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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굳게 붙들어야 할 소망

by 터틀곽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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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붙들어야 할 소망
히브리서 10장 19~25

제가 아는 동생중에 반려동물로 강아지를 키우는 동생이 있습니다. 이름은 땅콩인데요. 견종은 믹스견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화 훈련이 잘 안되어서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고 들었었습니다. 한마디로 겁이 좀 많은 그런 강아지죠.

언젠가 그 동생네 집에 방문을 하였는데요. 강아지가 있잖아요. 들어가니까 일단 짖어요. 몇 번 짖다가 도망갑니다. 그러더니 자기 구역에 앉아서 낯선 사람인 저를 경계하더라고요.

그러고 동생이랑 먼저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가 조금 이후에 동생의 아내가 집에 왔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강아지의 눈빛이 달라지더니 저를 더욱 경계하고 심지어는 으르렁대고 짖기 시작했습니다.

추측해보았을 때 그 집의 서열이 동생의 아내가 1순위 그리고 제 동생이 2순위였던 것 같습니다. 그 강아지가 생각했을 때 자신이 생각하는 1순위의 사람이 오자 갑자기 없었던 용기가 샘솟아 오르면서 낯선 외부인을 향해서 자기 구역에 들어온 것에 대해 불쾌함을 표현하는 것이죠.

그 동생의 아내가 오기 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저를 좀 무서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용하던 녀석이 동생의 아내의 등장으로 인해 갑자기 용기가 샘솟아서 저를 대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이 녀석이 계견승천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죠. 바로 자신의 보호자 1순위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용기를 얻어서 짖어댔던 것이죠.

그 모습을 보면서 또 생각난 속담이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였습니다. 본래 속담은 똥개도 자기 집 앞에서는 크게 짖는다 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이 용기라고 하는 것이 생겨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쯤 용기를 발휘하시게 되나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이 공격받는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용기를 발휘하기도 하고요. 어떤 불의한 상황을 보았을 때도 의로운 어떤 것들이 발현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확실한 증거나 확신이 있을 때에도 우리는 용기있게 자기 주장을 펴거나 행동하기도 하죠.

오늘의 본문에도 이 용기와 관련된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데요.

바로 19절에 등장하고 있는 담력이라는 단어입니다. 원어로는 용기, 확신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어있고, 영어성경에는 컨피던스 라고 하는 자신감 신뢰 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담력이라고 하는 이 용기와 확신이라고 하는 단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의 주로 고백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히브리서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향해서 쓰여진 서신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야웨 하나님을 믿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가 보내신 메시아가 어떻게 인간의 몸을 입은 존재 일 수 있냐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많은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 만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선포하신 것을 알지만, 그렇지만 그들이 인정할 수 없는 것은 예수께서 마리아라는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것을 뻔히 알고 있는데, 어찌 그가 천지를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의 아들일 수가 있는것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지 아니하시고 등에 날개가 달리시고 입에서 불을 뿜으시며 눈에서는 광선이 나가시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 하시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면 아마 너나 할 것 없이 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인정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너무나도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성정이 같으셨기에 때로는 피곤하셨고, 때로는 주리셨고, 고통스러워하시고 아파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육신을 입어야만이 자신을 십자가 위에 재물로 드려 죽임을 당하사 속죄함을 감당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누구보다 언약의 백성들이었던 유대인들을 사랑으로 품으시고 부르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의 성취를 위함이셨습니다.

성경은 이방인들보다는 유대인들에게 더욱 친숙하고 본래 그들을 위해 쓰여진 책이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안에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품으시고 부르셨지만 성경은 유대인들의 역사를 통해서 기록되어졌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먼저 진리의 말씀을 받았지만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서 1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고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넓게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지만 이는 본래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2절 13절의 말씀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혈통적인 유대인을 넘어 영접하는 모든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줄 것이며 이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혈통이나 육정을 넘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에게 임할 권세임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방인에 머물러 있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세가 임하게 되었는데요. 이 말씀이 이방인인 우리에게는 참 은혜로운 말씀이다. 기쁜 소식이다. 라고 여겨질 수 있는데요. 오늘의 본문이 담긴 히브리서를 대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이 소식이 기쁜 소식으로 들리기 보다는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본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던 유대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은 인정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만나고, 회심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참 메시아로 섬기기로 결단하게 되었는데요. 이는 이방인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아마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만큼 그렇게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던 것이죠.

