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반과의 언약
(창 31:43~55)
31장을 20절을 살펴보면 야곱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 방심한 틈을 타서 야반도주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겠죠. 함께 나가는 식솔만 해도 수십명이었을 것이고, 그동안 얻은 재물들도 상당한 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양과 염소뿐만 아니라 그들을 관리하는 일꾼들도 함께 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43절을 보면 왜 야곱이 라반의 낯을 피하여 몰래 도주하였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라반은 여전히 딸들은 내 딸이고, 아이들도 나의 손자 손녀들이다. 양 떼도 내 양 떼며 너가 보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자신의 소유임을 말하고 있죠. 물론 말미에는 그러니 내가 너를 어떻게 하겠는가? 내가 너를 사로잡아서 다시 데리고 가겠느냐? 라고 묻고 있지만 라반의 속마음은 사실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도 라반이 억지로 아내와 자녀들을 빼앗을 것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고요, 또 라반의 성품과 지금까지의 행동을 보았을 때 라반은 야곱을 잡으러 간 것이 분명합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현몽하여 주셔서 야곱을 해하지 말 것을 약속하지 않으셨다면 라반은 야곱의 모든 소유를 자신의 소유라고 여기면서 야곱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시 빼앗아 갔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었으면 라반이 그의 형제들을 데리고 일주일을 쫓아가서 야곱을 찾아갔겠습니까?
하지만 라반의 꿈에 현몽하신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악간에 해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고 야곱은 그 말에 힘을 얻어 내가 얼마나 삼촌 때문에 고생했는지를 아는가! 라고 하면서 그간 쌓인 울불을 토해내듯이 자신이 당한 설움을 쏟아냅니다.
그 말을 들은 라반이 야곱을 향해서 이제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자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곱과 라반이 함께 돌무더기를 쌓고, 또 형제들과 함께 그 돌무더기를 쌓고 그 곳에서 잔치를 베풀고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인 돌 무더기와 돌기둥 바라보면서 언약을 체결하는 모습이 오늘의 본문이죠.
라반은 야곱과의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돌무더기를 증거로 삼습니다. 그것이 경계석이 되어서 이 경계를 넘어 내가 너를 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야곱을 향해서 너도 이 경계를 넘어 나를 해하지 않을 것을 언약하라고 합니다.
참 아이러니 하죠. 라반과 야곱의 관계는 장인과 사위 아닙니까? 아무리 관계가 어색할 수는 있지만 서로 전쟁을 하지 말자는 약속을 할만한 관계는 아닐 것인데, 라반도 내가 이 경계를 넘어가지 않을 것이고, 너도 이 경계를 넘어오지 말라는 언약을 맺습니다.
이 언약만 봐도 라반과 야곱의 관계의 골이 얼마나 깊게 파였는지를 알 수 있죠. 서로 사랑하고 지지해주는 가족의 관계가 아니라 우리 서로 싸우지 않기를 서로를 해하지 말 것을 약속해야 하는 적대심을 가진 관계가 야곱과 라반의 관계였습니다.
야곱의 가정사는 참 슬픈 가정사를 가졌습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동생으로 태어나 형의 그늘 아래서 자랐고, 또 형이 가진 장자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였습니다. 그래서 형의 복수가 두려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결국 본토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만 했었죠. 그렇게 가족과 떨어져 외삼촌이 있는 친척집으로 갔습니다만, 그곳에서도 외삼촌 라반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아내와 여러 자녀들을 얻었지만, 형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갔던 것처럼 외삼촌이면서 장인이었던 라반이 자신을 찾아와 해할 것이 두려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또 한 번 도망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기억하시고 그의 인생과 함께하여 주셨습니다. 고난의 여정을 통과하는 그 길가운데 야곱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아브라함과 맺어주셨던 그 언약을 그의 자손들에게 충실히 이행해 가시는 은혜를 야곱에게 베풀어주신 것이죠.
라반과 야곱이 언약의 돌무더기를 쌓은 후 53절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라반이 야곱을 급히 찾아온 이유중에 하나는 드라빔을 찾기 위한 이유도 있습니다. 이 드라빔은 다산과 풍요의 신이고 또 드라빔은 상속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는 가족 수호신의 역할을 하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드라빔을 소유한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것이죠.
