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와 손방패
(시편 35편 1~13)
시편은 여러 종류의 시가 있는데요. 시편을 분류하자면 1편부터 44편까지는 다윗의 노래. 라고 해서 다윗이 지은 시로 분류합니다. 그중 오늘의 시는 다윗 개인의 탄원시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35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요. 첫 부분은 1절부터 10절까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은 11절부터 18절까지 그리고 마지막은 19절부터 26절까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본 35편의 말씀은 전쟁을 도우시는 하나님,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적들을 향한 기도등의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중 첫 번째 연은 1절부터 10절까지입니다.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하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라고 간청하며 하나님을 실제로 전쟁에 참여시키도록 간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적들에 대항해서 하나님께서 군사적으로 도와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는데요. 실제로 다윗은 많은 전쟁에 참여했던 인물이기도 하죠.
하나님을 군인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첫 번째로 방패와 손방패를 잡으시고 나를 도우소서, 라고 2절에 말하고 있는데요. 방패를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방패는 적의 공격을 막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방패죠. 그런데 일반 방패가 있고 또 손 방패가 있습니다.
일반 방패는 가장 선두에 서서 적의 공격을 막는 큰 방패를 말합니다. 멀리서 찾아보지 않아도 한국에서 데모를 할 때 보면 과격하게 시위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전경들이 큰 방패를 들고 선두에서 그 공격을 막는 광경들을 보신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고대 전투에서도 앞에서 날아오는 화살이나, 창의 공격을 막을 때는 전방에 큰 방패를 세워서 아군을 보호하도록 하는 쉴더를 세웠었는데요.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이 방패입니다.
손방패는 적진에 뛰어들어가서 실제로 몸으로 격투하는 이들이 드는 작은 방패를 말합니다. 한손에는 손 방패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어서 전투를 하는 이들이 드는 방패가 손방패라고 부르죠.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병법이기도 합니다. 승리를 하기 위해서 공격하고 점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생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나를 보호해줄만한 무엇이 필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빠른 발을 가졌고 강한 근육과 날카로운 병기를 가졌다고 해도, 전쟁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공격 앞에서는 능히 당할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를 보호해줄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통하여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전쟁에서의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두 번째로 시인은 3절의 말씀을 통해 창을 빼사 나를 쫓는자의 길을 막으시고 내 영혼에게는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라고 고백하고 있는데요.
창은 공격에 쓰이는 병기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방패가 되어달라고 고백하였고, 이제는 창이 되어 나를 쫓는자의 길을 막아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데요. 그 뒤의 구절이 이색적입니다. 보통 방어를 하고 난 이후에 공격의 고백이 나오는게 좀 더 문맥적으로 어울릴만한 문맥 아닐까요? 그 창으로 하여금 그들을 찌르고 넘어지게 하여 승리하게 하옵소서. 라고 말해야 할 것인데 시인은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무엇보다 자신의 구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4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나를 잡으려 하는 적을 향해서 그들이 멸망 당할 것을 토로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인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자신의 구원임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 사실을 9절에서도 발견할 수 있죠.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오늘의 시를 보면 시인이 처한 형편이 생각보다 안전하거나 평온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생명을 찾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나를 죽이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죠. 나를 상해하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까닭 없이 나를 잡으려고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파놓았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상상만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을 향해서 누군가가 여러분을 죽이기 위해서 기회를 보고 있고, 또 나를 사로잡기 위해서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파놓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저라면은 너무 두렵고도 무서워서 집 밖으로 한발짝도 못나갈 것 같습니다.
내 삶에 누군가 나를 해하려 하고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두렵고 무섭고 떨리는 마음이겠습니까? 성경에서 다윗이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윗과 같은 이러한 상황에 처해 보지 않아서 깊게 공감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 나를 보호해줄 법적인 요소들도 없으며, 힘이 있는 자가 약한자를 얼마든지 억누를 수 있는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나를 죽이려 하고, 나를 해하려하고 나를 사로잡기 위해서 여기저기 함정과 그물을 설치해 놓고 나를 찾아다닌다면,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9절에 기록된대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 하고 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시인은 이러한 상황 앞에서 그 영혼이 즐거워 하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시인의 인생 가운데서 경험하였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아래에서 터져나오는 고백이라고 생각됩니다.
죽음을 초월하여 극악의 상황속에서,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 앞에서도 하나님을 향하는 그 영혼의 고백이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이후 10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가난한자의 단어가 두 번 나오고 있는데요. 첫 번째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는 약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원리는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억압을 받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는 여전히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계속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약한자를 신원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가난하고 궁핍한자를 채우시는 하나님임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누구신가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신가, 약한 자를 강하게, 가난한 자를 부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임을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삶 속에 깊게 관여해 계신 하나님이신가요? 아니면 저 멀리 우주 밖에 계신 하나님이신가요? 우리는 여호와가 같은이가 누구신가! 라고 고백할만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계신가요?
우리의 인생에도 전쟁과 같은 삶을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누군가가 내게 총과 칼을 겨누는 것 만이 전쟁이 아닙니다.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원수 마귀를 대적하는 것도 전쟁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내 삶의 권리르 포기하고 내려놓는것도 전쟁과 같은 일입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우리가 넘어지도록 함정을 파놓기도 합니다.
사랑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삶에서 원수들을 만들어내기도 하며 누군가를 미워하도록 우리를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 우리는 오늘의 시편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영혼에게 명령해야 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그의 구원을 기뻐하라!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실제로 승리의 삶을 살아보았을 때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와 함께하실 때 환난과 고난 중에도 기뻐하며, 즐거워 하고 구원을 선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누군가 나를 공격해 올 때 내가 내새울 수 있는 방패는 무엇인가요? 내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질문2.
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경험한 승리와 즐거움이 있으신가요? 그때의 경험은 지금도 유효한가요? 그로 인하여 나는 여전히 즐거움과 구원을 선포하는 삶을 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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