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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에서 후손의 계보

by 터틀곽 2022.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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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후손의 계보

(36:1~43)

 

오늘의 본문은 에서 후손의 계보가 기록된 본문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오늘 특별히 36장 전체를 에서에 관한 이야기들로만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왜 창세기에서는 이렇게 긴 43구절의 지면을 할애하여 에서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향한 말씀을 풀어내기도 부족할 텐데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들에 포커스를 맞춘 서사를 풀어내다가, 갑자기 에서의 이야기가 길게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35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35장은 토요일과 주일의 본문이었는데요. 짧게 설명드리자면 35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다시 한번 부르시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35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엘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형의 복수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급히 라반의 집으로 향하다가 밤에 노숙을 하던 중 야곱이 꿈을 꾸게 됩니다. 그 꿈속에서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현현하셔서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셨던 언약의 말씀을 야곱에게도 그 언약이 유효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네가 어디로 가던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은 꿈에서 께어나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그 자리를 벧엘이라고 부릅니다. 벧엘의 뜻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35장의 말씀을 보면, 다시 하나님께서 야곱을 그 벧엘로 부르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벧엘로 갈 때 야곱이 명하였던 것은 모든 이방 신을 버리고, 드라빔이던 무엇이던 그들이 이동하던 땅의 여정 중에서 만나게 되었던 모든 이방의 것들을 버리고 정결하게 하고 옷도 갈아입습니다. 그리고 모든 장신구들도 빼어서 상수리 나무 아래 묻고 길을 떠나 벧엘에 이릅니다. 벧엘에서 다시 한번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었던 언약의 말씀을 다시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라헬을 통해서 마지막 아들인 베냐민을 낳으면서 야곱의 족보가 35장에 하반절에 기록됩니다. 그와 함께 이삭의 죽음이 마지막으로 기록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의 본문인 36장의 기록이 시작되는 것이죠. 창세기에는 이와 같은 오늘의 본문과 비슷한 구절의 등장이 한 번 더 있었습니다. 바로 창세기 25장에 기록된 내용인데요. 25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죽음과 함께 이삭에게 모든 소유를 물려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삭의 이복 형인 이스마엘의 후손에 대한 구절이 등장하는데요. 이삭의 후손인 에서와 야곱의 탄생 바로 앞에 이스마엘의 후손들에 대한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5장에서는 이삭의 죽음, 그리고 그의 아들인 야곱의 족보와 에서의 족보가 뒤를 이어 등장하고 있는것이죠.

 

창세기의 저자는 이렇게 새로운 족장의 역사를 시작하기 전에 그 이전의 족장의 열대기와 그 후손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형태로 이 창세기를 기록하였습니다. 어떤 책이든 그 책의 서사가 기록되어 있다면 그 서사에서는 반드시 그 서사를 이끌고 나가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의 관점으로 성경이 기록되어져 가는 것을 보게 되죠. 우리가 생각하는대로라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족장사에 있어서는 주인공이라고 생각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이들의 내용을 더욱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이들이 주인공의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아마 수긍이 되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꼭 굳이 이스마엘과 에서의 족보까지도 등장을 시켜야 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 번쯤은 고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역사의 기록의 대부분은 그 역사의 흐름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을 중심으로 기록이 됩니다. 그 시대의 왕이나, 혹은 전쟁에서 승리한 이들이나, 물리적이든 아니든 권력을 바꾼 이들을 중심으로 역사가 기록이 되죠. 그래서 혹자들은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성경도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성경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자녀중에서도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지만 이삭을 중심으로 성경이 기록되었고, 이삭의 자녀도 에서와 야곱이 있었지만 야곱을 중심으로 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주인공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리고 요셉도 아닙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와 맺은 언약의 신실하심이 성경의 역사의 흐름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 그리고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계보까지 흘러간 것임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이어진 그들의 역사만 기억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마엘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창세기 1610~11절의 말씀인데요 이스마엘의 어머니인 하갈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꼐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에는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하갈의 아들인 이스마엘 또한 약속의 민족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한 민족을 이루게 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들나귀처럼 되어 형제들과 대항하며 살아갈 운명을 가진 민족으로 번성할 것이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던 것이죠.

 

에서에게는 어떤 언약을 주셨을까요?

