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이 가져야 할 마음
(시편 36편1~12)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시편 36편인데요. 시편은 지혜서의 한 부류에 속하는 책입니다. 구약성경을 나눌 때 토라, 역사서, 지혜서, 예언서 등으로 구분하는데요. 그중에 지혜서는 지혜의 다섯 두루마리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 이렇게 다섯권을 지혜서로 분류합니다.
지혜서라는 것은 그 말씀이 읽는 독자로 하여금 지혜를 가지게 하는 책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요. 특별히 지혜서에서 이 시편의 장르로 사용된 ‘시’라고 하는 문학은 한편 한편의 자체적인 분량은 적지만 그 무엇보다 많은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라고 하는 문학은 대부분 고통과 고난의 시기에 꽃피워진 작품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만큼 깊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몸부림치는 과정 가운데 탄생하는 문학작품이 바로 이 시라는 것이죠.
그래서 시라는 것은 독자들이 그 시를 읽을 때, 시인이 이 시를 통해서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도록 만듭니다. 각자 깨닫는 바가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결국 그 시인은 독자들에게 그 시안에 담긴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여러 문학적인 장치들을 만들어 놓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으로 독자들을 이끌어냅니다. 이것이 시가 가진 매력이죠.
우리도 익히 암송하고 있는 시편 23편의 시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시편 23편을 암송할 때면 어떤 그림이 그려지시나요? 푸르른 초장이 그려지고 쉴만한 시냇물 가가 그려집니다. 그 속에서 평안함을 누리는 한 마리의 작은 양이 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든든한 목자가 그 어린 양을 쓰다듬으며 준비한 꼴을 먹여주는 것과 같은 평온함을 느끼게 되죠.
그래서 시편 23편을 읽을 때면 부족함이 없는 꽉 채워진 영혼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그래서 성경이 정경화 되어가는 와중에 이 시편을 빼버리지 않고 생각보다 많은 150편이나 되는 시를 성경에 편입 시킨 것을 보면 이 시편은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정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편을 읽을 때는 그 의미와 뜻을 깊게 묵상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도 다윗이 쓴 시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많은 시를 적을 수 있을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했던 것은 다윗의 인생 자체가 너무도 파란만장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과 같이 꽉 찬 평안함과 안정감을 누리는 시를 쓰기도 하는 반면에, 또 다른 다윗의 시를 읽다 보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괴로움을 토로하는 시를 쓰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36편은 가진 문학 구조가 조금 독특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 36편은 한 가지 주제로 쓰여진 시가 아니라 이 시에는 총 세 가지의 형태가 담겨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1절부터 4절까지는 잠언이나 전도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지혜를 다루는 지혜시로 기록되어 있고요. 5절부터 9절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찬송시이고, 마지막 10절부터 12절은 기도의 내용을 담아 올려드리는 기도문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먼저 시인은 1절부터 4절까지의 시구를 통해 사악한 자의 행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악인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죠. 먼저 악인의 첫 번째 특징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악인에 대하여 기록한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악인은 이것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인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교만의 끝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됩니다.
나는 범죄하였지만, 이 죄악은 드러나지 않을거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에게 미워함을 받지도 않을거야. 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죠.
시인이 말하는 이 악인에 대한 특징은 신자가 경계해야 할 모습 중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신자들은 때로 깊은 자기연민에 빠지게 되어서 쉽게 죄를 용인하고, 그 죄악 된 마음이 사람들 앞에서는 드러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의롭게 여기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으려고 하려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교만함을 바라보지 못하고, 스스로 자랑하는 그 교만함이 죄악인지도 모른 채, 넘어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악인의 모습을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악인의 상은 어떠합니까? 뉴스를 보면 가끔 범죄 한 이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있는데요. 얼굴 전체를 가릴 만큼 챙이 긴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호송되는 죄인들의 모습을 본 기억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죄인의 모습은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서 괴로워하거나, 주눅 들어있거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죄인의 모습이죠.
하지만 오늘의 본문에 등장하는 악인의 모습은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스스로 자랑하면서 아주 당당하고, 자신감 있고 확신에 찬 모습을 가진 이처럼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악인의 모습에 대해 묘사하면서 이러한 이들이 악인의 죄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짓게 되는 교묘한 죄악의 모습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떻습니까? 죄악과 속임이다. 라고 말하고 있죠. 공동번역 성경에는 사기와 속임수 뿐이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사기꾼에게 속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물론 속는 사람이 귀가 얇고 확실하게 잘 알아보지 못해서 그러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사실 사기꾼의 말과 속임수는 정말 그럴듯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나한테 사기를 치겠어? 라고 상상도 못할 정도로 홀리기 때문에 사기를 당하는 것이죠. 사기꾼의 말을 들어보면 사기꾼 말이 다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기행각에 깊게 빠지면 부모, 형제, 남편, 부인, 자식이 말려도 돌아오기가 힘듭니다. 이미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이 이와 같이 행하는 이유는 4절에도 기록되어 있죠. 침상에서도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설뿐만 아니라 악을 거절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충동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치밀하고 교묘하게 악을 행하고자 합니다. 잠자리에 누울 때도 내일은 어떠한 삶을 살까? 라는 고민에 대해서 악을 행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죠.