오늘의 본문은 세 가지 주제로 나눌 수 있는데요. 첫 번째는 새로운 산길이 되신 예수님, 두 번째로 예수님으로 인해 변화된 새로운 삶. 세 번째로 공동체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19절에서는 우리가 얻을 담력은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성소라는 곳은 제사를 지내는 곳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장소입니다. 무슬림들이 메카를 신성하게 여기는 것만큼 유대인들에게는 성소가 그러한 역할을 하던 장소였습니다.

특히 오늘의 본문에서 말하는 성소는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광야시대의 성막으로 표현하자면 성막이 있고, 성막의 뜰을 지나서 성소가 위치해있죠, 성막 안으로 들어가면 진설병과 일곱금촛대가 있는 곳을 지나서 가장 은밀하고 깊숙한 곳에 지성소가 있습니다.

이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온 이스라엘의 백성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1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지성소였는데요. 이 지성소는 아주 두꺼운 휘장으로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성소에는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만이, 그리고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는데요.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중에서도 레위지파, 그중에서도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성소에 너희도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소에 대한 율례와 율법은 하나님께서 아주 오래전 자신들의 조상의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던 율례와 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법도를 깨뜨리고 너희가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는 말씀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나아가서 본문 20절에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산 길이요 휘장은 그의 육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는 것도 감히 나아갈 수 없는 길일진데, 그 길을 너머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휘장은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한번, 그것도 본인이 철저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성결함을 허락받지 아니하면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는 그 곳이 활짝 열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잘못 들어가면 죽음을 당하는 두렵고 떨렸던 그 길이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 되어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어떻게 그 길이 새로운 생명의 길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20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누구의 육체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육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하셨을 때 일어난 여러 사건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0절에서 5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마가복음 15장 38절에는요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라애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누가복음 23장 45절입니다.
성소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더라

공관복음서 세 곳 모두 다 똑같이 일치하게 증거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이후 바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히브리서 본문을 증거 하는 말씀이 공관복음 모든 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를 찢으셨습니다. 굵은 못이 손과 발에 박히셨고 깊은 창에 찔리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물과 피를 쏟아내시면서 자신의 몸을 잔인하리만큼 찢어내셨습니다.

그 찢김으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았던 휘장이 함께 찢기었고 그 찢겨진 휘장 사이로 새로운 산 길이 열려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놀라운 은혜와 은총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이들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바로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믿음으로 고백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두 번째로 변화된 새로운 삶입니다.

새롭고 산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휘장이 열리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우리들은 21절 22절 말씀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희생 재물로 십자가에 드리심과 동시에 또한 자신이 친히 제사장이 되어주셨습니다. 21절에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제사장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바로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통로의 역할을 했던 것이 제사장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친히 제사장이 되어 주셔서 우리와 하나님을 잇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9장 21절인데요.

제단 위의 피와 관유를 가져다가 아론과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아들들에 옷을 뿌리라 그와 그의 옷과 그의 아들들과 그의 아들들의 옷이 거룩하리라

제단을 거룩하게 하는 방법은 레위기 8장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잡고 그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제단의 네 귀퉁이 뿔에 발라 제단을 깨끗하게 하고 그 피는 제단 밑에 쏟아 제단을 속하여 거룩하게 하고

제사장과 제단을 거룩하게 만드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도 죄가 있는 인간이며 또한 제사를 지내는 목적 자체가 속죄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부정함과 범죄가 묻어 있습니다. 제단 또한 부정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부정함이 묻어있습니다.

이 모든 부정함들을 정결하게 하는 방법이 바로 피를 바르는 방법입니다. 제사장에게도 피를 뿌리고 제단에도 피를 발라서 정결하게 하였습니다.

이 구약시대의 제사 방법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의식으로 여겨질수도 있습니다.

정결하게 하려면 알콜솜으로 깨끗이 닦고 방역하듯이 소독약을 뿌리는 것이 더 위생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시대의 정결법에는 담겨져있는 의미가 있습니다.

