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가의 꾀
(창 27:1~14)
오늘의 본문은 에서와 야곱의 운명이 갈리는 사건의 발단이 등장하는 본문입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서 늙게 되었고, 이제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기면서 아들들에게 유산과 축복을 이양하려고 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삭은 에서가 첫째로 태어났기 때문에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베풀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에서를 따로 불러서 너를 축복하길 원한다. 그러니 밖에 나가 사냥을 하여 음식을 만들어 오너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 이삭과 에서가 나눈 대화의 내용을 리브가가 엿듣죠. 그리고 가서 즉시 야곱을 불러 내가 요리를 만들테니 에서가 받아야 할 복을 너가 받아서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렇게 거짓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형은 털이 많은 사람이고 나는 털이 없이 매끈한 사람인데 아버지가 나를 만졌다가 오히려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말하는데요. 리브가는 그 저주는 내가 받을 테니 어서 염소새끼를 잡아오라고 말합니다.
이삭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리브가가 제일 잘 알고 있었겠죠. 리브가는 야곱을 위해서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주어 야곱에게 축복이 임하도록 꾀를 내는 장면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와같은 일이 벌어진 최초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서와 야곱이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미리 리브가에게 해주신 예언을 통하여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에 대해서 알려주셨었죠.
아마 리브가는 이 말씀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이 말씀을 리브가가 자신의 방법과 꾀를 통하여 이루려고 했던 것이 문제를 발생시켰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또 아브라함의 여정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임하시고 너를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자신의 여종이었던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들여보내서 이스마엘을 낳게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자신의 생각과 방법대로 이루려고 했던 사라와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라는 자녀를 낳게 되었지만 그 과정 가운데서 순탄치 않은 여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는 이스마엘과 하갈은 이삭이 태어난 이후에 그 가정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사람의 생각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던 그들의 성급함과 오만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볼 수 있는 장면이죠.
그런데 리브가도 이와 비슷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네 뱃속에 두 민족이 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분명히 주셨습니다만, 이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망각한 행동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예언을 자기 힘으로 이루고자 하는 거짓된 술수를 쓰고 있는 것이죠.
본래 당시 문화권에서는 가문의 장자권을 이양할 때는 온 가족이 모여서 축복과 축제의 장을 만들어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가족과 일가 친척들이 아 저 가문의 대를 잇는 사람은 저 사람이구나 라고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죠.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당시 문화가 씨족사회 문화이고 족장들의 사회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가문의 족장이 누구인지를 공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였던 것이죠.
하지만 이삭은 에서를 조용히 따로 불러내서 그 축복권을 에서에게 몰래 이양하고자 하였습니다. 아내에게도 숨기고 작은 아들인 야곱에게도 숨긴채 비밀리에 이 일을 진행하려고 했던 것이죠. 하지만 모든 비밀을 다 감출 수 없듯이 그 내용을 리브가가 듣게 됩니다.
에서와 야곱은 기질과 체격이 다르기는 했었지만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이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으니 거의 동시에 태어난 것과 다름이 없죠.
학창시절에 보면 가끔 쌍둥이들이 학교에 같이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종종 쌍둥이를 보게 되죠. 일란성 쌍둥이도 그렇게 이란성 쌍둥이도 있고 그렇습니다. 본문의 에서와 야곱은 이란성 쌍둥이죠. 그런데 쌍둥이의 특징이 있는데요. 쌍둥이 중에 형은 죽어도 형으로 대접을 받으려고 기를 쓰고요. 또 쌍둥이 중의 동생은 쌍둥이 형을 죽어도 형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 다 이해가 갑니다만 그래도 더 억울한 쪽은 늘 동생입니다. 짧게는 몇 초에서 길게는 몇 분 정도 일찍 태어났다고 바득바득 형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쌍둥이 형을 보면 너무 억울한거죠.
자라면서도 무한 경쟁 구도 아래서 자라납니다. 얼마나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겠어요. 동생은 형을 이기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할 것이고, 형은 동생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학창시절에 보면 사이가 좋은 쌍둥이는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맨날 싸우더라고요. 아마 에서와 야곱도 이렇게 경쟁하면서 자라왔겠죠. 야곱이 에서에게 팥죽을 내밀면서 장자권을 요구했던 것도 아마 쌍둥이 형에게 동생 대우를 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장자권을 사야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왜 몰래 에서를 불러서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했을까요? 이러한 에서와 야곱의 갈등의 관계를 알았을 수도 있음이고,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에서를 더욱 사랑했기 때문일 수도 있죠.
하지만 이삭이 망각했던 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리브가의 태중에서 그 둘이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가정 아래서 이 말씀을 어떻게 성취해갈 것인지를 충분히 기도하고 상의하고 이해하도록 도왔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장자로 태어난 에서에게는 그 말씀이 받아들이기 힘들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을 찾아가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였던 이삭은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럽게 에서에게만 장자의 축복을 내려주려고 했었고, 때마침 그 말을 들은 리브가는 자신의 방법대로 이삭을 속여 야곱에게 그 축복을 받게 하려고 거짓 계략을 꾸몄습니다.
에서는 순간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고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그 장자권을 팔아넘겼고.또 이방 여인들과 혼인을 함으로 이삭과 리브가에게 근심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형과 경쟁하여 야비한 방법으로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사왔으며 또 엄마의 말대로 형의 축복을 가로채는데 동의하였습니다.
사랑과 신뢰와 축복이 넘쳐나야 하는 한 가정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거짓을 말하고 속이는 그런 가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만약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삭과 리브가가 하나님의 예언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했다면, 하나님께서 그 가정 가운데 찾아와 주셔서 에서에게도 복을 주시고 또 새로운 살길을 열어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때로는 내가 생각한 것들이 더 지혜롭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생각과 방법대로 일을 진행해 나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의 삶에서 어떤 예언적인 말씀이 임해서 그 말씀을 성취해 나가야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감동하시고 감화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은 관심이라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많이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관심이 쏟아지죠. 그리고 관심을 쏟는다는 것은 주의 집중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리고 선한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스스로 나를 돌아보고 점검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 이후에 나오는 구절이지만 결론적으로는 야곱이 에서의 복을 빼앗아 그가 장자가 받아야 할 복을 가로채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야곱은 에서의 낯을 피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먼 땅으로 도망가서 그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수고하고 괴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어머니 리브가도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을 멀리 떠나보내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 아들을 한번 안아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슬픔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주권을 내어드리는 믿음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개척해 나아가는 열심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수고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나의 열심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쪽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돌아보는 여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삶의 바른 방향을 위해서, 또 우리에게 맡겨주신 청지기로서의 삶의 여정을 잘 완수하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나의 삶의 방향성은 하나님을 향하여 바르게 고정되어 있나요? 나는 내 삶을 하나님께로 고정하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한 적이 있나요?
질문2.
나의 가정은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으로 연합되어 있나요?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서운함과 불편함을 내비치고 있지는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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