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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열정을 담은 믿음

by 터틀곽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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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을 담은 믿음

( 2:3~12)

 

여러분은 열정이라는 단어를 들으신다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열정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 그 뜻입니다. 여러분은 살아오시면서 가장 열정적이었던 때를 기억하시나요?

 

저도 불타는 열정을 가졌던 때가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언제가 가장 열정적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때는 아주 열정적으로 자전거를 탔습니다. 하루에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쉬지 않고 자전거를 탔던 기억도 나고요. 또 고등학교 때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웠었는데 자격증을 딸 때까지 너무 재밌어서 밤을 새워서 코딩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지금은 다 까먹었지만요. 연애할 때도 열정적으로 했습니다. 여자친구 집 앞에 차를 대놓고 기름값이 아까워서 시동도 못 켜고 밤새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리다가 아침에 여자친구를 만나는 일도 했던 것 같습니다. 열정적이죠?

 

열정 하면 또 우리가 생각나는 시가 있죠. 안도현 시인이 쓴 너에게 묻는다. 라는 시입니다. 이런 시구가 있죠.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 데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라는 시구가 있습니다. 본래의 시는 더 긴데요. 이 짧은 구절에도 많은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죠.

 

연탄 한 장을 태우는데 보통 3~4시간 걸리는 것 같아요. 저도 어렸을 때 연탄을 때는 집에서 살았었는데요. 밤에 연탄이 꺼지면 아버지가 추운 겨울날 밖에 나가 번개탄에 불을 붙이고 다시 연탄에 불을 피우시던 기억이 납니다. 연탄을 안 꺼뜨리려면 잠들기 전 불이 붙어있는 연탄 한 장 위에 새 연탄 두 장을 꼭 넣어야 하고요. 그리고 바람구멍 조절을 잘 해서 공기가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도록 미세하게 조절을 잘 해줘야만 연탄이 밤새 탈 수가 있습니다.

 

연탄을 버리는 건 제가 많이 했었는데요. 밤새 태워져서 색깔이 하얗게 변한 연탄을 아버지가 꺼내주시면 연탄집게로 연탄을 집고 나가서 대문 밖에 쌓아두곤 했습니다. 안 떨어뜨리려고 집게로 연탄을 너무 꽉 잡으면 연탄이 바스러져서 혼났던 기억도 있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하얗게 타버린 연탄재가 쓸모없는 것이라고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는 것입니다. 연탄도 그렇고, 촛불도 그렇고 다 열정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단어들입니다. 왜 연탄이나 촛불이 열정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첫 번째로는 불을 사용하는 것이 이유가 될 것 같고요, 두 번째로는 자신을 태움으로 희생한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이 열정이라는 단어가 영어로는 passion. 이라는 단어로 쓰입니다. 그런데 이 passion이라는 뜻은 라틴어 pasio에서 나온 말인데요. 이 뜻은 본래 아픔, 고통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The Passion은 보통 그리스도의 수난, 예수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기까지 겪은 고통과 수난을 뜻하기도 하죠. 여러분도 한 번쯤은 다 보셨겠지만,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멜 깁슨이 제작한 그리스도의 수난의 영어 제목도 The passion of Christ이죠.

 

그런데 이 passion이라는 단어는 14세기를 넘어서 고통, 아픔이라는 단어에서 감정과 욕구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면서 열정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고통과 아픔이 가진 느낌과, 뜨거운 애정과 열중하는 마음이 가진 느낌이 서로 공통된 느낌을 준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너무 사랑하는 남녀가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모든 역경과 고난과 고통을 뚫고 그 사랑의 결실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확증하기 위해서 모든 수치과 고난과 고통을 감내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 이 두 상황이 열정이라는 의미로 담겨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면 이러한 열정이 담긴 믿음의 행동이 등장하는데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 3절의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한 중풍 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서 예수님께 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 전 구절인 2절에 보면 그 당시 상황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마가복음 1장에 하반부에는 예수님이 벌써 많은 사역을 진행하셨음을 볼 수 있는데요. 귀신도 쫓아내시고, 병든 사람도 고치시고 많은 사역을 이미 진행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 사역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죠. 2장에서도 예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지역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리자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가득 모여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풍 병자에게도 이 소식이 들렸던 것이죠. 두 가지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이라는 분이 계신 데 이 분이 많은 병자를 고치신다더라. 라는 소문과 그리고 그분이 지금 내가 사는 가버나움에 오셨다. 라는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자 사람들이 중풍 병자를 네 사람이 매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중풍 병자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니 네 명이 함께 간이 들것을 만들어서 왔겠죠. 하지만, 이미 문 앞까지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조차 어려웠을 것입니다.

