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지헤로운 사람인가?
(전 8:1~8)
우리가 12월은 전도서를 매일 묵상하고 있는데요. 전도서는 지혜를 다루는 책이죠. 계속해서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자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책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어제 보았던 7장에 대한 결론으로 볼 수도 있고, 또 왕 앞에서 처신해야 하는 조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의 전후 문맥을 비춰볼 때 오늘의 본문 특히 8장 전반부의 내용은 지혜를 발견하지 못한 전도자의 좌절을 고백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전도자는 오늘 1절의 말씀에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깨달았는가? 라는 큰 담론을 던지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또 다시 지혜라는 영역을 묵상하도록 만듭니다.
그중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물의 이치’ 라고 하는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이 이치라고 번역된 ‘페쉐르’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다니엘서와 전도서에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페쉐르’의 사전적인 의미는 ‘해석’입니다.
곧 꿈이나 수수께께를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 글을 읽고 해석하는 것과 관련된 말이 ‘페쉐르’입니다.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한 것을 통해서 지혜자로 불렸던 것처럼 전도자는 사물의 이치, 사물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전도자는 자신이 지혜자의 집단에 소속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물의 이치를 온전히 깨닫지 못함을 탄식하면서 독자들도 이에 동참하도록 이와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죠.
전도서를 읽다 보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헷갈리는 경우를 종종 마주합니다. 인생이란 원래 허무한거야. 라고 허무함을 말하다가도 지혜란 이런거야. 라고 말하기도 하고. 사람이 가진 지혜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누가 지혜자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물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 긍정과 부정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양극단에 치우침이 없기를 강조하는 전도자의 태도는 한결 같은데요.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인생은 허무한거야. 라고 말하지도 않고, 무조건 지혜가 가장 중요한거야. 라는 양극단의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서 지혜를 이중적인 관점으로 보게 하는 전도자의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 1절에는 이 지혜를 아는 것이 사람의 얼굴을 밝게하여준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빛나게 한다는 이 지혜는 하나님과 관련된 다른 성경 본문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향해서 그의 얼굴 빛을 비추시는 분임을 성경은 자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31편에는 이런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시편 61편에는 이런 말씀도 기록되어 있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특히 시편에 주의 얼굴 빛을 구하는 구절이 여럿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얼굴빛을 비추시듯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을 빛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나운 얼굴도 변하게 만들어줍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어느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표정이 변하는 것을 종종 경험하게 됩니다. 특히 젊었을 때는 사나웠던 얼굴이 시간이 지나면서 온화해지는 얼굴로 인상이 바뀌는 것을 경험하신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가 젊으셨을 때는 정말 인상이 좀 매우 사나우셨습니다. 좀 별로셨거든요. 눈빛으로 사람을 제압하는 약간 그런 스타일이셨습니다. 지금이야 많이 연로하시고 아프시고 하면서 인상이 많이 변하긴 했는데 저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정말 인상이 무서웠었습니다.
또 결혼을 하고 난 이후에 인상이 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또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죠. 그러면서 무언가 통달한 듯한 인상으로 온화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듯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지혜를 깨닫게 되거나 한계를 뛰어넘는 사건을 만나게 될 때 굳은 얼굴의 표정이 바뀌고 사나운 인상이 변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듯 사람의 표정까지 바꾸는 지혜의 능력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갑자기 8장 2절에서 느닷없이 왕의 명령을 지키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하나님께 맹세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왕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평행 관계로 설정하여 왕과 하나님을 같은 위치에 놓으려고 하는 시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 성경이 쓰여진 시기는 군주제였었죠. 왕의 말이 곧 법이 시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통치권자가 가진 힘이 막강하지만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시대는 왕이 통치하는 군주제입니다. 지혜자도 그 현실 체제 안에서 살아왔었겠죠.
3절과 4절에서도 왕 앞에서 그의 태도를 조심할 것을 강조하고 있고 왕의 말은 권능이 있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후에 5절에서는 왕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와 지혜자를 연결하려고 하는 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5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는데요.
왕의 명령을 지키는 자는 안전하다. 지혜있는 사람은 언제 어떻게 그 일을 하여야 하는지를 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입장은 전통 지혜의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지혜입니다. 잠언에도 왕을 두려워하라고 말하면서 반역자와 사귀는 것을 조심하라는 구절이 있고요.
