위와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선순위를 정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선택과 집중을 하면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삶을 간결하게 만들거나 또는 발전하게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 유행했던 앙케이트 조사가 있었는데요. 당신이 만약 무인도에 떨어지게 된다면 무엇을 가지고 갈 것인지 10가지를 고르십시오. 그래서 10가지를 고민 고민하면서 고릅니다. 뭐 칼, 라이터, 그물, 톱 등등 10가지를 고르죠. 그런데 거기서 또 그중에서 다섯 가지만 고르도록 하죠. 마지막으로 3가지만 선택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좋은 예시가 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법은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기 좀 어려운 일이죠. 무인도를 가기 위해서 중요한 물품들을 늘 준비하고 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늘 우리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신경 쓰고 있는 가장 우선적인 것은 무엇인가요?
각자의 상황마다 조금씩은 다를 것입니다. 취업을 앞둔 청년들에게는 취업이 가장 큰 우선순위가 되겠죠. 또 공부하는 학생들 우리 청소년들이 다음주, 다다음주 부터 시험기간인데, 청소년들에게는 공부가 가장 우선순위일 것입니다. 연애를 하는 이들에게는 결혼, 또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는 자녀의 성적이나 건강 등이 될 것이고요. 우선순위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우선순위를 가져야 할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법한 질문 아닌가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우선순위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한 번씩은 들어봤을 법한, 또 그것으로 인해 고민하고 또 노력해보았을 법한 질문입니다.
다들 해보셨죠? 안 해보셨으면 한 번씩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그래도 신앙생활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순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우선순위로 두었다는 이유로 그 이후나 이외의 일들을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로 오해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주일날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평일에는 무엇을 해도 괜찮다. 내가 오늘 큐티를 했고 기도를 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을 해도 괜찮다. 내가 십일조를 드리고 주일 헌금을 드렸기 때문에 나머지 돈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라고 이해 해서는 안됩니다.
예전에 윌리엄 폴 영 이라는 작가가 쓴 오두막이라는 책이 출시된 적이 있습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져있죠. 여러분 중에서 이 책을 읽으셨거나, 또 영화로 접하신 분들도 계실거라 생각하는데요.
이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는데요. 맥켄지 라는 주인공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맥, 나는 여러 가지를 나열한 목록 중에서 첫 번째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모든 것의 중심이 되고 싶은 거예요. 내가 당신 안에서 살 때 우리는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함께 겪으면서 살 수 있어요. 나는 피라미드의 꼭대기보다 모빌의 한가운데가 되고 싶어요.”
모빌이 어떤 것인지 아시죠? 가운데 중심 축으로 여러 조각들이 달려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모빌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피라미드의 꼭대기 같은 분이시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일을 챙겨드린 다음 이후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빌의 중심 같은 분이시면 매사에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아 모든 것이 조화롭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이죠.
신앙생활은 우선순위의 문제를 넘어서 가치관의 문제인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저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선택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요단강을 건너기 전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는 말씀도 이제 강을 건너야 하니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자! 라는 수준의 결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은 구별된 민족임을 인식하고 존재의 의미를 정확하게 정립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깨닫고 우리 민족의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를 명확하게 바라보는 것이 성결이라는 것이죠.
이제 새로운 세대들은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마음을 성결하게 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기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단을 건너가는 방법이 등장합니다.
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먼저는 언약궤가 앞으로 행진합니다. 언약궤와 백성과의 거리가 이천규빗쯤 되게 하라고 4절에 기록되어있는데요. 이는 1키로가 조금 못된 900미터 정도의 거리라고 합니다. 언약궤와 이스라엘 민족과 거리를 두게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이었습니다. 그 존재 만으로 거룩함을 드러내는 언약궤를 먼저 보내어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앞서 가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다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임을 선포하는 행진이며, 사람의 방법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앞서 행진하는 것 뿐 아니라 요단강에 들어가는 첫 번째 발걸음도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먼저 들어갑니다. 8절과 16절, 17절의 말씀인데요.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17절 번역의 순서가 조금 이상한데요.