 

252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리브가에게 주셨던 말씀이죠.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태 중에 있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두 국민이, 두 민족이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으로 이삭으로 야곱으로 이어졌기에 그들을 중점적으로 하여 역사와 사건들이 기록되었지만, 에서도 한 민족을 이루어 살아갈 그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충실히 이행하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죠.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세계을 포함하여 모든 우주를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일들 중에 우리의 지혜로 또 우리의 생각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기도 하며 우리의 짧은 지식과 내가 볼 수 있는 한계인 지극히 좁은 관점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또 다른 여러 인류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섭리하고 계심을 우리는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와중에 인류의 타락과 죄성으로 인하여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도 마주하게 되지만, 그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대한 우리의 본 모습일 뿐 그 사건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될수는 없는 것이죠.

 

다만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며, 또 우리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라서 살아가야 함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바라볼 때 또 우리와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마주할 때,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시각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그 차원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묵상하는 훈련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훈련이라는 것이죠.

 

그렇다고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쪽으로만 성경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생각의 틀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큰 주제와 흐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는 훈련도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36장의 본문과 35장의 본문을 보면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형태를 발견하실 수가 있는데요.

 

바로 야곱의 아들들과 에서의 후손들을 표현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35장 하반절에는 야곱의 열두 아들이라고 해서 장자 레아와 라헬, 그리고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의 이름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인 36장 하반절인 40절 이후를 보면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이라고 하여 그의 후손들은 족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죠.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라고 하면서 왕의 열대기를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사울인데, 이 사울까지 가는 여정이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아직 요셉의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고, 요셉 이후 애굽에서 430년간 포로 생활도 해야하고, 또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40년을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여호수아 이후에 사사기를 맞이하는데 이 사사의 시대만 한 200여년의 시간이 흘러야 합니다.

 

이미 에서의 후손들은 그 땅에서 왕이 나고 왕의 역사가 벌써부터 시작되었는데, 아직 이스라엘은 민족도 이루지 못한 그런 상황이었죠. 어찌 보면 에서의 후손들이 훨씬 빠르게 자리를 잡고 왕국을 이루고 그의 자손들이 더욱 빠르게 번성하여 한 국가를 이룬 것을 보게 됩니다.

 

그에 반해 이스라엘은 이제야 야곱의 시대가 저물고 내일의 본문부터 시작될 37장에서야 요셉의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야곱이 달구지를 타고 애굽 땅에 들어가지도 못한 시점이라는 것이죠.

 

사람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는 이미 번성하여 체계를 갖춘 에서의 삶이 더욱 성공한 삶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다만 성경의 흐름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쓰여져 있기에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가 이와 같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살아간다면, 사실 이스라엘의 행보는 에서보다 훨씬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에서가 더 큰 민족과 부유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며 에서가 더 복 받은 자녀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43절 하반절에 에돔족속의 조장은 에서더라. 라는 이 구절을 통해서 역사적인 에돔 족속에 대한 조상은 에서라는 것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에서 후손들의 경제체제가 지금 야곱보다 훨씬 우위에 있더라도, 그들은 언약 백성으로서 제외된 민족임을 확실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아직 열 두명의 아들밖에 없는 야곱의 네러티브도 함께 끝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야곱의 시작이 지금은 초라해보일지라도, 또 그들의 인생이 그 초라한 가운데 끝날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또 유다로부터 시작되어 다윗까지, 또 다윗으로부터 예수그리스도까지 하나님의 관점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그 언약의 자손들을 향하여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은 어디를 따라가야 할까요? 번성한 에서를 좇아 부와 안정된 삶, 이미 고도화된 삶을 앙망하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조금 부족하고 넘어지고, 범죄하였을 때 꾸짖음과 책망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따라 살아야 할까요?

 

이렇듯 야곱과 에서의 삶이 드러나고, 또 갈리듯이 우리의 인생도 언젠가 의와 불의로 갈려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와 불의의 자녀들로 갈릴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가르듯 갈려질 때 내가 서있는 곳이 하나님 편에 서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질문1.

나의 삶을 인도하시면서 또한 내가 속한 모든 피조세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하시나요? 그 속에서 내가 고백해야 할 믿음의 고백은 무엇일까요?

 

질문2.

나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편에 서 있으신가요? 그것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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