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장례
(창 50:1~14)
제가 기도회를 인도하다 보니 말씀을 준비하고 나누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서 여러분이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확보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설교의 시간을 좀 많이 줄이고 여러분이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여유 있게 드리려고 합니다. 이 기도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 가운데로 나아가시고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지는 것을 누리고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창세기의 마지막 장입니다. 야곱은 130세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후에 애굽 땅에서 17년을 살고 147세가 되어 장사되는데요. 창세기 49장 하반부에 보면 야곱의 죽음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요. 야곱은 자녀들을 향한 유언을 마치고 이후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 유언을 남깁니다.
이 유언에 대해서 야곱은 49장 2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그들에게(야곱의 자식들)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여기서 말하는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은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산 밭입니다. 그곳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또 이삭과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고, 야곱의 첫째 아내인 레아도 그곳에 장사되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죠.
요즘 사람들도 그런지 잘은 모르겠는데요. 옛날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있을 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신변정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묻힐 땅을 준비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가 저희 할아버지도 연세가 많이 드시고 나서는 자신이 묻힐 땅을 알아보러 자주 다니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선산을 마련하시고 분봉도 다 해놓으시고 자신이 묻힐 묘지, 그리고 할머니와 자녀들이 묻힐 묘까지 마련을 해놓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땅을 제 명의로 해놓으셨는데요. 그 이유가 있는습니다. 제 이름으로까지 해놓아야 제가 아버지를 이어서 성묘도 하고 그 무덤을 가꾸어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주도에 있지만, 강원도에 원하지 않는 세금을 분기마다 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야곱의 선조였던 아브라함과 이삭은 거주지가 가나안이었죠. 그래서 그 땅에서 죽어 그곳에 장사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야곱의 현재 거주지는 애굽 땅인 고센 지역이었습니다. 이미 야곱은 고센 땅에서 17년이라는 세월을 살면서 풍족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들 요셉이 그 모든 애굽땅을 다스리는 총리의 자리에 있었기에 애굽에서 정말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야곱 뿐 아니라 요셉의 모든 형제들도 그 풍족함을 함께 누리면서 살았겠죠.
삶이 풍요로우니 자손들도 많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자기의 선조둘이 묻힌 땅에 자신을 장사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죠. 왜 야곱은 번성하고 풍요로웠던 땅인 애굽을 떠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서 장사되기를 원하고 있을까요?
아버지, 어머니의 묘가,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그곳에서 묻혀야 선조들을 만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야곱이 선조의 땅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장사 되기를 바랬던 것은 지금 그들이 머물고있는 땅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약속의 땅에 묻힘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죽어서라도 이루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야곱의 죽음 이후에 야곱의 유언대로 가나안 땅에 올라가 야곱을 막벨라 굴에 장사 하였습니다. 13절에 기록되어 있죠.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다니엘 기도회 전에 요셉에 대해 설교하면서 창세기에서 굉장히 긴 분량을 요셉의 이야기에 할당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었는데요. 이것은 요셉이라는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한 나라가 태동 되기 위한 그 과정 안에서 창세기가 쓰여졌다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창세기의 마지막인 50장에는 야곱의 죽음에 대해 굉장히 심도 있게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죠.
요셉의 이야기로 창세기의 마지막이 장식 되어진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마지막 장의 주인공은 요셉이 아닌 야곱의 죽음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물론 이후에 요셉의 죽음에 대해서도 기록은 되어 있지만 창세기의 마지막은 야곱의 죽음으로 마무리 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는 지금은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야곱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열조에게로 돌아가기 전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죽어서라도 그 땅으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야곱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언약의 성취가 자신의 죽음 이후에라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신뢰했던 것을 볼 수 있는 것이죠.
우리는 야곱의 유언과 그 장례식을 통해서 야곱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야곱의 소망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자신에게 약속으로 주셨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애굽에서 풍족함과 높은 지위를 가지고 만족감을 누리고 있더라도 야곱에게 더 중요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던 그 언약의 말씀과 성취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야곱의 삶을 보며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우리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언약의 말씀이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모해야할 영원한 본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늘 묵상해야 합니다. 최근에 다니엘 기도회에서 이 찬양을 불렀었죠.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오 주님 같은 친구 없도다 저 천국 없으면 난 어떻게 하나 저 천국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우리의 본향은 이 땅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한복음의 말씀에 이렇게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육신의 죽음을 맞이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이 땅에 남아있는 우리의 자손들에게, 또는 친지에게 나의 가까운 이들에게 남기고픈 말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특히 유언은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남기는 법이죠.
그렇기에 죽음을 앞에 둔 이 유언이라는 것은 무게감이 있습니다. 내가 죽음을 앞두고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긴 말.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들이 꼭 이루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남기는 말이 유언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자손들에게 남겨주고픈 마지막 유언이 있다면 무엇을 남겨주겠습니까? 야곱이 마지막 유언으로 열조의 땅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성취가 이루어질 그 땅에 자신의 육체를 묻히기를 바라면서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했던 것처럼,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가치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서 살아갑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놓으신 본향을 향한 소망이 담긴 부활의 복음을 남겨주기를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내가 오늘의 삶을 마지막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내가 남기고 싶은 유언은 무엇인가요? 나는 그 유언을 누구에게 전하고 싶나요?
질문2.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시나요?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처소와 내가 돌아갈 본향을 꿈꾸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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