온 이스라엘 백성이 마른 땅을 밟고 건너서, 온 백성이 모두 요단 강을 건널 때까지, 주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강 가운데의 마른 땅 위에 튼튼하게 서 있었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저는 사실 홍해가 갈라진 이적 보다 이 요단강이 갈라진 이적이 뭔가 더 극적이고 감동적이고 감격적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물론 바다가 갈라진 것이 어떤 웅장함에 있어서 더 크고 대단한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한강이 갈라진 것과 제주도와 우도 사이가 갈라진 것과 스케일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홍해가 갈라질 때는 모세의 명령으로 인해 손을 앞에 뻗으니 갈라진 것이지만, 요단강의 물이 마른 것은 언약궤를 맨 제사장의 발이 물에 닿자 언덕에 넘실거리던 물길이 그쳐서 물이 끊어져 둑 위에 쌓여있고 그 마른 땅의 중심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라버린 요단강을 건너가며 마른 땅 한가운데에 서 있는 언약궤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며 감격하는 마음으로 요단강을 건넜을 것입니다. 이게 꼭 맞는 비유인지는 모르겠는데요. 제가 전쟁영화를 좋아하거든요? 이런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전쟁 중에 병사들이 행군을 하고 있는데 보병이 길을 지나갈 때 전차부대가 먼저 나가서 적군을 향해서 모든 포열을 장전하고 만약에 적군 중 한 명이라도 나온다면 모든 전차가 그곳을 향해서 집중타격을 할 준비태세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병들은 뿌듯한 마음으로 웅장한 전차부대를 바라보면서 사기가 충천하여 씩씩하게 행군을 다 하는 것이죠.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도 요단강을 건너면서 이 언약궤를 바라보며 비슷한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모든 백성이 도하를 마친 후 마지막에 제사장들이 언약궤와 함께 올라와 육지를 밟음과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서 전과 같이 언덕에 넘치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보았습니다.
요단강 도하는 우리에게 많은 신앙의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선과 삶의 중심을 하나님 중심으로 맞춰야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은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계신 분이 아니라, 모든 것의 중심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것, 곧 진정한 거룩은 어떤 특정적인 장소만 특정적인 시간만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 교회에 갔다. 헌금을 드렸다. 기도를 했다. 라는 행위로 인해서 거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성결과 거룩은 삶의 모든 중심을 하나님으로 고정하는 것입니다. 중심이신 하나님을 떠나 어떤 부수적인 것에 더 몰두한다면 다른 장식에 무게가 쏠린 모빌처럼 그 모빌은 뒤집어지거나 삐뚤어져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조화를 이루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세워져야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언덕에 넘실거리는 강물 앞에서 제사장들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들을 믿음으로 감당했습니다. 예전에 모세가 했던 방식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하셨듯이 여호수아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것을 알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여호수아와 새로운 세대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새로운 세대들은 말라버린 요단강을 건너면서 그 가운데 굳건히 서 있는 제사장들과 언약궤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두 눈으로 보고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실제로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언약을 따라 살았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언약에서 떠나 방종하는 삶을 살았을 때는 심판과 징계를 받았던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해서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초보적인 신앙이고 미성숙한 신앙입니다. 어떤 부모가 자녀를 훈육하려는 목적으로 자녀를 주시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성숙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를 기뻐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신뢰하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요단강 도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의지와 능력으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요단강 물을 마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놀라운 은혜를 경험한 것 뿐이죠.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그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 조상과 맺으셨던 언약을 이루실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이 일을 행하는 분이 바로 자신이심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영과 능력 안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요단강 한가운데 서 있는 언약궤를 바라보듯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담대하게 그 요단을 건너듯이 우리도 담대하게 그 마른 땅을 밟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 공동체에게도 하나님의 일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목적과 비전을 제시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 건축이라는 큰일 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요단강 도하와 같은 일 일수도 있고 여리고를 마주하는 것 같은 일처럼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건축이 잘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간절히 필요하고, 앞으로 감당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지금 이 중요한 시기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믿음의 도전들이 발견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 믿음의 여정에 함께 동참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각 사람이 실제로 경험하고 요단강의 중심에 그 마른 땅 앞에 서 있는 언약궤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경험했던 세대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함께 동참하여 놀라운 은혜의 현장에서 마음껏 우리의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가시는 은혜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새로운 세대들에게 요단강의 이적을 친히 보여주심으로 인해 그 세대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시고 여전히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케 하셨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든 오라 가족들도 우리의 정체성을 깨닫고 우리의 존재의식과 가치관을 새롭게 함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교회 건축 가운데도 함께하여 주셔서 우리가 이 믿음의 현장에 함께 하게 도와주시고 간절한 믿음의 간구와 헌신과 수고를 드림으로 주님과 함께 이루어나가는 축복의 여정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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