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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자기를 낮추는 기도

by 터틀곽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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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낮추는 기도.
(누가복음 18장 9~17)

오늘의 본문 9절에 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예수님의 비유에는 두 사람이 등장하죠.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유대인들 중에 경건하다고 높임을 받고 칭송을 받는 대표적인 집단이며, 세리는 로마의 속국으로서 자국민들에게 세금을 걷는 매국노, 죄인으로 미움을 받는 대표적인 집단입니다.

9절에 등장한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이 두 부류가 얼마나 극명하게 대치되는 대표적인 인물인지를 대번에 깨달았을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이 두 사람이 함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11절부터 12절에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의 기도의 특징을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요.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지 아니하고 서서 따로 기도하였습니다. 본인이 기도하는 기도의 자리를 따로 구분해놓았다는 말이죠. 미루어 보아 아마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한 가운데 서서 기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은 무엇인가요?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다. 그리고 서 제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자신이 행하는 행위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또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하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종교성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있는 기도이죠.

이 기도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나의 행위와 종교성은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세리의 기도를 보겠습니다.

세리의 기도의 자세는 어떠했나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성전에서도 가장 변두리인 먼 곳에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로움을 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했던 것에 반해 세리는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14절의 말씀을 통해 바리새인이 아니고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을까요? 누가 봐도 바리새인은 율법적으로, 또 종교적으로, 행위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오히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세리는 예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 세리는 의로움을 받았을까요?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바르게 깨달아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서 한낱 먼지와 같고, 오히려 나를 돌아볼수록 내세울 의는 없고 죄로만 가득한 존재임을 바르게 직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세리를 의롭다고 칭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장면을 우리의 시대로 가져오면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서 너무나 교회 생활을 잘 하고,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모아놓은 재산도 많아서 모든 헌금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겨우 주일 예배만 참석하면서 헌금 생활도 잘 안하고 직업도 변변치 않고 사회에서도 멸시를 받는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을 평가할 때 어떤 평가를 내리겠습니까? 물론 그 사람들이 고백하는 기도의 내용이 오늘 본문과 같다면 그 시각이 달라졌겠지만 우리가 만약 기도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아마 전자를 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후자에 있는 사람은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인가보다. 정도로 여기지는 않을까요?

오늘 이 비유의 가르침은 14절 하반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 말씀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누구 앞에 있는지를 점검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낮추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행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미덕중의 하나이지만 오늘의 말씀에서 자기를 낮추라는 말씀은 사람 앞에서의 겸손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이 말씀은 나의 존재를 바르게 바라보고 인식하는 것과도 깊은 관계를 가집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하지 아니하고 종교적 행위나 율법적인 행위를 통해 만족감을 얻고 스스로 위로 한다면, 그것은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는 종교인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시편 51편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상한 심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한 심령은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세를 상기시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날마다 죄에 억눌려 자유함 없이 율법에 매여 전전긍긍하는 모습으로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복음을 통해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상한 심령은 하나님 앞에 끝없이 겸손한 마음의 자세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리고 구원받은 지금 또한 나는 하나님 앞에 거짓 없는 믿음과 진지한 신앙을 올려드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하게 낮아진 마음으로 예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 안으로 더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17절에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시죠. 어린 아이의 특징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엄마 아빠를 꼭 붙들고 그 안에서만 안식을 누립니다. 반면에 엄마와 아빠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함을 느끼고 안절부절 못하고 금새 울어버리는 것이 아이들이죠. 왜 그럴까요? 그 아이들에게는 엄마 아빠가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처럼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가요? 아니면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가요? 나의 낮은 마음은 예수님만을 간절히 원하고 있나요?

여기 모인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붙드는 겸손한 믿음을 가진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함께 찬양하기를 원하는데요.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분 이라는 찬양을 고백하길 원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원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임을 고백하면서 한번 더 기도의 자리로 나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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