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창 32:21~32)
오늘의 본문은 야곱의 인생에서의 큰 전환점을 맞이하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본문입니다. 오늘의 포인트를 기점으로 이름이 변하기 전의 야곱과, 이스라엘로 이름이 변한 이후의 인생으로 나뉘어진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32장 초반부의 말씀을 보면 라반과 작별을 하고 고향 땅을 향하여 가는길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들을 하나님의 군대 라고 부르며 그들이 서 있던 땅의 이름을 마하나임 이라고 부릅니다. 마하나임 뜻이 진영, 혹은 진지를 뜻합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용어는 아니지만 군대에서 많이 쓰는 단어입니다. 전쟁을 할 때 군인들이 머무는 장소를 진영이라고 부르죠.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보고 그 땅의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부른 이유는 하나님의 군대가 그곳에 계셨고, 또한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오랜시간 라반의 집에서 고생을 하다가, 이제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향하는 야곱의 마음은 꽤나 설랬을 것입니다. 떠나는 과정중에서 라반이 급히 자신을 추격하여 왔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라반의 적개심을 거두게 하시고, 그곳에서 함께 언약을 세우고 축복 속에 다시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라반의 추격을 견디어 낸 것이 끝이 아니었죠. 야곱은 자신이 라반의 집으로 도망갈 수 밖에 없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던 형 에서와의 조우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에돔 땅에 있는 에서를 살펴보도록 먼저 사람을 보내는데요. 에서가 사백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전보를 듣습니다.
사백명을 거느리고 오는 것은 환영인파를 몰고 오는 것이 절대로 아니죠. 오랜시간 동안 떨어져 있어서 만남의 감격이 너무 큰 나머지 엄청난 환영의 잔치를 벌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백명을 이끌고 오는 것은 야곱을 단번에 사로잡아 자신을 속이고 축복을 빼앗아간 야곱을 벌하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 소식을 들었던 야곱은 심히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7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두려운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죄를 자기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형에게 한 행동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형에게 잡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였겠죠.
형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예물도 따로 준비하였습니다. 그 선물도 하나만 준비한게 아니라 세 때를 나누어서 준비합니다. 물량 공세를 철저하게 계획합니다. 선물을 세 번이나 받으면 형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질까 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선물을 세 때로 나누어서 보내게 됩니다.
이제 선물을 보내고 난 이후의 본문이 오늘부터의 본문이죠. 21절과 2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예물을 보내면서 야곱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 선물을 형이 받으면 분명히 기뻐하겠지? 그리고 나를 용서해주고 나와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환영해주겠지? 라고 생각했을까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보낸 선물은 최소한의 도리였습니다. 받아도 그만, 안받아도 그만인 가치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죠. 아무리 많은 양과 염소와 낙타를 보낸다 할지라도 그간 응어리져 있던 형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야곱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겠죠.
아마 밤을 지내면서 잠도 한숨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일어나서 그 가족들을 깨워서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합니다. 왜 길이 훤하게 잘 보이는 대낮에 강을 건너지 않고 밤에 그 강을 건넜을까? 라는 생각이 성경을 묵상하면서 들었습니다.
야곱하면 떠오르는게 있지 않습니까? 바로 도주의 명수 아닙니까. 형 에서를 피해서 도주, 또 장인 라반을 피해서 도주했던 경험이 있죠. 아마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고향으로 가지 말고 도망을 갈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도망가기에는 훤한 대낮 보다는 밤에 도주하는 것이 눈에 띄지도 않고 훨씬 좋은 조건이기 때문에 그 밤 사이까지 고민을 한 것 같습니다.
야심한 밤 거듭되는 고민을 가득 껴안고 가족들과 소유들과 함께 얍복 강가를 건너기는 했는데 야곱은 거기서 잠시 멈추어 섭니다.
24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소유를 보내고 홀로 남아 있었던 것이죠. 홀로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지막에는 혼자 자신의 목숨만은 살아남기 위해서 홀로 남았을까요? 아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야곱이 홀로 그 자리에 선 것은 아직 에서를 만날 준비가 안되었던지, 아니면 무언가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25절에 보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때에 어긋났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두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첫 번째로 여기서 등장한 인물은 누구인가? 라는 의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어떤 사람일 것인가? 아니면 뒤의 구절을 유추하여서 야곱이 축복을 구하고 있는 것을 보아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자로서 내려온 천사인가? 라는 의문이 듭니다.
29절에 보면 야곱이 그 대상에 대하여 이름이 무엇인가 묻지만 이름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베일에 쌓인 인물임은 분명합니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 대상을 대변하는 인물은 바로 하나님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 이라고 바꾸어 주시는데 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그 땅을 브니엘 이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얼굴 이라는 뜻입니다. 30절에 보면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죠.
