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자녀의 영광
(요1 3:1~10)
우리가 계속 전도서를 묵상하다가 오늘부터 25일 성탄절 까지는 성탄에 관련된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요한1서 3장의 말씀입니다. 요한1서의 서신은 사도 요한이 그의 목회 여정 후반기에 쓴 첫 번째 서신입니다.
그중 오늘의 본문인 3장의 말씀은 사랑의 실천에 대한 말씀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들에게 어떻게 부어진바 되었는지를 기록한 장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야 하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1절의 말씀의 시작을 보면 보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는 생각해 보라. 라는 의미입니다. 너희는 생각해 보아라, 무엇을 생각해 보라고 하고 있습니까?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베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깨달은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은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너희는 생각해 보아라 너희를 위해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셔서 너희를 자녀 삼으셨는지를 생각해 보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존재를 우리가 그러하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 예수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1절의 말씀 하반절에 기록된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라고 기록된 말씀은 오늘의 본문인 2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의 주제와도 같은 말씀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새로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을 자녀 삼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요한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그리스도인들도 알지 못할뿐더러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에 대한 해답을 2절부터 찾아볼 수 있습니다.
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당시 이 서신의 독자들은 초대교회를 이룬 공동체들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에베소 지역과 소아시아 일대의 교회의 교인들에게 이 서신을 보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영지주의에 빠진 이들이 교회에 많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헬라 철학의 근간이 되는 사상이기도 한데요. 영은 선하고 순수한데에 비해 육체는 악하고 타락한 것이라고 믿는 이원론적인 사상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실제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였습니다. 육신은 부정하기 때문에 육신으로 행하는 어떤 행위도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라고 말하면서 극단적인 도덕폐기론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였던 것이죠. 예수님께서 육체로 온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질적인 지식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사도요한은 이러한 영지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들을 경계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오늘의 서신을 기록한 것으로 볼수도 있습니다.
다시 2절로 돌아가보면요 이 서신의 독자들을 향해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인데, 장래에 이후에 어떤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사도가 이 미래에 대한 확증에 대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는 아직 예수께서 이 땅에 재림하지 않으셨고, 우리의 존재가 영화로움을 입지 아니한 상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신이셨습니다. 많은 이적과 기적을 행하시고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이 땅 가운데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사망 권세를 무너뜨리시고 부활하신 놀라운 생명의 주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삶과 생활은 어떤 신비스러운 모습들이 아니었습니다.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오히려 고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형편을 가진 이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을 향하여 사도요한은 아직은 영화로워지지 못하였고, 장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그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다. 라고 확신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 후반부에서는 중요한 세 가지 결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그리고 그를 보는 것, 또한 그와 같이 될 것 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신약교회 신자들은 긴박한 종말론적인 신앙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시고 승천하신 직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곧 다시 오실 그 날이 속히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그 날과 때와 시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 날이 자신이 살아있는 시대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사도도 그가 나타나시면,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여전히 이 땅에서 고난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교회 공동체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두 번째로는 그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은 그가 이 땅에 다시 오셨을 때, 그 이후를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는 영지주의자들의 미혹에 빠진 이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한데요. 그를 본다. 라는 것은 우리의 두 눈을 통해 성육신 하셨던 그 예수를 보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초림하셨던 예수를 너희가 다시 보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와 같이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화를 넘어 영화로움을 입고 새로운 존재가 될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그의 택하신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 즉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 그 목적이 완전히 성취될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온전하게 만들어 하나님 나라로 이끄시기 위함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 된 신자들이 소망 가운데 붙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를 3절부터 10절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먼저 죄를 다루고 있습니다. 3절과 4절의 말씀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 어떤 소망을 가졌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장래에 다다르게 될 소망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이며, 그를 볼 것이며, 그와 같이 될 소망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예수께서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특징을 깨끗하심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깨끗함이라는 제의적인 정결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제의적 정결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방법에 담긴 수많은 정결예식 때 사용되는 정결법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등장한 깨끗함은 신자가 살아가야 할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정결을 의미하는 단어로 볼 수 있습니다. 곧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주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말씀이죠.
이후 4절에서는 죄를 짓는 자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여 자기들은 죄가 없으며 불법을 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지금의 구원파와 같은 행태이죠. 하지만 요한은 이에 대해서 죄를 짓는 사람은 모두가 예외없이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 말하면서 영지주의자들의 거짓 가르침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이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율법을 범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단지 율법을 범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본성적인 죄성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죄를 정의할 때 단지 율법적인 죄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는 고집적인 행동과 욕심까지도 불법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특별히 자신이 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실상 하나님을 배반하려 하는 가장 악한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을 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이후 5절의 말씀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높으심을 찬양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님 만이 죄가 없으신 분이시며, 예수님 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죄를 없애시기 위하여 오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와 그 사역의 목적은 이 죄를 없이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리고 8절에 기록된 대로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요한은 이 서신을 읽는 교회 공동체에게 죄를 짓는 것은 마귀의 특성이며, 이 죄를 없이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특성임을 상기시키려 하였습니다.
6절과 9절은 같은 말씀입니다. 6절에서 했던 말씀을 9절에서 반복했다는 것은 이 말씀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말씀임을 상기시킵니다.
6절에서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다. 라고 말하였고 9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대할 때는 좀 어려움이 있습니다. 무엇이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기도 하고 죄에 넘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안에거하는 이는 죄를 짓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타당한 해석은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되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6절에서 요한은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라고 하였는데요. 이것은 무한정으로 계속해서 죄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부분을 더 깊이 다루는 시간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때로는 우리는 죄를 범하기도 하고 불법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이것으로 인하여 가슴 아파하면서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죄를 벗어내고자 애를 쓰며 성화 되어 가기에 힘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임을 인정하고 있기 떄문입니다.
마지막 10절에서는 지금까지의 말씀의 결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요약하자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신의 삶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자녀 된 신분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신분과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삶에 드러나는 여러 행위들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의를 행함과 의를 행치 않음의 차이로 볼 수도 있으며, 형제를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음으로도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으며 그 사랑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이셨습니다.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죄를 그의 육신에 씌우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할 도덕적, 영적 책임을 가진 이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여전히 불의와 죄 가운데 거한다면, 우리를 자녀 삼으시기 위하여 놀라운 사랑을 베푸신 그 사랑을 외면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중 3절 말씀을 함께 다시 읽기를 원하는데요. 같이 읽겠습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우리가 이 소망중에 즐거워 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는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주님의 정결하심을 따라 우리의 삶을 정결하게 하여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삶으로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심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지만 사망과 죽음을 이기시고 성령으로 부활하셨음을 믿으십니까?
질문2.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게 하며, 또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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