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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요셉의 끝없는 용서

by 터틀곽 2022.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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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끝없는 용서

(50:15~26)

 

오늘의 본문은 요셉의 죽음이 기록된 창세기의 가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로서 창세기라고 하는 성경의 시작 곧 태초의 시작과 하나님 자신의 계시, 그리고 인류의 번영과 그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태동되는 과정의 대서사시가 마무리가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요셉과 형들의 대화가 한 단락을 이루고 있고 요셉의 죽음에 대해서 한 단락이 쓰여져 있는데요.

 

어제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야곱의 죽음을 함께 묵상하였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생을 다하고 죽자 야곱의 아들들 곧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나아가는 내용이 오늘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왜 요셉에게 나아갔나요? 아버지가 죽자 요셉이 자신들이 행했던 죄를 묻고 자신들을 벌할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아버지인 야곱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차마 요셉이 자신들을 어떻게 하지 못했지만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신 마당에 그동안 참아왔던 화를 자신들에게 쏟아낼까 두려워하였던 것이죠.

 

그래서 옛말에도 맞은 놈은 펴고 자도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 라는 속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속담이 무슨 뜻입니까? 남을 괴롭힌 사람은 뒷일이 걱정되어 마음이 늘 불안하다는 뜻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맞은 놈도 억울해서 잠을 잘 못잘 것 같기도 한데, 속담에서는 그래도 맞은 사람은 다리는 펴고 잔다고 하니 이 속담의 원래의 뜻은 반드시 권선징악이 있을 것이다. 라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습니다.

 

요셉을 실제로 죽이려 했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다른 나라의 상인에게 피붙이 동생을 팔아넘긴 자신들의 죄 값이 얼마나 컸는지를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동생인 요셉은 그럴만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애굽의 총리 아니겠습니까?

 

이건 저의 생각이지만 만약 요셉과 그 형들의 재회가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 요셉이 팔려간 종의 모습 그대로 있던 상태에서 형들과 마주쳤다면, 형들이 지금과 같은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요셉에게 나아가 용서를 빌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미안한 마음은 들수는 있었겠죠. 하지만 지금과 같은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요셉에게 나가 엎드려 이와 같이 말합니다. 18절인데요.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형으로서의 자리를 지켰지만 이제 아버지가 사라지고 나니 갑자기 비굴한 모습으로 요셉의 발 앞에 엎드려 종이 되기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동생을 향한 낮춤이 아니라, 요셉이 가진 지위를 향한 낮춤인 것입니다.

 

 

요셉은 이러한 형들의 고백 앞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9절부터 21절까지 말씀 인데요.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여기서 형들에게 두 번이나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진심으로 그 형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안심시키고 있는 것이죠.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이 있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본문을 보면 꼭 막내였던 요셉이 가장 마음이 넓은 큰 형 같고 다른 요셉의 형들은 정말 나잇값 못하는 철부지 아이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한 형들을 두 번이나 안심시키면서 그들을 위로합니다. 그런데 그 위로의 방법을 우리는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요셉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통당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바로 요셉입니다. 그리고 용서하는 사람도 요셉이죠. 그런데 요셉은 응 형들의 마음 잘 알겠어. 너무 두려워 하지마. 내가 고생을 많이 하긴 했지만 내가 용서할게. 내가 용서해줄게. 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셉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여기서 요셉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가면서 1인칭으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보통 그것이 정상이죠. 우리의 주어는 늘 내가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내가 어떤 것을 하고. 내가 어떠어떠 하다. 라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했을 때는 내가 용서 받아야 하고, 내가 그를 용서해야 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그렇죠?

 