바울도 비슷한 맥락에서 통치하는 권위자들에게 복종할 것을 권하였습니다.
이유는 그 시대에서 왕 앞에서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지 않는다면 단칼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왕 앞에서 겸손히 사는것은 매우 당연한 이치였던 것이죠.
전도자의 이러한 글들은 얼핏 보면 하나님의 권능과 인간 세계에서 왕이 된 통치자를 연결하려 시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태도는 아주 세속적으로 느껴질수도 있는 태도인 것이죠.
하지만 왕 앞에서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조언으로 이야기가 끝이 난다면 그것은 지혜자 답지 않은 행동입니다. 이후의 구절을 통해서 그와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8장 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의 권위를 드러내면서 왕의 명령을 지키라고 말하고, 왕 앞에서 행동을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지만 무슨 일에든 때와 심판이 있다는 것은 전도자가 가진 지혜의 관점이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말과도 같습니다.
왕이 인간 세계에서는 권위가 있어서 그것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마저도 사람의 앞일을 누구도 알지 못하니 다 때와 심판이 누구에게나 다가옴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죠.
왕도 이 심판 앞에서, 또 그에게 다가올 하나님의 때, 그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인가? 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는 1절의 질문과 비슷한 질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자이냐? 라는 1절의 말씀처럼 사람은 장래일을 알지도 못하고 장래 일을 가르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왕의 권위가 아무리 뛰어나고 그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지혜라 여겨질지라도 왕도 지혜자일 수 없고, 장래일을 가르쳐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죠.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이라도 이 땅 위의 사람으로서 땅의 제한된 경계 아래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 전도자는 또 다시 인간의 지식과 능력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부정적인 관점을 드러내고 있는데요.
8절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조금 더 명확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벗어날 사람이 없듯이, 악은 행악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매끄러운 번역입니다.
곧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이는, 불법을 행하는 이들은 건져냄을 받을 수 없는, 곧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을 끝으로 8장의 전반부가 마무리 됩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생존을 위해서 죄와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자기 의지대로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7장 마지막 구절인 29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정직하게 만드셨지만 인간은 스스로 자기 꾀에 빠져버려서 악을 행하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스스로 의를 행할 수 있는 인간도 없으며 죄를 범하지 않는 인간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전도자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한낱 바람도 주장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바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정하거나, 피하거나, 연기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권세를 가진 왕이라도 자신의 인생을 조절하거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8장 1절에서 제시한 질문, 곧 누가 지혜자와 같은가? 누가 사물의 이치를 깨달았는가? 라는 질문에 답변하듯 장래 일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힘과 능력의 한계를 다시 한번 지적합니다.
이는 모든 때를 정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발견하게 합니다.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누가 진정한 지혜자인지, 누가 사물의 이치를 주장하는 분인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인생의 허무함 앞에서, 또 내가 가진 지혜의 끝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마주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묵상할수록 하나님의 크심과 온전하심을 깨닫게 됨이 참된 지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을 깨닫는 이가 참 지혜를 발견한 사람인 것을 전도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얼굴 빛을 구하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물의 이치와 해석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할 수 있는 지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주의 도를 버리고 이 찬양을 고백하시길 원하는데요. 저는 어제 7장 29절의 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아 맴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직하게 지으셨지만 우리가 스스로 꾀를 내어 복잡한 상황에 내던져진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인데요.
신앙생활은 어찌보면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지만 또 어찌보면 단순한 것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행하고, 기뻐하지 않는 것은 멀리하면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의 꾀와 간계가 하나님과의 간극을 만들어 내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를 버리고 헛된 것을 지혜인양 쫓아간다면 그것이 우리를 옭아매는 올무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면서 이 찬양에 우리의 마음을 담아 함께 고백하길 원합니다.
주님 주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주님의 얼굴 빛을 구합니다. 모든 지혜가 주님께 있고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 주님의 지혜와 권능을 찬양합니다.
세상은 세상이 가진 지혜로 우리를 이끌지만,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고백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빛 가운데 살아가며, 주님의 빛을 전하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고 주님만이 우리의 왕임을 선포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곽군의 느릿느릿'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두가 같은 운명 (0) | 2022.12.26 |
---|---|
하나님 자녀의 영광 (0) | 2022.12.23 |
사람의 지혜와 의로움의 한계 (2) | 2022.12.20 |
모든 일에 때가 있다 (2) | 2022.12.13 |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1) | 2022.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