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지 못한 레아
(창 29:31~35)
어제의 본문을 통해서 혼인을 사기당한 야곱과, 또 본의 아니게 가해자가 되어야 했던 레아, 또 끝까지 자신의 사랑을 확인한 라헬에 대한 말씀을 살펴 보았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다고 성경에 기록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외삼촌에게 라헬을 위하여 7년을 봉사하면서 라헬을 맞이하는 결혼 지참금을 지불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7년이 지나고 결혼식을 올렸지만, 신방에 들어온 사람은 레아였었죠.
성경에서는 레아라는 인물에 대해서 그의 심경이라던지, 어떤 여인이었는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라헬은 아름다웠고, 레아는 시력이 약하였다고만 기록되어 있죠. 여기서 말하는 시력이 약하였다는 뜻이 어제 강전도사님도 말씀에 나누셨지만 총명하지 않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유약한, 가냘픈 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라헬은 생기가 돌고 아름답고 활기찬 느낌의 여인인 반면에 레아는 약간 더 차분하거나 우울질을 가진 여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자는 시력과 감정이 앞서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남자에게 누군가를 소개해줄 때 가장 먼저 물어보는 말이 예쁘냐? 혹은 사진있냐?를 먼저 물어본다고 합니다. 그만큼 남자에게는 내면의 아름다움보다 외적인 부분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 동물이라는 거죠.
남성을 비하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도 더 아리따운, 더 고운 라헬을 더욱 사랑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여성은 어떨까요? 제 생각이지만 여성분들도 이왕이면 더 잘생기고 콧대도 높고 키도 큰 남성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죠.
제가 위에서 레아에 대해서 본의 아니게 가해자가 되어야 했던 사람이라고 잠시 하였는데요. 레아가 들으면 굉장히 서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야곱 입장에서는 사기결혼을 당하긴 한거죠. 실제적인 원인을 제공한 이는 외삼촌인 라반이었지만, 레아도 그 결혼식에 공범으로 가담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레아가 그 상황 가운데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고 그 사기 결혼에 가담한 것을 보아 레아도 남몰래 야곱을 흠모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그 동네의 풍습에 언니가 먼저 시집을 가야 하는 것이 정설이었다면 라반은 이 사실에 대해 야곱에게 언질을 주었어야 합니다. 아 너가 라헬을 사랑하는 구나. 그런데 우리는 동생이 먼저 시집가는 일은 없다. 라고 말하면 야곱이 동네에 나가서 레아를 시집보낼만한 멋진 청년을 데려왔을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지 않았겠습니까?
뻔히 라헬과 혼인을 할 것을 약속하고 칠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그 시간만을 학수고대 하였을 것인데, 어찌 결혼식 당일 날 신방에 들어온 사람이 레아로 바뀌었다는건 정말 야곱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죠.
하지만, 그렇게 사기 결혼까지 감행하면서 야곱의 첫 번째 신부가 되었지만 그러한 레아가 야곱에게 사랑을 받을리 만무했습니다. 본래 야곱이 더 사랑하던 여인은 라헬이었고, 오히려 야곱은 레아를 신부로 맞았다가 또 다시 라헬을 신부로 맞기 위해서 7년이란 시간 동안 또 라반을 섬겨야 했기 때문에 보통 억울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의 슬픔과 괴로움을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상태로 매일 매일을 한집에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게다가 나보다 더 사랑하는 여인을 늘 옆에 품고 사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아야 한다면 정말 그것만큼 괴로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요? 게다가 자기보다 더 사랑받는 여인이 자기의 친 여동생이라면 친 자매라면 정말 대한민국 아침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일이죠.
레아의 삶은 살아도 사는게 아닌 것 같은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 31에서는 하나님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셨다. 라는 말씀이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래도 처가살이를 하고 있던 터라 장인인 라반의 눈치는 좀 보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레아와 라헬 사이에 어떤 암묵적인 룰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야곱이 라헬하고만 지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3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열어주셨다. 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간을 정해두고 라헬과도 지내고 레아와도 지내고 이렇게 번갈아가면서 두 집 살림 이라는 말은 좀 좋은 어감은 아니지만 그렇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이 슬픈 현실 가운데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태를 열어주셔서 레아를 통해서 야곱의 대를 이을 자녀가 출생하였습니다.