 

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사람이 많아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머무르셨던 곳의 지붕을 뜯어내 버리고 중풍 병자가 누워있던 그 간이침대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이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엄청난 믿음의 도전, 믿음의 열정으로 보일 수 있으실 텐데요. 그건 우리가 이미 이 말씀의 결론을 다 알기 때문에 그렇고요.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상식 밖의 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일단 무리가 너무 많고 들어갈 수조차 없는 상황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상식적으로는 기다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나요?

예수님의 가르침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지, 그래서 사람들이 좀 돌아가서 여유가 생긴 이후에 들어가던지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 집이 중풍 병자 본인의 집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약 중풍 병자 본인의 집이었으면 내가 여기 집주인이니까 비키시오! 하고 들어갔으면 될 텐데요. 그러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니 이미 많은 사람이 그곳에 장사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간 이들이 취했던 행동은 또 비상식적인 행동이었는데요. 바로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석회암이 많은 곳이라 주로 돌로 집을 지었습니다. 석회암으로 된 돌을 잘 깎아서 쌓고 지붕은 돌로 얹을 수가 없어서 종려나무 가지 등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잔가지들과 진흙과 지푸라기를 섞어서 평평하게 지붕을 만드는 것이죠. 나무로 대충 뼈대를 잡고 그 위에 비를 막을만한 지푸라기 같은 재료들을 사용해서 얹은 그런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지붕을 뜯었다는 것은 기술을 가지고 정교하게 어느 한 부분을 정확하게 떼어낸 것이 아니라는 거죠. 당연히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일단 지푸라기와 진흙으로 얹어낸 윗 지붕을 뜯어내고 사람을 달아 내려야 하므로 대들보도 들어내야 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남의 집을 망가뜨려 버린 것이죠.

 

그 아래에 있던 사람들에겐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갑자기 위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고 먼지와 지푸라기 굳어진 진흙 가루들이 머리 위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더니 지붕도 들어내고 대들보도 들어내고 갑자기 간이 들것에 사람 하나가 매달려 내려오고 있으니 이게 웬 소동이겠습니까.

 

갑자기 지금 누군가가 여러분의 집의 천장을 뜯어내고 사람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경찰에 신고하고 난리가 나지 않았겠어요? 그런 막무가내인 상황을 이들이 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자 5절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라고 기록이 되어있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그들은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들은 중풍 병자를 데려온 네 명의 사람들입니다. 이 네 명의 인물이 중풍병자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가족인지, 친척들인지 아니면 친구들인지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중풍병을 앓고 있었던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네 명의 친지 혹은 친구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중풍 병자를 예수께 데려왔을까요?

 

저는 두 가지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이 중풍 병자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친구나 친지들을 향해서 이보게 내가 예수의 소식을 들었네. 내가 예수를 만난다면, 나의 이 중풍병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나?’라는 질문을 했다는 것과

 

두 번째는 중풍 병자를 잘 알고 있는 친구들 혹은 친지들이 우리가 이 사람을 예수께 데려가자. 예수님이라면 분명히 이 사람을 고칠 수 있을 거야.’라는 추측입니다.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이 정답일까요? 저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후자 쪽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두 가지 정도의 이유 때문인데요.

