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정복
(수 6:1~10)
예전에 중학생 때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영화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는 않습니다. 저는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태양의 눈물이라는 영화일 거라고 기억이 나서 좀 정보를 찾아봤는데요 이게 2003년에 개봉된 영화더라고요. 저 군대에 있을 때 개봉한 영화라서 좀 기억의 왜곡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좀 이상한 고집이 있습니다. 궁금하면 잘 못 참는 성격이 있어서 쓸데없는 일에 목숨을 거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과연 내가 중학생 때 보았던 영화는 무엇인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중학생 시절이었던 1997년부터 혹시 이전에 개봉 했을까 봐 96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들을 리스트 업을 해봤습니다. 일단 전쟁 영화가 아닌 것은 생략하고 전쟁 영화 중에서만 찾아보았는데요.
설교를 쓰기도 바쁜데 이상한 것에 꽂혀서 찾고야 말리라는 심정으로 한 시간을 넘게 영화만 검색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찾았을까요? 못 찾았을까요? 찾았으면 이 질문을 안 드렸겠죠. 정확하게 딱 이 영화야 라고 느껴지는 영화를 못 찾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고 영화의 장면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집념의 한국인이죠. 그때 어떤 장면이 있었지? 하고 생각을 하다가 검색 방법을 바꾸었습니다. ‘90년대 전쟁 영화’라고 검색을 한 다음에 이미지 검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찾아냈는데요.
제가 기억하는 영화는 ‘씬 레드 라인’ 이라는 영화였고요. 2차 세계대전 전쟁 영화였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때 과달카날이라는 호주의 섬을 탈환하는 내용인데요. 당시 조지 클루니, 존 쿠삭, 숀 펜 등 유명한 배우들이 연기를 하였습니다.
제가 왜 이 영화를 기억하냐면요. 그 당시에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느꼈던 그 느낌이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아마 처음으로 접한 전쟁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그 전에도 영화를 보긴 했었지만, 이런 느낌의 영화는 현실을 고증하고 있고, 그 전투 상황들을 정말 실제로 그려내고 있었기 때문에 잔상이 오래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속이 울렁거리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한동안 그 장면들이 기억에 남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느낀 것이 아 절대로 전쟁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면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이잖아요. 우리 가까이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는 없지만 가끔 뉴스로 듣게 되는 그 참혹한 현장을 보게 되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지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이러한 전쟁의 역사가 기록된 내용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출애굽을 하고, 광야를 건너고, 또 요단강을 건넌 후에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벌어지는 첫 번째 전투입니다.
사실 출애굽기 17장에서 아말렉 전투라는 유명한 전쟁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모세의 팔이 올라가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기다가, 팔이 내려가면 이스라엘이 쫓기니까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한쪽씩 잡고 전쟁에 임했던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경험했던 첫 번째 전투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처럼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성을 정복해야 하는 공성전을 펼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경험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여리고까지 나오기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죠. 요단강을 하나님의 은혜로 건너고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아마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의 전개가 요단을 건넌 이후에 오랜 시간을 거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급박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실 어떤 체계나 훈련이나 준비가 된 상황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체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본문 3절부터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리고를 정복하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은 절대로 일반적인 전쟁의 방법이 아닙니다. 당시 여리고는 일명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종려나무는 물이 많은 지역에서만 자란다고 합니다. 곧 여리고 지역은 물이 많은 성읍이었죠. 물이 많다는 것은 풍요로움의 상징이죠. 그래서 여리고는 신석기 때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하고요 성의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고 합니다.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을 많이 겪은 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높은 성벽을 쌓고 항상 전쟁을 대비했던 것이죠. 현대전쟁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의 전쟁 방법은 성벽을 쌓고 방어를 하거나, 성벽을 향해서 공격하여 정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만큼 여리고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것이죠. 정말 치밀하게 병법을 연구해도 점령할 수 없는 성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매일 한 번씩 성을 돌아라.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번 돌아라. 제사장이 일곱이 나팔을 불면서 돌아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그렇다니까 그런가 보다. 라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에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니 무조건 순종하고 나가자. 라고 나갈 수 있었을까요?
