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받는 구원
(눅 18:31~43)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중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9장을 통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굳게 결심하셨다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의 기자는 예루살렘 입성 이전까지 긴 내용을 삽입함으로써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시는 내용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오늘의 본문은 통해서는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세 번째로 예고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본문 3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음을 한 번 더 증거 하고 있고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어디서 뚝 떨어지신 것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을 응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언된 말씀을 따라서 오신 분임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증거 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선지자들의 글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32절과 3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 곳은 유대인들의 회당이 아니라 로마의 법정이었고 이방인이었던 빌라도에 의해, 또 로마의 병정들에 의해 십자가를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하지만 34절에 기록된 대로 제자들은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깨닫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이 말씀이 예수님께 이루어질 것이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과 기적을 행하시는 분인지를 분명히 실제로 보았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놀라운 기적들이 나타날 때 많은 사람들은 환호하고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가득했었죠. 이렇게 그 당시에 새로운 주류로 떠오르고 계신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실 것 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이방인의 손에 넘겨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땅에서 유대인의 육신을 입고 태어나신 분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굳게 붙들었던 믿음은, 유대인의 메시아사상 안에서의 믿음이었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이겨내고, 유대 땅을 다시 한번 다윗의 영광 때로 회복시킬 놀라운 정치적 지도자가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여러 기적과 행적들은 유대인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고리타분하고 소망이 없었던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꾸짖으시면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듣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하나 되게 만드는 놀라운 원동력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의 새로운 왕, 새로운 메시아로 예수님을 추종하고 따르는 무리가 많았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신다는 이 말씀은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이해하기 싫은 말씀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는 그 말씀이 감취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 말씀이 감추인 것은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깨달을 만한 준비가 되지 못함을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과 부활할 것을 계속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사역들과 기적과 가르침,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십자가를 향한 여정과 가르침이셨고, 예수님의 참된 목적은 자신을 십자가에 드림으로 많은 영혼을 구원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새사람으로 살아갈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보이신 길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후 35절부터 43절까지 여리고로 가시면서 한 맹인을 치유하십니다.
제가 장애인 관련한 일을 하면서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도 듣는데요. 우리가 읽는 개역 성경은 맹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요즘은 맹인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시각장애인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본들은 소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요, 새 번역은 눈먼 사람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요. 소경은 한자고요 새 번역 성경이 그나마 번역을 잘 한 것 같습니다.
요즘은 인권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아져서 한 번 짚었습니다.
다시 넘어가서요. 예수님이 여리고 가까이 지나실 때 눈먼 사람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다가 예수님이 지나시는 소문을 듣습니다. 당시 소경은 직업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구걸하면서 목숨을 연명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눈먼 사람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자 예수님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37절 38절에 보면 외쳤다,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고 기록된 것을 보아 정말 간절하게 예수님을 찾았던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서가는 사람이 그 눈먼 사람을 꾸짖어서 조용히 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눈먼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질러서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자리에 멈추셔서 그를 데려오라 하시고 41절의 말씀으로 네게 무엇해주길 원하는냐 라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이 보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하죠.
42절에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8장에 기록된 혈루증 앓는 여인을 치유하신 장면과 비슷한 흐름임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오늘의 본문의 눈먼 사람은 눈이 보이지 않아 크게 소리를 질러 예수님께 나아갔고, 혈루증을 앓는 여인은 수많은 인파를 뚫고 손을 뻗어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열망과 믿음을 품고 있음에 있어서 방식은 달랐지만 같은 열망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이 무엇인가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 믿음을 관념적으로 이해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고상하고 고지식한 것으로 치부하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눈먼 사람과 혈루증에 걸린 여인에게 믿음은 실제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 마음이 실제적이었고 그 열망과 확고한 믿음이 예수님을 멈춰 세웠던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가요?
아니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믿음이라는 단어만 알고 있는 사람인가요? 예수님께서 이 눈먼 자를 고치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주신 것은 예수님을 향한 절대적이고 실제적인 그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이 말씀을 보면서 18장 1절부터 오늘 마지막 43절까지의 긴 내용 중에 정말 많은 내용이 등장하지만, 한가지 중심 구절을 단 한 구절을 고르자면 18장 8절 하반 절의 말씀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에게 간청하는 과부의 이야기,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는 어린아이, 영생을 간구했던 부자 청년, 눈먼 사람의 치유. 이 모든 말씀이 18장에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말씀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겠는가? 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물음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추상적인 뜬구름을 잡는 믿음이 아니라. 실제로 내 영혼과 삶을 변화시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주님께 드릴 믿음의 실체를 가지고 주님을 기다리고, 이 땅에서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질문 1.
나의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나요? 나는 실제적인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들고 있나요?
질문 2.
나의 믿음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흩어져 있다면 나의 믿음을 흔드는 요소는 무엇인가요? 내가 극복해야 할 요소들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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