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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압살롬의 죽음

by 터틀곽 2023.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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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죽음

(사무엘하 18:16~23)

 

어제의 본문인 18장 상반부에는 압살롬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의 죽음은 누구와 닮아 있는 것을 떠올리실 수가 있는데요. 압살롬은 바로 사울의 죽음과 흡사한 죽음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울과 압살롬의 죽음은 전쟁터에서의 죽음이었습니다. 다만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임을 당했고, 압살롬은 동족인 유다 사람들 곧 아버지의 군대의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어찌보면 더 불쌍한 죽음이 압살롬의 죽음이죠.

 

사울과 압살롬의 비슷한 부분은 또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아름다운 외모였죠. 사울이 처음 기름 부음을 받을 때도 이스라엘에 이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고 할 만큼 키도 훤칠하고 준수한 청년이었습니다. 압살롬도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이며 흠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었죠.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도 있듯이 그들이 가진 외모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만족할만한 외모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준수한 외모와는 다르게 그들의 종말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압살롬은 이미 예루살렘을 정복하였고, 아버지의 후궁들과도 동침하여 다윗의 위상을 떨어뜨렸고, 후새의 계략을 들으니 아버지인 다윗을 잡아 죽이는 것도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경험이 많지 않았던 압살롬과 이스라엘 군인들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도망을 가게 됩니다.

 

이 말씀을 곰곰이 묵상해보면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들인지를 깨닫게 되죠. 압살롬이 아무 생각 없이 그 전장에 나갔겠습니까? 압살롬은 이스라엘로부터 신임을 얻은 사람 아닙니까?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압살롬을 왕으로 인정하고 칭송하였습니다. 아버지 다윗보다 낫다! 라고 말하면서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군대도 있었습니다.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모든 군사를 모아보니 정말 든든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압살롬이 잡고자 했던 다윗은 도망자 신세로 누울 곳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처량한 상태였죠.

 

하지만 실상은 처절한 패배였습니다. 압살롬이 의지했던 그 모든 것들이 압살롬의 목숨을 구원하여 주지 못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를 지탱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나의 건강, 나의 재력,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 이런 것들이 많아지면, 만족감과 평안함을 누리게 되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그것들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그때 내가 의지하던 것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은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들의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세상의 군왕들, 재판관들 높은 지위가 있고 힘이 있는 이들을 향해서 너희가 생각하고 꾸미는 그 일들을 하나님께서 비웃으실 것이다. 그러니 교훈을 받아라.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두려워하여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압살롬은 우스꽝스럽게 비웃음을 살만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합니다. 노새를 타고 다윗의 군대를 피해 도망가다가 노새가 나무 아래로 지나가면서 그 나뭇가지에 압살롬의 머리가 걸리고 노새는 그대로 빠져나갑니다. 머리가 대롱대롱 걸린거죠. 제가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요. 몽골에 단기선교를 갔다가 말을 좀 탔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수풀로 들어가서 달리는데요. 말 위에 타 있으니 말보다 제 상체가 높이 있잖아요. 그런데 말은 그 수풀을 무리 없이 지나쳐 갔는데 저는 수풀과 나뭇가지에 얼굴이 막 긁혔었거든요. 말이 그런 것을 상관 하겠습니까?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말 목을 꼭 붙들어서 겨우 그 수풀 지역을 빠져나온 기억이 있어요.

 

제 생각이지만 압살롬이 전쟁에 나간다고 아주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투구를 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무에 걸려버린 것이죠. 그리고 그 장면을 본 사람에 의해서 요압에게 발각되고 요압과 무기를 든 청년들이 압살롬을 난도질하여 죽이게 됩니다.

 

이제 반역을 일으킨 반역자를 잡았으니 이스라엘 백성과 더는 전쟁할 필요가 없죠. 그래서 요압은 나팔을 불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나무에서 내려서 돌무더기를 쌓습니다. 그런데 본문 18절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죠.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압살롬이 죽기 이전에 자기를 위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그 비석을 세운 이유가 자신의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스스로 자기 이름을 위하여 비석을 만들어 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427절에 보면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성경에는 다말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지만, 아들들의 이름은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을 보아서 아마 이 아들들이 어떤 연고인지는 모르지만 압살롬보다 먼저 죽음을 당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자기 스스로 비석을 세운 것이죠.