그런데 오늘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러 나온 형들을 향해서 요셉은 내가 형들을 용서합니다. 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결국 용서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말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얼마나 놀랍고도 아름다운 고백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 되심이라는 단어를 많이 듣기도 하고 쓰기도 합니다. 주 되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신다.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 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주 되심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기는 하는데 정말 예수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신지 우리가 당당하게 확신있게 말할 수 있으신가요? 저를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우실 거라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 주인 자인 이 단어가 참 살아내기 어려운 단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가 되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부리는 사람이 있고 나를 주로 부르는 사람이 있어서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가 된다는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내가 모든 방향과 키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을 원합니다. 왜 우리는 주가 되길 원하나요? 그것이 편하기 때문에 그렇죠. 그런데 다른 이가 내 주인이 되어서 나를 이리저리 움직이면 그건 또 굉장히 불편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고 싶고 내가 모든것을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로 고백하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했던 그 고백을 보고 베드로의 고백을 향해 베드로야!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하신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라고 말씀하여 주셨던 것이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님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죠.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얻길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영생을 얻는 것, 죄를 용서 받는 것, 천국에 가는 것, 복을 받는 것을 통해서 그러한 간증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원하지만, 예수님을 주로 섬기기 위해 순종하는 것,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서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잘 안됩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주 되심이 내 안에서 인정이 잘 안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에 요셉을 보면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용서의 주체로 세우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추는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셔서 오늘날 당신의 목숨 뿐만 아니라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할 뜻을 가지셨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총리가 되기 위하여 거쳐왔던 모든 고난의 순간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음을, 심지어 나를 죽이려고 했던 형들의 그러한 일들도 하나님이 선하게 바꾸어주셨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만약 요셉이 다니엘 기도회에 나와서 간증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요셉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생하게 들으면서 은혜받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총리가 된 요셉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사람도 있겠죠. 또는 요셉을 부러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요셉의 삶의 시작과 끝을 보고 있죠. 종국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애굽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을 먹여 살리는 지혜를 발휘하는데 사용된 인물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요셉처럼 쓰신다고 하면 요셉처럼 되고 싶으신 분들 계신가요? 아니면 우리의 자녀는 요셉과 같은 인물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있으신가요?

 

그런데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만약 요셉이 총리가 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요셉의 인생을 조금 각색해볼까요?

 

요셉은 종으로 팔려가서 보디발에 집에 있다가 가정총무가 되었는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도망했다가 잡혀서 옥에 갇힙니다. 옥중에서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복직이 되면 나를 기억해 달라고 말을 전합니다. 여기까진 똑같고요. 그런데 그 약속을 관원장이 잊지 않고 그 감옥에서 요셉을 건져줍니다.

 

그래서 요셉은 술맡은 관원장의 집에서 종으로 지내다가 애굽에 곡식을 사러온 형들을 만납니다.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요셉이 가서 형들에게 아는 척을 합니다. 형님 저 요셉입니다. 형들은 흠칫 놀랐지만 애써 아닌척하며 요셉을 모른척합니다. 요셉은 집으로 돌아와 슬피 울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형들을 용서하기로 결심합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집에서 가정 총무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며 살다가 애굽 땅에서 죽었습니다.

 

만약 요셉이 이러한 인생이었을지라도 요셉처럼 살고 싶다. 우리의 자녀가 요셉처럼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이 드시나요? 왠지 뭔가 아쉽죠. 왜 그럴까요?

 

이유는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할 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요셉의 인생의 여정일까요? 총리가 된 요셉의 현재 위치일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요셉의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지 아니하려는 겸손한 마음, 그리고 숱한 고난 가운데 살았지만, 그 속에서 늘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믿음, 그리고 고난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더 나아가서 형들을 향하여 내가 형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24절에는 요셉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그래서 출애굽기 1319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 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또 여호수아 마지막장인 243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요셉이 약속의 땅에 머무르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 언약의 말씀은 그들의 자손들인 모세를 통하여, 그리고 여호수아를 통하여 그도 언약의 땅에 묻히게 됩니다.

 

어제 야곱의 죽음이 기록된 본문을 읽으면서 야곱이 자신이 애굽 땅에서 많은 자손과 풍요로움 속에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가 죽음을 앞두고서도 간절히 원하던 땅이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가나안 땅을 사모하여 그 시신을 가나안 땅에 묻었던 것처럼 요셉도 그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 그의 남은 흔적을 언약의 땅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야곱의 수많은 자손들이 있었겠죠. 이들이 다 가나안 땅에 묻혔을까요? 아닙니다. 대부분 애굽에서 죽고 대부분 광야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언약을 붙들었던 사람들 하나님의 언약을 목숨만큼 죽음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만이 가나안에 뭍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셨던 그 언약이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을 차지하고 그곳에 정책됨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선진 들의 믿음을 통해 우리의 결심을 새롭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이 믿음의 고백이 날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믿음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이 찬양을 고백하길 원하는데요.

 

신실하게 진실하게 함께 찬양하시면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주님께 올려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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