좀 어리둥절했겠죠. 좋게 말씀드려서 어리둥절 이지 아마 멘붕에 빠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은 전쟁을 위해 대비하는 모습은 절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칠일동안 돌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번 돌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칠 일동안 성 주변을 돌자 저절로 무너진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지 성을 맴돈 것이 성을 무너뜨린 원동력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에 신기한 능력이 임했다든지 제사장들이 불은 나팔의 진동이 성이 가지고 있는 고유 진동과 맞아 떨어져서 갑자기 성이 무너진 것이 아니란 것이죠.
그렇다면 성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2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성을 맴돌았다고 해도 성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리고 함락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주일학교 때도 듣고요. 요즘은 많이 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교회에서 성극을 참 많이 했거든요. 그때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삼대장이 있었는데요. 크리스마스 때는 빈방 있습니까? 라고 해서 요셉과 마리아 이야기, 또 덩치 큰 청년이 있으면 초등학생을 한 명 껴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그리고 박스로 성벽을 만들어서 이런 여리고 성 내용이 성극의 삼대장이었습니다. 한 번씩 배역을 많아본 경험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성극으로 그치지 않고 약간 이상하게 발전한 모습도 있는데요. 여담으로 들어본 이야기지만 어떤 목사님이 강남에 있는 아파트를 갖고 싶으면 여리고 기도라고 해서 매일 새벽마다 일곱 바퀴씩 돌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부흥회에서 사용되던 단골멘트죠.
실제로 여리고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아파트를 주셨다는 간증은 저는 사실 들어보진 못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대한민국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습니까. 그 아파트 단지가 무너져 내렸겠죠. 말씀대로라면 무너져야 정상 아닌가요? 우스운 것은 말은 여리고 기도라고 가져다 붙이고 그 아파트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비정상적입니다. 정말 말씀대로 응답받고 싶으면 무너지라고 기도를 해야 정상 아닙니까?
이런 비상식적인 기도의 방법이 실제로 있었다는 게 좀 문제죠.
또 비슷한 기도운동이 있는데요. 그것은 일천번제 라는 기도의 방법입니다. 이 일천번제는 천 일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신다는 운동이 한창 있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대전에서 사역했던 교회에서 일천번제로 새벽기도를 하는 분이 계셨어요. 그래서 새벽예배 때마다 536회 일천번제 예물, 다음날에는 537회 일천번제 예물 이렇게 해서 예배에 참석하는 분이 실제로 계셨습니다.
그분의 믿음 자체를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이러한 방법은 성경에서 말하는 방법이 아닐뿐더러 그렇게 천 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자 하는 무언가 업적을 쌓아보고자 하는 자기 의가 더 드러나는 행위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천일을 채우고 응답이 없었다면 그 긴 시간 동안의 자신의 열심이 부정되는 듯한 느낌을 받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내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분이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요. 혹여나 어떤 기도의 응답을 받았더라도. 내가 천 일 동안 기도했더니 응답을 받았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결국은 자기의 의만 높아지는 일이 될 수도 있겠죠. 주변에 기도하는 이들을 향해서 내가 일천번제를 드려봤는데 말이야. 그 정도는 해야 응답될거야 라고 하면서 다른 이들을 정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이와 같은 행위는 미신적인 토속 신앙적인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샤머니즘에 가까운 행위일 것입니다. 게다가 일천번제는 솔로몬이 천마리의 소를 잡아서 한꺼번에 번제를 드렸던 것이 일천번제인데, 이상하게 이 번제할 때의 태울 번 자를 숫자 몇 번 몇 번으로 오해하여서 행하는 사람들이 있던 것이죠.