피를 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사람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피를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피를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당한다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피를 받아내기 위해서는 제물을 잡아서 죽여야지만 피를 받을 수 있습니다.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합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인간의 범죄를 감당하는 길은 피를 내어 죽음으로 그 죄를 감당해야 하는데 자신이 죽을 수 없으니 대신 양을 잡고 소를 잡아서 피를 내어 그 제물을 죽이고, 피를 내어 죽임을 당할 때 그 동물에 안수하여 자신의 죄를 전가시킨 이 후에 그 제물을 잡아 죽이는 것입니다.


피흘림은 죽음을 이야기 함과 동시에 생명을 이야기 합니다. 나의 삶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대신할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친히 제물이 되어주사 우리를 위해 모든 피를 쏟아내어 우리의 죗값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이 후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은 22절의 말씀처럼 마음에 피 뿌림을 받는 것입니다. 22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서 나쁜 마음씨가 없어지고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씻겨 깨끗해졌으니 이제는 확고한 믿음과 진실한 마음가짐으로 하느님께로 가까이 나아갑시다.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의 마음에 뿌려져서 제사장을 피로 정결하게 하듯이 우리를 부정하고 악한 양심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의 몸은 침례를 통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여 참된 연합을 드리는 고백을 드리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님처럼 거룩한 제사장의 신분으로 새롭게 변화된 인생임을 반드시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우리는 함께 믿음의 소망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23절부터 24절까지 말씀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모든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이루신 예수님은 미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평소에 이 미쁘다 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죠. 보통 믿을만 하다 믿을 수 있다. 믿는다. 정도로 사용하는데 이 미쁘다라는 말은 영어로는 faithful 헬라어로는 피스토스라고 하는데 이는 확신, 온전한 신뢰 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이 믿음은 절대적인 믿음 확고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소망을 흔들리지 않고 굳게 잡아야 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우리 안에서 이 믿음에서 흔들리는 이들을 격려하고 사랑과 선행을 통해 붙들라는 말씀입니다.

말씀드렸지만 유대교 안에서 이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집에서 쫓겨나 호적이 파일수도 있고 왕따를 당할 수도 있고 직업을 잃어버릴수도 있고, 심지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위협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믿음에 굳게 서 있는 이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격려하고 사랑과 선행을 베풀어 이 믿음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강력하게 붙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고 있는 지체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서 이 소망의 말씀을 전하고 사랑과 선행을 베풀며 이 소망 안에 함께 세워져 가도록 격려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25절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유대 기독교인들과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참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갑자기 모이기가 너무나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은 죽음의 위협 때문에 모임을 폐하고,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모임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힘을 합하여 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공간에 모이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신앙이 이로 인하여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더욱 더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습관은 결국 믿음에서 떠나 이전의 삶으로 죄악 된 삶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길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혼자서 믿음을 지켜나간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연합하여 하나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주님 오심을 기다리며 튼튼한 삼겹줄로 서로를 굳게 붙들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나의 지체를 믿음으로 붙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이 믿음의 소망에 더욱 확고히 서 있어야 함을 반드시 기억하시면서 나의 믿음을 굳게 세우고 나의 연약한 지체들을 이 소망으로 함께 붙들어주는 사랑이 충만한 한 사람 한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 안에 새롭고 산길이 되신 예수그리스도,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굳게 붙들고 이 소망이 나의 삶을 붙들고 나의 지체와 교회를 붙드는 생명이 되고 연합하여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우리를 위해 새롭고 산 길이 되어주시고, 또 참된 제사장이 되어주셔서 우리의 심령을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하여주시고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기쁘게 누릴 수 있는 진리요 길과 생명이 되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 소망의 진리 안에 굳건히 세워지게 도와주시고, 또 이 소망으로 연약한 지체의 믿음을 사랑으로 붙들게 하셔서 우리 교회 공동체가 믿음 안에 참 연합을 이루어 모이기에 힘쓰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각 목장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붙들어 주셔서 사랑의 연합을 이루게 하시고 또한 각 기관마다 연합되게 하시고, 교회가 건강하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누릴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우크라이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어떠한 경우라도 전쟁이 정당화되지 아니하도록 도우시길 원합니다. 그 땅을 긍휼히 여겨 주셔서 당신의 자녀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아니하도록 속히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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