야곱이 도망갈 때에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을 도둑질하였죠. 야곱은 이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드라빔이 없어진 것을 깨닫자 라반이 그것을 찾고자 하여 부리나케 야곱을 추격한 것이죠. 그리고는 드라빔을 찾기위해 야곱의 장막을 샅샅이 뒤집니다. 하지만 라헬이 꽁꽁 잘도 숨겨놨기에 찾지는 못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도 라반의 가치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결국 라반이 중요시 여겼던 것은 하나님 신앙이 아니라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이 드라빔, 우상을 되찾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이 53절에 언약하는 고백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홀은 아브라함의 동생이죠. 나홀의 아들이 브두엘이고 브두엘의 아들이 라반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의 아들이 야곱이 되는것이죠.
아브라함과, 나홀의 하나님이라고 라반이 고백하는 것은, 그가 어떤 여호와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고백을 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다만 라반이 인식했던 신앙은, 야곱이라는 조카가 믿었던 하나님, 또 자신의 조부들이 믿었던 하나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죠. 다만 조상들의 이름을 들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것은 야곱으로 하여금 이 언약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나홀의 하나님이라는 명목을 가지고 야곱에게 맹새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그 이름으로 맹세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죠. 경외라고 하는 단어는 존경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지만 경외하는 대상에 대한 지극한 존경을 넘어 두려움 이라는 뜻도 내포 되어 있습니다.
이 경외에서 오는 두려움은 어떤 공포스러움으로 부터 오는 두려움이 아니라 지극히 큰 대상으로 부터 오는 압도되는 힘 앞에 자신의 무기력함을 경험할 때 쓰는 단어가 경외라는 단어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이 경외했던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언약에 맹세합니다.
이 언약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자세를 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반이 이해하는 여호와 신앙은 무엇이었나요? 라반의 삶에서 가장 중요시 여겨졌던 것은 물질과 번영이었습니다. 야곱을 보내지 않고 계속 붙들고 싶었던 이유도 야곱 덕분에 이뤄진 자산의 증식 때문이었고요. 자신에게 말하지 않고 떠난 야곱을 찾기 위해 칠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와 야곱에게 도달한 것도 드라빔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기 전날 밤 라반의 꿈에 현몽하여 주셔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면 그 자리에서 야곱을 처리하고 딸들과 손주들과 양과 염소떼를 데리고 돌아갈 작정을 했을런지도 모릅니다.
또한 야곱과 언약을 맺을 때에도 경계석을 세우고 너와 내가 서로를 해하지 말자는 약조를 하는 것 또한 이미 거부가 되어버린 야곱과 그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복을 말미암아서 자신의 재산을 빼앗기거나 해를 당할 것이 두려워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죠.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나홀과 또 열조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신앙과 자신은 큰 연관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동남아시아 중에서 필리핀이나, 또 남미 지역에 여러 카톨릭이나 기독교 국가를 방문하다보면 그들의 인생에 종교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필리핀에 가보면 집집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상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거리마다 현수막에 교회의 행사가 걸려있고 또 교회와 성당등 종교 건물도 수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집에 많은 성화가 걸려있고 여러 동상들이 있고, 그들이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실제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삶에서의 하나님은 실제적이고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종교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냐? 라고 물어보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들이 가진 신앙은 하나님과의 실제적이과 관계적인 신앙이 아니라 문화적인 신앙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제자도로 세워진 신앙이 아닌, 그저 종교가 하나의 문화로 그들의 삶에 자리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라반이 언약을 세울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이해했던 것처럼, 오히려 라반에게는 없어진 드라빔이 더 중요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의 풍요와 만족을 향한 갈망을 더 추앙하고 있던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고백하는 하나님 신앙은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였습니다. 야곱이 이해하는 하나님 신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참된 존경과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신앙을 가졌던 것이죠.
신앙생활과 종교 생활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나의 관심과 태도입니다. 사월초파일에 한번 절에 가는 사람도 자신을 불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에만 교회에 가는 사람도 자신을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인은 실제로 신을 향한 사랑과 존경과 경외함을 담아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종교적인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문화에 담겨진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실제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 아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담아 경외함을 담아 신앙생활을 하고 계시나요.
날마다 우리의 고백이 살아있는 신앙의 고백이 되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하늘의 신령한 은혜를 이 땅 가운데서 누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영역은 어디까지인가요?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나요?
질문2.
고난과 어려움을 엄습할 때, 내가 피할 곳은 어디인가요? 나를 도우는 손길은 어디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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