차라리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과 나만의 믿음의 서원을 드리고 스스로 그 시간을 통해서 개인의 신앙 성장과 하나님과 깊이 있는 사귐을 진정으로 바라면서 온전히 예배로 그 시간과 정성을 다하는 분이 계신다면, 또한 그것은 그것대로 신앙의 열매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의 응답이 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리고가 무너졌던 단 하나의 이유는 2절에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고 하셨던 그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였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 여리고를 주실 것으로 약속하셨으면 손쉽게 ‘자 봐라, 이제 여리고 무너뜨린다 하나, 둘, 셋 무너져라!’라고 말씀하시고 무너뜨리시면 되지 하루에 한 바퀴씩 돌아라. 제사장은 일곱 나팔을 불고 군대는 앞과 뒤로 언약궤를 호위하면서 돌아라. 또 일곱째 날은 일곱 번 돌아라. 이렇게 귀찮은 방법으로 하십니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와 같이 명령하신 뜻이 분명히 있으셨겠죠. 여러 이유가 있으셨겠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순종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제사장은 병역의무를 질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을 돌 때는 가장 앞장서서 그 성을 돌았습니다.
이 뜻은 여리고 전쟁은 물리적인 군사력으로 행하는 전쟁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을 칠 일 동안 돌았습니다. 성을 칠 일간 돌았다는 것은 그 중의 하룻날은 안식일이 포함되어 있었겠죠. 아마 가장 마지막 일곱 바퀴를 돈 날이 안식일이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을 해보게 됩니다만. 어쨌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도 성을 맴돌았습니다.
본래 안식일은 어떤 날인가요? 일체의 일을 금기시한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백성에서 끊어질 것이라는 명령이 담긴 율법의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을 돌았습니다. 한마디로 일을 한 것이죠.
이러한 상황에서 제사장 직분을 가진 이들이, 혹은 레위 지파들이 여호수아에게 나가서 아니 지금 지도자로서 수고를 다 하는 것은 알겠는데요. 안식일에도 성을 돌라니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십니까? 안식일은 쉬어야 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제가 백 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지만 한 95%의 확률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율법을 어길 셈입니까? 라고 말하면서 율법을 더 우선시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죠. 물론 율법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율법보다 더 위에 계신 분이시기에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일이었던 것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이렇게 드려야지요. 기도는 이런 방식으로 해야죠. 헌금과 구제는 이렇게 해야죠. 라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틀을 얼마든지 지켜갈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또 다른 방법으로도 순종할 수 있는 순종의 자세를 가져야만 합니다. 오해하지 마셔야 할 것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순종을 배워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여리고 정복의 방법은 상식을 뛰어넘는 순종을 요구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벽을 쌓고 있는 여리고 성의 주민들은 어떤 훈련을 받아왔을까요? 성을 지키는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활이나 창, 그리고 무거운 돌을 굴리는 방법, 뜨거운 기름에 불을 붙여서 아래로 쏟아내는 방법 등 성을 지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아마 이와 같은 훈련들을 잘 받고 준비된 전쟁 무기와 전투력을 가지고 성을 굳건히 걸어 잠그고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성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방법이 전혀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방법이 전혀 없다면 수비만 하는 곳이 늘 승리하겠죠. 물론 희생은 있겠지만 사다리를 놓고 성벽을 올라가는 방법. 큰 통나무를 이고 성문을 타격하여 성문을 부수는 방법, 성의 높이만큼 토성을 쌓아서 같은 위치에서 공격하는 방법, 그리고 투석기를 제작하여서 큰 돌을 날림으로 성을 직접 타격하여 무너뜨리는 방법 등 공격에도 여러 가지 병법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안전하고 정확도가 있고 승리할 확률이 높은 방법을 선택해서 전쟁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은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고 언약궤 앞뒤로는 군사들이 호위하고 서서 말도 한마디 하지 않고 하루에 한 바퀴씩 행진하여라.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는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 당황했을까요? 아마 여리고 성을 지키던 군사들도 좀 당황했을 것입니다. 첫날이 지나고, 둘째 날도 지나고, 셋째 날쯤 됐을 때는 쟤네들 뭐 하는 거야? 바보 아니야? 라고 했을 것입니다. 넷째 날 똑같은 방법으로 돌고 다섯째 날 돌 때 즈음에 쟤네들은 아무래도 바보인가보다 전군 공격하라! 라고 외쳤으면 성벽을 돌던 이스라엘의 모든 군사와 제사장들과 언약궤는 한순간에 박살이 났을 것입니다. 아마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겠죠.
