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신 예수
(눅 23:26~32)
오늘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오르시면서 예수님을 따라오는 이들을 향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담긴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에는 시골에서 온 구레네 사람 시몬이 등장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시몬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십자가를 지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시몬을 억지로 붙들어 그 십자가를 지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억지로 지게 했다는 것은 시몬의 자발적인 요청으로 인해 십자가를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죠. 아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인데 로마 군인이 갑자기 자기를 불러서 십자가를 대신 지라고 해서 얼떨결에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네게 억지로 오리를 가자 하거든 십리를 가주어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요. 이 말씀의 배경은 사실 로마 군인들에게 있습니다. 당시의 로마 군인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로마 군인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누구든지 즉각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규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규정을 이용해서 시몬을 불러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도록 명령한 것이죠. 시몬은 예수님이 가엽고 불쌍해서가 아니라 로마 군인에 의해 억지로 그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로마 군인이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한 또 다른 의도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채찍질을 하고 놓아주었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채찍은 우리가 아는대로 날카로운 동물의 뼛조각이나 쇠붙이를 붙여놓아 살이 찢기는 형태의 채찍이었습니다. 채찍에 맞음으로 인하여서도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고통스러운 형벌 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채찍에 맞으셨고 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셔야 했습니다. 이미 채찍에 맞아 살갗이 찢어지고 모든 기력을 상실한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메고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군인들은 시몬을 데려다가 십자가를 지게하고 예수님을 잠시 편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데 이것은 배려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기 전에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하기에 잠시 예수님을 쉬게 하였던 것이죠.
모든 기력이 다하고 만신창이가 된 육신을 이끌고 숨을 헐떡이면서 언덕을 올라가는 예수님을 따라 그 뒤에 많은 무리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27절인데요.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공개처형입니다. 방법이 잔인하여 지극히 흉악한 죄인에게만 행하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처형된 자를 위해서 공개적으로 애도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오히려 여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앞에서 슬퍼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 형벌을 공개적으로 애도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어떻게 여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서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을 것일까요? 여인들, 노인, 아이들, 과부, 고아들은 성경에서도 약자로 분류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득권이 아니라 소외되고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로 분류되는 사람들이었었죠.
예수님은 늘 이런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27절에 기록된 큰 무리는 아마 여인들과 함께 과부와 고아들 세리들 창녀들 예수님을 통해 치유받은 문둥병자들, 소경과 농아들이었을 것입니다. 늘 소외 받고 인정받지 못했던 이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28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는 많은 여인이 따라오기에 딸이라는 단어 자체가 여인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음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성경에 많은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을 딸과 여자로 혹은 '시온의 딸'로 묘사한 점으로 보아 넓게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이신데요. 이는 두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은 이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이 예수님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는 구원의 길이 됨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만류나 정을 통해서 내려놓거나 비켜갈 수 없는 쓴 잔임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죠. 그 십자가는 인류 구원을 위한 필연적인 길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애통해야 하는 대상이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십니다. 애통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죄악으로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대상이라는 말씀이시죠. 참으로 가슴을 치고 애통해야 할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무지함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29절부터 31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있다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이 있다는 말씀은 본래 축복의 말씀이죠. 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지 아니합니다.
본래 다산, 많은 자녀를 낳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은 당시에는 부정할 수 없는 가치관이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수태하지 못하고, 젖 먹이지 못하는 여인들은 멸시를 당하고 저주를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죠.
하지만 예수께서는 오히려 아이가 없는 이들이 복이 있다. 잉태하지 못하고 해산하지 못하고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원래대로라면 이러한 상황 자체가 저주인데 오히려 그러한 여인들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왜냐면 심판에 날이 이를 때에 임산부, 또 젖을 먹이는 여인과 영아들은 그 심판을 견딜 수 없는 연약한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있기에 도망하기도 힘들고 피하거나 숨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러지 않은 이들이 오히려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30절에서는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심판과 저주의 날에 그 심판을 받는 자들이 그날의 고통이 너무 크고 감당할 수 없어 차라리 산이 무너져 죽임을 당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심히 두려운 심판의 날이 임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31절에서의 푸른 나무와 마른 나무는 이스라엘의 속담입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푸른나무에 불이 붙었다면, 마른 나무는 얼마나 불에 더 잘 타겠는가?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불이 생나무 보다 마른 나무에 더 파괴적으로 작용하듯이 그 심판을 당하는 이들은 마른 나무처럼 그 심판이 임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날을 감당해야 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주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죄악에서 돌이켜 이 심판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마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그 보혈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은 이들에게 새롭고 산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무지하여 심판과 저주의 날을 감당해야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아니하고 그날이 다가올 때 영광의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질문1.
때로 내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는 억지로라도 져야만 하는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아니면 버려두겠습니까?
질문2.
내가 가슴을 치고 애통하며 울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나는 나와 나의 자녀들을 향하여 애통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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