 

보통 이 비석은 어떤 대상이 죽은 이후에 그의 후손이 그 선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압살롬이 자기 이름을 이어줄 후손이 없자 스스로 비석을 세워 자신의 명예를 후대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이죠.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압살롬이 얼마나 명예욕에 사로잡힌 존재인지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 놓은 비석은 오히려 그의 수치를 드러내는 비석이 되어버린 것을 성경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에 사독의 아들 아히마하스가 다윗에게가서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을 전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압이 그 일을 말리고 있죠.

 

전쟁이 시작되기 전 다윗은 전장에 나가는 장수인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해서 나를 위해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우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백성들이 다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사무엘 상하를 묵상하면서 알고 있듯이 사울의 죽음을 알리러 온 아말렉 청년과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머리를 들고 온 레갑과 바아나가 다윗 앞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상을 바라고 다윗을 찾아왔지만 오히려 왕의 기름부은 받은 자를 죽였다는 이유로 그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다윗이 간청하여 선대 하라고 하였던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라면 그 소식을 전한자는 반드시 큰 화를 당할 수 있는 것이죠.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요압이 아히마하스를 만류합니다.

 

기쁜 소식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늘이 아니라 다른 날에 이 소식을 전하라고 말하죠. 그러면서 한 구스 사람을 불러서 오늘 일어난 일을 왕께 아뢰라고 말하면서 그를 보냅니다. 구스 사람은 에티오피아 사람인데요. 아마 전쟁에 참전한 용병이나 노예 신분을 가진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요압이 아히마하스를 만류하고 구스 사람을 보내어 그 전쟁의 소식을 알리려 했던 것은 아히마하스가 가서 이 소식을 전한다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사울과 그 아들 이스보셋의 죽음의 소식을 전하러 온 이들도 다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구스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히마하스는 나도 가겠다. 한사코 가겠다고 해서 요압이 그를 보내줍니다. 그리고 아히마하스는 구스 사람보다 먼저 당도하기 위해서 들길로 달려나가 먼저 다윗에게 도착합니다.

 

왜 아히마하스는 이토록 다윗에게 이 전쟁의 소식을 알리려 했을까요? 내일의 본문이지만 그래도 지혜가 있었는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소식에서는 침묵하고 전쟁에서는 승리했다는 사실만을 전하기는 하지만요. 왜 그는 요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승전보를 전하려고 했을까요?

 

정 반대의 경우지만 두 가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먼저는 구스 사람의 솔직한 보고로 인한 왕의 충격을 완화 시키려고 했던 충성심일 수도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압살롬이 죽었다고 보고하지 않고 있거든요. 하지만 다윗이 어느 정도 예견을 할 수 있도록 전쟁에서 승리는 하였다. 라고 보고합니다. 그래서 구스사람 보다 더 빨리 당도하려고 애를 썼던 것이죠.

 

두 번째 이유는 어쨌던 상급을 받고자 했던 욕심 일수도 있습니다. 누구보다 먼저 승전보를 전함으로 인해서 칭찬과 명예와 상급을 받고자 했던 것이죠.

 

하지만 다윗은 이 소식을 들은 이후 그들을 향하여 어떤 상이나 벌도 내리지 않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 아히마하스의 행동이 충심에 가깝지 않은가? 라는 생각입니다. 지금은 초라한 다윗의 상황이지만 다윗의 주변에는 좋은 측근들이 많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압살롬의 초라한 죽음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죽는 과정도 비참하였고 죽음 이후에도 초라한 비석만이 돌무더기 위에 놓여졌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을 정말 안타까워했던 것을 보아 아마 압살롬이 반역을 시행하지 않았더라면, 다윗은 그 왕위를 압살롬에게 물려줄 생각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압살롬의 그 욕망이 스스로 그를 집어 삼키게 되버린 것이죠.

 

우리도 욕망하면서 살아가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가 왕의 자녀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의 혈통은 아니기에 권력을 욕망하며 살아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 각자의 삶에서 우리가 갖고자 하는 누리고자 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직시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욕망이라면 욕망에 사로잡힌 채 멸망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이 될수도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신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해서 달려가는 인생이 되어야 함을 기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나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건강, 가족, , 명예와 같은 것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인가요?

 

질문2.

나는 죽음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나요? 기념비와 비석인가요? 아니면 주를 향한 열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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