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나
(창 30:25~43)
야곱은 레아와 라헬과 또 그들의 여종인 실바와 빌하를 통해서 12명의 자녀를 낳습니다. 이 야곱의 모든 자녀들이 열두지파가 되는 것은 아니고요. 열두 지파에서 빠진 인원이 있습니다. 바로 레위지파는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기 때문에 빠지게 되고요. 또 딸이었던 디나도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파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본향으로 귀환하던 중에 낳은 라헬의 막내아들 베냐민과 요셉의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이루게 되죠.
본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래도 열 한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게 됩니다. 이제 이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이 세워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오늘의 본문을 보면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장인인 라반에게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겠으니 외삼촌에게서 얻은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말하죠.
야곱이 참 일을 잘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을 보면 라반은 야곱을 보내고 싶어하지않죠. 30절에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라는 말을 미루어 보아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 아내를 얻고서 무보수로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따로 보수를 챙겨주었다는 말이 없이 나도 이제는 앞으로 살아갈 밑천이 필요하다는 것을 얘기하죠.
27절의 말씀을 보면 라반이 야곱을 통해서 거부가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라고 말하고 있죠.
너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라는 말이 너그러워 보이지만 반협박과도 같은 말이죠. 사위는 백년손님이라는 말이 있듯이 장인과 사위 사이에는 약간 벽 같은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금지옥엽처럼 키운 딸을 데려간 남자가 바로 사위기 때문에 아무리 사위가 살갑게 잘 한다고 해도 약간 부족하고 모자란 면이 보이기 마련이기 때문이죠. 딸 가지신 부모님은 아마 다 이해가 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라반이 야곱에게 뭐라고 얘기 합니까? 너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이라고 말하고 있죠.
어떤 사위가 그 말에 대놓고 저는 장인어른을 사랑하지 않는데요? 좋아하지 않는데요?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야곱의 입장은 더 불리한 입장입니다. 본가는 800키로나 떨어진 곳에 있고 자신은 형의 낯을 피해서 도망자의 입장으로 홀홀단신으로 그 집에 데릴사위처럼 들어가 있는 입장이니 아마 자기편은 아무도 없는 그런 입장이었죠.
장인인 라반은 자신의 보수를 따로 챙겨주지 아니하는 상황이었고, 이제 아내들과 자녀들이 많아져 이 식솔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이 살아갈 방법을 간구하기를 간청하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라반은 무보수로 일을 해주던 야곱을 보내주기 싫었습니다. 오히려 야곱을 통해서 라반의 소유가 번성하여 떼를 이루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에 더더욱 야곱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죠. 하지만 라반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는 터라 28절의 말씀이죠.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겠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31장 7절의 말씀을 보면 라반이 그 품삯 마져도 열 번이나 변경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반의 본성 자체가 물질에 집착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람을 소유하려고 하는 탐욕스러움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14년동안 일한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자신의 소유권을 요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31절에 말씀을 보면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무것도는 온전한 양을 의미합니다. 32절에 보면 외삼촌의 양떼에 두루 다니며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서 이같은 것으로 품삯을 삼겠다고 말합니다. 아롱진것과 점있는 것 검은 것은 상품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결국 야곱이 요구했던 것들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것과 같은 셈이죠.
라반이 듣자하니 꽤나 괜찮은 요구였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양과 염소는 하얗거나 연갈색으로 태어나는 것이 일반적이고 아롱진것과 점박이들은 상품가치도 없는 것들이고 또 잘 태어나지 않는 종이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야곱이 오랜시간 동안 목축업을 하면서 깨달은 노하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방법으로 하면 아롱진 양을 낳는다는 정설은 없지만 튼튼한 양들이 새끼 밸 때는 야곱이 행했던 노하우 대로 하면 튼튼한 아롱진 것들과 점박이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튼튼한 것들은 야곱의 소유가 되고, 약한 것들은 라반의 소유가 되어 야곱이 매우 번창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죠.
야곱의 이름의 뜻이 속이는 자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죠. 속이는 자였던 야곱은 형도 속이고 아버지도 속였다가 형의 노여움을 사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먼 길을 떠나 라반의 집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자기보다 한 수 위었던 라반을 만나 오히려 속임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오랜시간 동안 고향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외삼촌의 집에서 고생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31장에 보면 야곱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죠.
하지만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을 향하여 이뤄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갖은 고생을 했지만, 야곱이 목축업의 대가가 되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야곱을 다시 번창하게 하시는 것을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죠.
야곱이라는 사람의 인생이 본 받을만한 거리가 있었나요? 사실 야곱의 인생의 여정을 보면 우리가 본받을만한 믿음의 도전을 살아온 사실이 없습니다. 형에게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사려고 하는 그 간사함과, 형이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대신 받기 위해서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본인이 에서인 척을 했던 거짓됨이 야곱이란 인물을 대변하는 그의 성품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시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과 세우셨던 그 언약을 그의 자손들에게 충실히 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증거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우리가 살아온 환경,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깨달은 영적인 지혜들, 혹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응답하셨던 기도의 응답이나 이런 모든 것들을 복합적으로 구성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죠.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이나 윤리, 혹은 월등히 발달한 법치국가의 올바른 헌법으로도 제한할 수 없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가끔은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고난에 처하기도 하고, 또 불의하게 사는 사람들이 형통함을 누리는 것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가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이 아니 하나님은 선하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악에는 침묵하시고, 고난 당하고 있는 선한 이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는가? 라고 생각할 때가 있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가 생각한 정의와 도덕과 윤리적인 정의대로 일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 때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신앙생활에 회의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지혜로 다 깨달을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하나님 신앙을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드리고 내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믿음의 고백이라는 것이죠.
나아가서 구원받을 수 없는 인류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기이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 위에 이미 부어져 있음을 깨닫고 나 같은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이미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야곱과 같은 우리의 허물 많고 거짓된 인생을 언젠가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셔서 우리를 옳다 인정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온전한 엎드려짐과 온전한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잘못한 것이 없지만 억울하게 누명을 쓰거나, 원치 않는 어려움을 당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질문2.
하나님을 향한 나의 기준은 올바른가요?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도록 내가 드려야 할 믿음의 고백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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