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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주가 쓰시겠다 하라.

by 터틀곽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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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하라.
(눅 19:28~40)

긴 여정 끝에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이 입성을 준비하십니다. 오늘 본문 28절 2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면서 베다니에 머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이 베다니는 예루살렘과 한 3키로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 머무르시면서 제자 둘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새끼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누가 왜 나귀를 끌고 가는지 물어보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라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32절과 35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귀를 찾고 그 주인이 왜 나귀 새끼를 가져가는가 라고 묻자 예수님이 말씀하신데로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고 말하자 주인들이 나귀를 내어주어 나귀를 끌고 오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장면이죠.

오늘의 본문은 여러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요. 대표적인 3가지 내용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결정하신 것은 사역의 종착지를 향하여 가시는 길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지금도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당시에도 예루살렘은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있던, 그리고 유대인들의 상징인 성전이 있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심은 두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이 왕이심을 드러내시는 의미입니다. 이전의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무리가 자신을 왕으로 칭송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던 분이시죠. 많은 기적과 표적을 본 사람들은 억지로 예수님을 붙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였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계속 피해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자신이 왕으로서 메시아로서의 직무를 감당해야 함을 드러내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상징적인 도시로서 그곳에서 많은 사람 앞에서 메시아로서의 왕으로서의 직무를 감당하시기에 합당한 장소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두 번째로는 유대인들의 가진 사상, 종교, 문화 등 모든 것이 최고로 발달 된 그곳에서 자신이 새로운 성전으로 세워질 것을 선포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 하신 말씀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마지막 종착지로 삼으셨던 것은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상징적인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예수님 자신이 살아있는 성전이시며, 살아있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명하셔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그 어린 나귀를 찾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딱 보면 그 나귀가 사람을 안 태웠던 나귀인지를 정확하게 찾아낼 신비한 능력이 있었던지, 아니면 나귀의 주인들에게 물어 물어 사람을 태워보지 않았던 어린 나귀를 찾았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결론적으로는 그 나귀를 찾았다는 것이죠.

왜 예수님께서는 어린 나귀 새끼를 원하셨던 것일까요? 덩치도 크고 길도 잘 들여진 튼튼한 나귀를 타는 것이 더 안정적이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나귀가 아니라 말을 선택했다면 더 눈에 띄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의 첫 번째는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스가랴서 9장 9절의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예언자가 선포한 예수그리스도의 예언이 나귀의 작은 것 나귀 새끼를 탐이라는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예언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어야 함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셨던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과 다른 왕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튼튼하고 멋진 말이 아니라 나귀 중에서도 나귀 새끼를 타는 것은 정말 초라하기 그지 없는 모습입니다. 너무나 볼품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방식으로 높임 받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권위를 들먹여왔던 지도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환호하고 기쁨으로 예수님이 곧 자신들의 왕이 될 것을 기대하며 바라보고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또 다른 무리의 회중들의 요구와 입맛에 따라 바뀌는 그런 분이 아니셨기에 그저 당신이 해야 할 그 사명을 묵묵히 완수하시는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겸손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준비된 사람, 준비된 것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오라 할 때 순종하는 제자들이 있었고요. 또 제자들이 나귀를 가져가려고 할 때 소유권을 요구하지 않는 주인이 있었고, 또 순순히 끌려온 어린 나귀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어린 나귀는 그 날을 위해 준비된 나귀였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어떤 사람도 한 번도 길들이지 않은 온전함을 드러내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린 나귀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만약 나귀가 이미 성장하여 길들여지지 않았다면, 자기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끄는 것을 거부했을수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나귀는 이동수단 보다는 운송수단으로 더 많이 쓰이던 생물이기에 고집을 피우고 말썽을 부렸었다면 좀 문제가 됐었겠죠.

하지만 어린 나귀는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통로로 쓰임 받기에 합당한 존재로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어린 나귀와 같아야지만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고집과 아집, 그리고 내가 살아가면서 터득한 삶의 방식을 더 신뢰하는 존재가 된다면 주님이 쓰시기에 좀 불편하고 어려운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두 번째는 나귀의 주인들입니다. 이 나귀 한 마리는 당시에 생각보다 엄청 고가로 여겨지는 생물이었습니다. 나귀는 참 많은 일을 하기 때문이죠. 밭도 갈고, 물건도 운송하고 사람도 태우는 많은 일을 하는 생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건장한 남자 둘이 다가와서 이 나귀 좀 데려가겠소 라고 말했을 때 보통의 주인이라면 아 비싸게 주고 팔아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듣고선, 그대로 나귀를 내어줍니다.

이 나귀의 주인 또한 누군가에게 이 예언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확실한 시기가 등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주 오래전에 이 예언을 들었다면 이 예언이 응하기 까지 조마조마 하며 태어나는 나귀들을 잘 돌보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당일이나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이 말씀을 들었다면, 이 주인은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았을까요? 그때도 왜 자신에게 이 예언이 임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고 그 나귀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내어주었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소명을 받은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언제나 내가 너를 통해 일하고자 한다. 라고 말씀하시고 우리를 그 사역에 초청하기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사역에 합당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어린나귀와 같이, 그 나귀를 내어주는 준비된 주인들과 같이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 언제든지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질문1.
나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나요?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말씀하실 때 온전히 나의 소유, 또 나 자신을 드릴 준비가 되어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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