할아버지였던 아브라함도, 아버지였던 이삭도 자녀를 낳지 못해서 많은 고생과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 집안에 이제는 순적하게 자녀가 출생되는 놀라운 은혜가 펼쳐진 것이죠.
그 첫째를 출산한 이후에 레아가 이름을 르우벤이라 짓습니다. 이름의 뜻은 보라 아들이라.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레아의 연약함과 비천함을 돌아보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한 마음으로 보라 아들이라! 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리고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라고 생각합니다.
아들도 낳았으니 야곱은 이전보다는 레아를 더 찾았을 것입니다. 주 양육자가 레아였으니 레아를 통해서 얻은 아들을 보면서 레아를 또 보살펴주고 했었겠죠.
그런데 33절에 보면 레아가 또 아들을 낳습니다.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분명히 첫째 르우벤을 낳고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라고 생각했는데, 레아는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미루어 보아 첫째인 르우벤을 낳고 남편에게 사랑받을 것을 잔뜩 기대하였지만 그 기대에 미치는 사랑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내일과 모레의 본문인 30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라헬이 보통 속이 상한게 아님을 볼 수 있죠. 그래서 자기의 여종을 들여보내면서까지 자녀를 낳도록 합니다. 결국 라헬도 자녀를 낳기는 하지만 아마 태의 문이 언니인 레아에게 계속적으로 열리는 것을 보면서 야곱을 엄청 닦달하고 괴롭게 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더 좋아 아니면 언니가 낳은 저 애기가 더 좋아! 누굴 더 사랑해!’ 라고 하면서 야곱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더 남편을 감싸고 돌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르우벤을 낳고 남편에게 사랑 받을 것을 기대했던 레아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또 슬퍼하고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둘째인 시므온을 낳고 내가 사랑받지 못한 나의 하소연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라고 말하며 듣다 라는 이름을 그 아들에게 지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치지 아니하시고 레아의 태를 또 여십니다. 34절의 말씀이죠.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레위라는 이름의 뜻은 연합입니다. 셋째를 낳고서 레아가 무엇이라 말합니까?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인즉슨 둘째를 낳고도 남편과 참된 연합을 누리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이제 내가 남편을 통하여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야말로 남편과 나는 참으로 연합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야곱도 참 어지간히 레아를 사랑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레아가 아들의 이름을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남편이 나와 연합하지 않아서, 라는 이유를 가지고 이름을 지었을까요.
하지만 오늘 마지막 35절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된 레아의 심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또 태를 열어주셔서 넷째를 낳습니다. 그 이름이 유다죠. 예수그리스도의 족보가 이 유다로부터 이어집니다. 유다의 이름의 뜻이 바로 찬송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레아가 무어라 고백하고 있습니까?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째 르우벤과 둘째인 시므온과 또 셋째인 레위를 낳았을때까지 레아의 포커스는 누구였나요? 바로 남편인 야곱이었습니다.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자녀를 주신거야, 그래서 자녀를 낳았으니 이제 나를 사랑하겠지?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 나와 연합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자녀를 낳을 때마다 남편의 사랑 받기를 더욱 간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넷째인 유다를 낳고서는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죠.
왜 레아는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을까요? 넷째까지 낳았으니까 이제 낳을 만큼 낳았다. 이제는 뭐 남편의 관심도 필요 없다. 아들하고만 살면 됐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아마 레아는 자신의 태를 열어주시면서 자신을 통해 자녀가 출산 되는 이 상황들을 통하여 그동안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또 라헬을 질투하면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던 자신을 신원하여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남편의 사랑을 간구 했지만, 유다를 낳으면서 자신의 처지를 가장 잘 아시는 분, 나의 약함을 가장 잘 아시는 분, 또 나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실 분, 나를 높이 들어올리실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제 자신의 삶의 포커스를 남편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가는 레아의 모습을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았던 인생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주눅들고, 눈치보면서 살아야만 했던 인생이었을수도 있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통하여 새로운 일을 준비하시고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레아는 경험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의 시작인 3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레아를 굽어보시고 계셨던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하길 원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작고 초라하다고 느낄 때,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그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합시다. 언젠가 내 눈의 눈물을 닦으시고 나를 신원하시고 나를 통해 새일을 행하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나의 의도와 다르게 다른 이에게 어려움과 불편함을 주었던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 일은 어떻게 해결이 되었나요?
질문2.
나의 연약함을 통해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으신가요? 나는 그때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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