시인은 1절에서 4까지 악인들의 죄와 악행을 하나 하나 열거하면서 악인의 특징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보통 여기까지 했으면 그 이후에는 어떤 시가 등장해야 할까요? 왠만해서는 이제 의인에 대해서 논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되죠.
시편 1편도 암송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좆지 아니하며... 라고 시작하죠.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사람은 이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악인은 그렇지 아니하며...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오늘의 시편은 구조가 다르죠. 먼저 악인에 대해서 열거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의인은 그렇지 아니하며, 라는 말씀이 나와야 하는데 시인의 관찰은 여기서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그 이후 5절과 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요. 시인이 이와 같이 36편을 구성한 것은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는 것보다 악인과 하나님을 대조함으로서 악인은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며, 그 악을 심판하시는 이는 공의롭고 의로우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더 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함이기 때문입니다.
꼬맹이들이 서로 싸우다가 자기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거나,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이기지 못하게 되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 우리 엄마한테 이를거야! 너 우리 아빠한테 이를거야!입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말로 엄마나 아빠가 실제로 나타나 그 아이를 엄청 혼내 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물론 그런 마음이 어느 정도는 담겨져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그 마음속에 담긴 진짜 의미는 그 아이가 자신의 부모를 얼만큼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너가 지금은 나한테 그렇게 말하지만 우리 엄마는, 우리 아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거야! 너가 지금은 나를 억누르고 나를 괴롭게 하지만 우리 엄마가 오면, 우리 아빠가 오면 너는 단번에 치워버리고 나를 안아주실거야. 내가 맞다고 해주실거야! 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죠.
아마도 시인이 이러한 시를 쓰게 된 경위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 제가 인생을 살아보니 악인은 이렇더라고요. 정말 나쁜 놈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월요일과 화요일에도 35편을 통해서 다윗을 해하려고 하는 무리에 대해서 나누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악인을 고발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반드시 승리할 것임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죠.
제가 공동번역으로 오늘의 본문을 보았는데요. 개역개정 성경보다 그 의미가 확실하게 와닿고 단어 선택이 더욱 좋다고 생각이 들어서 5절부터 10절까지 두 번째 연인 찬송시만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야훼여, 당신의 사랑 하늘에 닿았고 당신의 미쁘심 구름에 닿았습니다.
당신의 의로우심 우람한 산줄기 같고 당신의 공평하심 깊은 바다와도 같사옵니다.
사람과 함께 짐승도 구해 주시니, 야훼여, 당신의 그 값진 사랑 어찌 형언하리이까?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몸을 숨기는 자, 당신의 집 기름기로 배불리 먹이시고 시냇가 단물을 마시게 하시니, 생명의 샘 정녕 당신께 있고 우리 앞길은 당신의 빛을 받아 환합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한결같은 사랑 주시고 마음 바른 자에게 억울한 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이 찬송시에 담긴 고백은 시편 23편과도 같은 고백이 들어있고, 또 엄위하신 하나님의 웅장함과 크심도 담겨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하나님의 엄위하심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인들의 교만한 눈과 그들의 행위는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시편 36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악인들은 자신이 스스로 악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나는 악한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겠죠. 혹시 있다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악을 꾀하지만 그것을 악으로 여기지 않던지, 아니면 그것을 스스로 지혜롭다, 내가 똑똑한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작정하고 악을 행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런 이들은 극히 소수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1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자랑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들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신자들 안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지혜를 더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악인지 모른 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악인이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 이 시편 본문인 지혜의 말씀을 통해 악인이 가진 생각들, 악인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악인의 길에 서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공의의 편에 서 있는지를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악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지만, 의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나의 입술은 무엇을 더욱 많이 말하고 있으며 내가 가까이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삶의 고백이 악인의 길에서 떠나기를 바라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늘 나와 함께 하시기를 간구 하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함께 찬양으로 하나님을 높여드리길 원하는데요. 오늘 시편에 기록된 하나님을 향한 찬송시의 고백을 통해 시인이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우리의 찬양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시인의 고백처럼 이 땅위에 주님과 같은 신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은 보배롭고 우리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평안함을 누리길 소원합니다. 생명의 원천이 주님께 있으니 주님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악의 길에서 떠나 날마다 주님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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