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의 두 렙돈
(눅21:1~9)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말씀임과 동시에, 받아들이기에 조금은 부담스러운 구절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어찌보면 두 개의 사건으로 분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지만 사실 연속선상에 있는 말씀이기도 한데요. 오늘은 두가 지 장면이 등장합니다. 첫째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는 장면과, 성전의 종말이 이를 것에 관한 내용을 이야기하십니다.
첫 번째로 오늘의 본문 1절에서 4절까지는 헌금에 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두 부류의 사람이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인데요. 먼저 부자들이 등장하고 또 가난한 과부가 등장하죠.
본문을 살펴보면 부자들이 얼마의 금액을 헌금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과부는 두 렙돈의 금액을 헌금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학자마다 주장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이 두 렙돈은 아주 작은 가치의 동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64분의 1데나리온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어떤 사람들은 300분의 1데나리온이라고도 합니다.
계산을 해보면 현재로는 한 삼백 원에서 천오백 원 사이의 금액 정도 되는 금액이 이 두 렙돈의 가치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헌금할 때는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가, 가난한 과부가 이 작은 가치의 동전 두 개를 헌금함에 넣는 것을 보시고는 제자들에게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은 헌금을 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 이유가 4절에 나오는데요.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들은 얼마 정도를 했을까요? 아무래도 두 렙돈 보다는 많은 금액을 했겠죠. 한 데나리온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가장 많은 헌금을 드린 이가 바로 가난한 과부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람들의 시선은 화폐의 단위, 드린 금액의 많고 적음에 대해서 집중하게 됩니다. 만약 어떤 부자가 100만 원의 헌금을 드렸다면, 와 정말 대단하다. 많이 드렸다. 라고 생각하게 되고 어떤 사람이 500원의 헌금을 드리면 뭐야? 저것도 헌금이라고 가져왔나? 라고 생각할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과부는 작은 두 렙돈을 드렸지만, 이 금액은 과부가 가진 생활비 전부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가치와 무게를 다르게 판단하신 것이죠.
어떤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그 적은 금액의 헌금은 누군가에게는 라면 한 봉지 정도의 값어치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누군가에게는 일생의 마지막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정말 큰 가치의 값어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말씀 이후에 왜 우리가 생각하는 결론이 등장하지 않는가에 대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간증 집회를 듣다 보면 이런 부류의 간증을 많이 듣기 때문인데요. 어떤 사람이 정말 집도 팔고 차도 팔고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드렸더니 나중에 몇 배가 되는 금액을 보상받았다. 이처럼 믿음으로 드리면 하나님께서 다 보상해주신다. 라는 보상에 관한 간증을 한 두 번 들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많이 들었었고요.
그래서 이 말씀 뒤에 갑자기 그 과부가 복을 받아서 엄청난 부호가 되었다는 구절이 등장하면 뭔가 나도 한번 헌신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예가 될 텐데 그런 구절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후에 과부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 말씀은 이대로 끝이 납니다. 구약성경에 비슷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열왕기상 17장 말씀인데요.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는데요. 사르밧에 가면 과부가 있을 것인데 음식을 달라 하면 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말씀에 순종해서 사르밧에 있는 과부에게 갑니다. 과부에게 가서 내가 먹을 떡을 좀 해오시오. 라고 말하자 과부가 내게는 떡은 없고 다만 통에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조금이 있는데 이걸로 하나뿐인 아들과 음식을 해 먹고 죽으려고 한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내 주머니에 얼마의 돈이 있으니 이 돈을 가지고 밀가루도 좀 더 사시고 힘을 내서 더 사시길 바랍니다. 라고 하는 게 일반적인 상식인데, 엘리야는 두려워 말고 그 밀가루로 나한테 먼저 떡을 만들어 오고 그 이후에 너와 내 아들의 음식을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
이후에 말씀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이 가뭄을 끝내시는 날까지 통에 가루가 끊이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상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순종에 대한 말씀을 묵상하곤 합니다.
이것처럼 오늘의 본문에서도 이 과부가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으로 드렸으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뭔가 보상과 은혜가 임하면 좋을 텐데 그런 것이 없이, 그저 헌금을 드렸다. 라는 말씀으로 그냥 끝이 나버립니다.
보상에 대한 말씀이 없다는 말씀이죠. 사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본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실 어떤 보상을 바라는 대가를 바라는 헌신은 헌신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보상이 있을 것이라 믿고 드리는 모든 헌신과 헌금은 헌신이 될 수 없고 헌금이 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보상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무당에게 무속인들에게 복채를 주고 점괘를 물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많은 돈을 내고 점괘를 물어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내가 언제쯤 많은 돈을 버는가, 나는 사업이 잘 되거나 장가를 가거나 승진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보상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돈을 내는 것이죠.
우리가 드리는 연보와 헌금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많은 헌신을 드리고 물질을 드린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말라기에서 십일조에 대한 축복의 말씀이 등장하기는 합니다만, 이 말씀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섬기는데 관한 말씀이라 조금 성격이 다른 부분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과부의 온전한 헌신이 드려짐을 통해 그 과부의 헌신과 믿음을 높이 사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각 사람에게 기쁨과 헌신으로 다가오기보다는 많은 부담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과부가 열과 성을 다해서 드린 그 금액이 재산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내가 가진 전 재산이 단돈 오백 원이나 혹은 천원뿐이라면 그 금액을 다 드리는 것에 큰 부담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백 원이든 천원이든 있건 없건 큰 차이가 나는 금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금액이 천만 원 오천만 원 일억 원 십억 원 이렇게 올라가면 굉장히 부담이 됩니다.
부자는 얼마의 헌금을 드렸을까요? 금액의 액수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이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쫓으라 하신다면, 진짜 내가 가진 것을 다 팔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분이 계실까요? 아마 많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극단적인 헌신을 요구하거나 우리를 시험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물질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마음가짐을 확실하게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담긴 가치를 옳음으로 인정하고 그 말씀의 가치를 내 영혼에 새기고 그 말씀 안에 살아가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넘어가서 오늘 본문 5절 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
제가 조금 전 오늘의 본문은 두 가지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연결되는 장면이라고 말씀드렸었는데요.
5절과 6절을 보면 성전을 보면서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며진 것을 자랑스럽게 예수님께 말하지만, 예수님은 날이 이르면 이 성전이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은 아마 21장 상반부에 등장하는 부자들을 통해 지어졌을 것입니다. 성전 건물은 그렇게 사람들의 손을 통하여 지어지고 세워졌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은 무너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을 통해 사흘 만에 이 성전을 다시 일으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친히 성전이 되어주실 것이며 동시에 과부가 드린 아주 작은 두렙돈의 헌금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는 믿음의 고백들 위에 세워질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영적인 세계는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초월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셈과 가치를 초월하는 세계입니다. 이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의 한계를 넘지 못한 채 세상의 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가이사의 얼굴이 그려진 화폐는 세상에서는 위력을 과시하고 가치를 인정받을만한 힘이었겠지만, 지극히 작은 보잘것없었던 두 렙돈의 푼돈은 금액은 작을지라도 자신의 삶을 모두 드린 믿음의 고백이 되었고 그 온전한 헌신은 참된 성전을 다시 세우는 믿음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이 땅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물질의 많고 적음이 아닌 믿음의 많고 적음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질문 1.
내가 드리는 헌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될 수 있을까요? 나의 믿음은 체면을 위한 믿음인가요? 온전한 믿음인가요?
질문2.
나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나요?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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