 

첫 번째로는 이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열심과 열정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의 부탁으로 인해서 이러한 일을 행했다면 지붕을 뜯을만한 이러한 무모한 짓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만약 누군가 저와 여러분에게 저기 내가 어떤 의사를 좀 만나야 하는데 그분을 보려면 예약이 너무 밀려있어. 그런데 내가 꼭 그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나를 업고 가서 병원의 창문을 뜯어내고 나를 그 의사에게 좀 데려다줄 수 있을까?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창문을 뜯어내겠어. 미친 사람 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 아니면 기물파손죄로 경찰에 잡혀갈 수도 있어. 다른 병원에 다른 의사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라고 말하면서 다른 대안을 찾거나 불가능하다고 못할 것 같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만약에 성경에서 이 네 사람에 대한 배경이 그 부모라든지 그 자녀였다면 얘기가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쉽지 않은 선택일 것이죠. 아마 그들이 부모거나 자녀들이었다면 성경에서 기록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네 사람은 그렇지 않았죠. 그들은 거리낌 없이 그 중풍 병자를 매고 그 많은 인파를 헤쳐 나갔을 것입니다. 지붕에 올라가려고 해도 사람들 틈을 비집고 올라가든지 아니면 뒤편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사다리를 사용했던지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한 사람을 지붕 위로 올린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저 없이 지붕을 뜯었습니다. 집주인이 누구인지 친한 사람인지 친척인지 아니면 진짜 생판 모르는 남의 집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어떤 소란과 비방과 욕설을 들을지 그들은 아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상식적이지 않은 일반적이지 않은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저 없이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님 앞에 기어코 이 중풍 병자를 데려다 놓았습니다.

 

두 번째로는 성경에서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5절에 기록된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 라고 기록이 되어있죠.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위에서 설명해 드린 네 사람의 행위의 결과를 입증하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에 중풍 병자 본인이 그 네 명의 사람에게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를 만나야겠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나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달라. 지붕을 뜯어내든 벽을 허물든 모든 방법을 동원해 달라. 라고 요청하였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아니라 그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셨다.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이 네 사람은 최선을 다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열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이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았습니다.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이 중풍 병자를 고쳐주실 것을 간절히 기대하면서 놀라운 기적과 이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답변을 해주시지 않습니다. 지붕을 뜯어낸 이들이 듣고 싶었던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병 고침을 받았으니 일어나 집으로 가라. 이것이 아니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시죠.

 

중풍 병자도, 그를 데려온 네 명의 사람들도 의아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우리는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이런 소동과 소란을 욕먹을 것을 감수하고까지 이런 일을 행했는데 죄 사함이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치유되었다. 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 사함을 받았다. 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중풍 병자에게, 또 그 네 사람에게,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또 서기관들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가르쳐주시고자 하셨던 것이죠.

 

 

사람들이 집중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란 분이 계신 데 그분이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고치고 하신데 라고 하면서 놀라운 기적을 보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기 위해서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는가 확인하고 싶어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심지어 중풍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그의 친구들은 지붕까지 뜯어내는 열정을 가지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셨던 것이죠. 바로 예수님 자신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 시키실 주님이심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서기관들은 중풍 병자를 향해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예수님을 보며 신성모독을 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할 수 있겠느냐 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생각을 아시고는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중풍 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의 이런 질문은 서기관들을 당황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치유되었다는 말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운가에 대한 답변을 생각해내야만 했습니다.

 

어느 것이 쉬웠겠습니까? 병 고침과 죄 사함 그 어떤 것도 쉬운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었다면 병 고치는 것이 쉽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지금 고도로 발달한 의학으로도 못고치는 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코로나라고 하는 바이러스 앞에 너무나 연약한 존재들이죠.