성벽을 도는 이스라엘 군사들과 제사장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첫날을 돌고서는 휴우 살았다. 라고 생각하고 둘째 날부터 신나게 강강술래를 하는 것처럼 돌았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폭풍전야와 같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그 성벽을 돌았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돌다가 돌이라도 발로 차서 딱 소리가 나면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소심하고 잔뜩 겁을 먹은 마음으로
하루하루 성벽을 돌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들과 제사장들과 언약궤를 맨 이들은 하루하루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 성벽을 돌았을 것입니다. 매일 같이 피가 마르는 두려움을 안고 아마 그 성벽을 돌았을 것이죠.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여리고 성은 한 바퀴 돌 때 조금 무너지고 두 바퀴 돌 때 조금 무너지고, 세 바퀴 돌 때쯤 절반 정도 무너지고 이렇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여섯째 날까지 아무런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도 자신들을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이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그 성벽을 매일 매일 순종하면서 성벽을 돌았습니다. 이러한 행위 자체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믿음의 도전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마음을 드리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그런 분이 안 계시지만 내가 주일날 교회에 못 갈지라도 마음만큼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오랜 시간 동안 나오지 않으신 분들을 심방 하다 보면 듣는 멘트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교회는 못가지만 마음만큼은 함께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음을 드리는 것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때로는 몸은 예배당에 와 있지만, 마음이 다른데 있는 분들도 더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몸이 안 간다고 마음이 절대적으로 올 수 있느냐? 그것도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마음의 문제로 여기고 마음만은 함께한다. 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사실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마음만 함께해도 된다. 라는 말이 최소한의 성의마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로 쓰여집니다. 이것은 좀 문제가 되는 말이죠.
한 가지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기도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이야.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니까. 라고 생각하면서
팔을 자유롭게 흔들면서 두 눈을 뜨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기도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을 드리고 있다고 해서 기도가 잘 될까요? 아니면 소파에 걸터앉아서 엉덩이를 최대한 앞으로 빼고 두 다리를 쩍 벌리고 기도해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마음을 드렸으니까 기도가 잘 될까요?
아니면 반대로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자세가 가장 기도가 잘 될까요? 물론 우리가 무시로 성령 안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는 있지만 깊이 있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 기도의 자세와 환경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제가 고등학생 때 연합 수련회를 간 적이 있는데요. 수련회를 인도하시는 분이 자유롭게 누워서 하나님을 묵상해보자. 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엎드릴 사람은 엎드리고 최대한 편한 자세로 누울 사람은 눕고 조용히 하나님을 묵상하자. 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반주가 잔잔하게 깔리면서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저는 정말 신선한 방법이다. 그래 이렇게도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지. 라고 말하면서 누워서 두 손을 가슴에 공손히 모으고 주님을 조용히 읊조렸습니다. 깊은 묵상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려는 순간 옆에 있던 동생이 저를 툭툭 치면서 형 코 좀 골지 마. 라고 말해서 굉장히 창피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마음을 드린다는 것 정말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이지만, 사실 마음은 몸을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그리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마음만 드린다고, 몸만 드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 2년 사이에 이 코로나가 가져온 엄청난 변화가 있습니다. 바로 온 택트입니다. 학교에서도 온라인 수업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상황이죠.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는 온라인 예배를 송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전 세계 어느 곳에 있더라도 인터넷만 연결되면 어디서든 예배를 볼 수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와 다르게 여겨질 수 있으므로 본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이제는 커피숍에 앉아서 주변의 잡음이 완벽하게 차단되는 잡음 제거가 되는 이어폰만 연결하면 그곳에서 예배 실황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에 앉아 따뜻하고 향기로운 커피 한잔과 함께 갓구운 베이글 빵에 치즈를 잔뜩 발라서 한입 베어 물면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다는 건 어찌 보면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와 그 행위가 예배를 드린다고 여겨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정말 어쩔 수 없는 환경인 분들도 있죠. 격리를 해야 한다든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거나 예배드릴 수 없는 환경에 있는 분들, 어쩔 수 없이 온라인으로밖에 예배를 드릴 수 없는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에게는 이 온라인 예배 송출이 예배 생활을 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이 허락됨에도 불구하고 마음만 드리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른 예배자의 자세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죠.