첫 번째 의문은 정황상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두 번째 의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였다면, 25절에 기록된대로 하나님은 야곱과 겨루어서 이기지 못했을까요?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아니 허벅지 관절을 한번 치면 그 뼈가 어긋날 정도로 힘이 있는 사람 일텐데 왜 밤새도록 야곱을 이기지 못했을까요? 야곱이 그만큼 힘이 세서 그랬을까요? 정말 목숨을 걸고 덤벼들어서 그 기세에 눌려서 이기지 못했을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그럼 왜 이기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기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종종 진언이가 저랑 씨름하는걸 좋아하거든요. 씨름뿐만이 아닙니다. 아빠하고 하는 모든 놀이 중에서 승부가 나는 그런 놀이를 진언이가 아주 좋아합니다. 지금은 진언이가 그래도 조금 성장해서 이기고 지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정을 하는 편인데요. 작년까지만 해도 아빠가 이기는 꼴을 못봤습니다. 행여라도 아빠가 이기면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었죠. 저희 아내는 그런 저를 보면서 아니 어른이 돼서 그렇게 꼭 다 이겨야 되냐고 좀 져주면서 놀아주면 안되냐고 하기도 했는데요.
그럴때면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한게 아니다. 라는걸 가르쳐주고 싶었다는 엉뚱한 변명을 대면서 웃어넘기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맨날 이겼겠습니까? 어쩌다가 한 두 번 이기는건데 그것도 못 참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져줍니다. 씨름을 해도 져주고. 번개파워를 해도 으어억 하고 쓰러지고, 달리기도 일부러 늦게 뛰고. 공을 던져도 일부러 못막은 척 하고 그렇게 아이하고 놀아줍니다.
왜 그런가요? 제가 정말 진언이보다 힘이 없고, 달리기도 느릴까요? 반사신경이 느려서 그런가요? 아닙니다. 제가 져주는 이유는 제가 져줘야지 아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져주는 것이죠.
하나님은 왜 야곱과 밤새도록 몸의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저희 진언이도 저랑 씨름하거나 달리기를 할때는 최선을 다하거든요? 자신의 힘의 백프로를 씁니다. 모든 힘을 다 해서 저를 이기려고 하죠. 그래봐야 꼬맹이의 힘이니까 아주 장난스럽죠. 하지만 그때 쓰러질때도, 져줄때도 쉽게 쉽게 대충대충 져주면 안됩니다. 진언이가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아깝게 져줘야 합니다. 어느정도는 버텨주다가 시간을 끌어주다가 져줘야 진언이 성취감이 올라가거든요.
만약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서 덤벼보아라 한 직후에 그냥 허벅다리를 때려서 그 관절을 어긋나게 해버렸으면 극적이지 않죠. 야곱은 모든 힘을 다해서 매달렸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씨름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정말 씨름인지 아니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는지 매달렸는지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무던히 애를 썼을 것입니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는데도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붙듭니다.
그리고는 야곱을 일으켜 세우고 네 이름이 무엇인가 물어봅니다. 이름을 몰라서 물어봤을까요? 이름을 물어보는 것은 너의 존재가 누구이냐? 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 뜻이 속이다 아닙니까? 속고 속이는 인생, 그리고 자기도 속는 인생을 살아왔던 야곱 아닌가요?
아마 야곱은 저는 야곱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펑펑 울었을 것 같습니다. 그간에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기의 이름과 같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왜 내 인생은 이런가, 왜 내 인생은 야곱이라는 이름처럼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살 수밖에 없는가! 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밤새도록 그 사람과 씨름하느라 옷은 다 찢겨지고 땀과 흙 범벅이 된 정말 말로 할 수 없는 추찹한 몰골이 된 야곱은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내 인생은 이런 인생이었습니다. 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향하여 이제 네 이름을 야곱이라 하지말고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속이는 자 같은 버리고 싶은 그 이름에서 하나님을 이긴자 라는 이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야곱은 이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속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라는 놀라운 이름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했을 때 정말 의미 없었던 인생에서 예수님의 은혜로 야곱은 씨름이라도 했지만 우리는 어떤 공로도 없이 우리를 위하여 베풀어 주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요?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었듯이 우리도 죄인에서 의인이 된 것을 기억하시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깊이 깨달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내 인생의 얍복 나루터를 경험한 적이 있으신가요? 온 힘과 열정을 다해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 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질문2.
내가 새 피조물임을 고백하십니까? 우리의 이름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내가 바뀐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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