 

그렇다면 죄 사함은 쉬운 일일까요?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렇기에 죄인이 누구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그런 존재는 없습니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으로서 인류의 죄악을 사하실 수 있는 분이시죠.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살펴보면, 중풍병, 한센병,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열병 등을 고치시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특별히 나병으로 불리는 한센병자와 중풍병자는 성경에 좀 더 자주 등장하죠. 이유는 이러한 질병들이 신의 저주를 받아서 생겼다는 사회적, 종교적인 풍토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징벌하실 때 때때로 질병을 통해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한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병에 걸린 이들 특히 문둥병이나 중풍병, 혹은 열병과 같은 어떤 인과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질병들에 대해서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주장을 하곤 했습니다. 당시는 의학이 우리가 사는 시대처럼 고도로 발달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질병을 종교적인 관점으로 신의 진노로 해석하는 경향이 빈번했었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는 것 그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사실. 바로 자신이 병 고침 뿐만 아니라 모든 죄에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는, 죄를 사하여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무엇이 더 쉽겠느냐? 라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은 병 고침 뿐만 아니라 죄를 사하는 능력이 예수님 자신에게 있음을 예수께서 곧 하나님의 본체 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길 원하는데요.

우리의 모든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정적으로 열심을 내고 지붕을 뜯어낼 만한 열정이 있다고 해도, 그 열정이 쏟아지는 곳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헛된 열심이 되어버립니다.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열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대상을 향한 열렬한 애정과 열중하는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누구여야 하는가를 바르게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병을 고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셔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초점이 없이 그저 에너지를 쏟아내고, 다른 목적과 목표를 위해 믿음의 영역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바른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헛된 우물을 파는 것과 같습니다. 생수가 없는 곡괭이 질의 끝은 결국 탈진과 허망함 밖에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열정을 다하여 달려가는 목표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 오라교회 공동체는 새로운 교회 건축을 향하여 열심히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제 시공사 선정이 완료되면 곧 공사를 시작할 수 있는 단계의 직전까지 다다르고 있는 것이죠.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건물을 부수는 열정을 보였지만 우리는 건물을 지어야 하는 열정이 필요한 상황인데요. 중요한 것은 교회를 건축하는 우리의 열정의 초점이 예수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건축을 진행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지금의 성전이 많이 낡고 부대시설이 없어서 인가요? 다른 사람들이 건축을 해야 한다고 말해서 인가요? 깨끗하게 새로운 건물을 지으면 많은 사람이 교회로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가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회 건축을 진행하는 이유는 더 좋은 건물과 더 쾌적한 시설에서 편안하게 예배하기 위해서 건축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를 기뻐하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 거룩한 부르심 앞에 헌신하고자 결단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향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해주어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명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 사명과 가르침을 위해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죠. 우리는 모두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건축이라는 이 단계를 거침으로 위의 사명을 더욱 잘 감당하기 위해서 이 건축을 진행해 나가고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건축을 향한 우리의 열정, 교회를 사랑하는 우리의 열정 안에는 반드시 예수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셔야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을 향한 온전한 충성과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이 모든 노력은 사실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병을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중풍병자는, 그 친구들은 참된 자유를 맛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만난 예수님은 마음의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죄를 사하시며 모든 질병과 압제에서 자유롭게 하실 참된 진리셨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을 향하여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들은 건물을 뜯어내는 믿음의 열정을 통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듯이 우리는 건물을 세우는 믿음의 열정을 통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멀리 서서 구경만 하는 무리나 구경꾼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하여 담대하게 지붕을 뜯어냈던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우리의 믿음을 기쁘게 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믿음 안에 주님을 향한 열정을 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믿음과 삶을 주님 앞에 드리기를 기뻐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작고 연약한 믿음이지만 이 믿음 안에 주님을 향한 열정을 담게 하시고,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우리가 건축을 위하여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우리 모든 교회 지체들이 한마음이 되어 믿음으로 연합되게 하시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며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 고백하며 나아가는 지체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함께 예배하지 못하는 지체들, 또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지체들을 기억하여 주시고 속히 회복되어 모두 주님 앞에 나와 함께 예배하는 날이 속히 오도록 은혜 베풀어 주옵소서. 이 모든 일을 속히 이루실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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