물론 우리의 행위적인 것들 위에서 말씀드린 여리고 기도나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과 같이 행위에 열심을 다한다고 해서 그것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심령의 상태와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의 고백과 행위가 진실한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씀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여리고 사람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니 우리는 멀찍이 서서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면서 마음만 간절히 바라면 되지 굳이 저 성벽을 하루에 한 번씩 돌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나? 라고 생각했다면 여리고 성은 아마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상식 밖의 일이었고,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두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들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성벽을 돌았기 때문에 성벽이 무너졌던 것이죠.
마지막으로 여리고가 무너진 이후에 라합이라는 여인을 기억하여 그 여인을 구출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왜 이끌어 내라는 말로 번역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꼭 죄인을 이끌어내라! 라는 어감을 가진 것 같지 않나요. 바른 번역은 데리고 오라, 데리고 나오라.가 더 나은 번역이죠.
라합은 누구인가요? 제가 여호수아 강해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나누었던 말씀에 등장한 여인입니다. 기억이 나시나요? 라합을 아시나요.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었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진격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하기 위해 정탐꾼을 보냈을 때 믿음으로 그들을 숨겨준 기생이었던 여인이 바로 라합입니다. 이 라합은 기생이었지만 믿음으로 행했던 행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을 선대 하였고, 또 나아가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까지 올라간 여인이었죠.
여리고 성안에서 하루하루를 지냈던 라합의 삶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죄악이 만연한 그 땅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남몰래 지켜왔던 여인의 믿음으로 인하여 라합뿐만 아니라 23절의 말씀처럼 라합과 그의 부모와 형제와 속한 모든 것이 구원을 받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이 하루하루 그 성벽을 돌 때, 제사장이 부는 나팔 소리가 매일 아침 들려올 때, 라합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이제 하나님의 일하심이 시작될 것이다.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두려움과 설렘으로 기대와 간절한 소망으로 자신을 구원하실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지 않았을까요?
하나님 편에 서는 자, 모든 세상에 악이 만연할지라도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의지하고 붙드는 여리고와 같은 철옹성 같은 것이 나를 지켜줄 것 같지만, 세상의 방법과 방식이 나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줄 것 같지만 이 모든 것들은 나를 구원할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나를 옭아매고 언젠가 하나님의 공력이 임할 때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무너져 버릴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오라 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온전한 순종의 걸음으로 한 발짝 한 발짝 나가고 계신가요? 아니면 여리고와 같은 곳에서 우겨 쌈을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라합처럼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계신가요. 또 아니면 여리고 성벽 위에서 믿음으로 걸어가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들이다. 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가르침들, 새로운 성경 해석들과 철학들과 방법론들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튜브를 켜보면 수만 가지로 쏟아지는 기독교적인 색깔을 가진 가르침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것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진리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우리의 심령에 조명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 순종하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임을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여리고가 내 눈앞에 있을지라도 우리가 주님과 함께한다면 그 성이 무너지던지, 하나님이 우리로 그 성벽을 뛰어넘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믿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여리고라는 큰 성벽을 만났을 때 나의 힘과 방법으로 어찌해볼 수 없었을 때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성을 돌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성을 무너뜨리시고 승리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고 온전한 순종을 드려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고백과 함께 우리를 인도하심을 경험해 나아가는 신앙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우리의 순종이 기쁨 되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는 순종이 되도록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사는 즐거움들을 발견하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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