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권리포기
(고전 9:1~12)
오늘의 본문은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관계를 바울이 직접 언급하며 바울이 사도로서의 정체성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확립시키고, 사도로서의 권리에 대해서 또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 안에서의 바울의 위치에 대해 변증하는 내용입니다.
3절의 말씀에 보면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하겠다. 라고 바울이 말하는데요. 사실 이 변명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뭔가 잘못했을 때 그 잘못에 대한 회피 답변으로 쓰이는 단어가 변명이잖아요. 영어성경으로는 디펜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변명을 하고 있다기 보다, 아마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비판적인 질문을 하였기에 바울이 작정하는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비판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적어 내려갔다고 생각이 듭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을 1절과 2절에서 말하고 있는데요.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의 12명의 제자 중 한 명은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자신을 포함한 12명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지칭하면서 사도성에 대한 지위를 제자들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바울은 예수님의 직속 제자는 아니었죠. 오히려 유대인들 중에서 극성 유대인으로서 예수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인물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을 초자연적으로 만나주셔서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의 복음을 경험하고, 사도가 된 인물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바울의 사도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으며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면서 왜 사도적인 직임을 행하고 있는가에 대한 비판이 있었던 것이죠. 아마 당이 나뉘어진 상황에서 게바를 따르는 이들 베드로 파인 인물들이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비판을 들고 일어섰을 가능성이 컸겠죠.
하지만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하죠.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인이 나의 사도 됨으 ㄹ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통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세운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며,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도로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너희에게는 내가 사도로서의 직분을 요구할 권리가 당당히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4절부터 11절까지 사도의 권리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바울이 설명한 사도의 권리는 총 4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는 일반적인 관례에 대한 권리입니다.
4절과 5절에 기록되어 있죠. 먹고 마시는 권리와 가족을 부양할 권리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자신의 생계비와 선교비를 부담하도록 부탁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5절을 보면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느냐 라고 묻는 것을 통해 당시 다른 사도들, 특별히 베드로는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다니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부양을 교회에게 부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독신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성경에서 확실히 말하고 있지는 않은데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이 구절을 미루어보아 바울도 혼인을 하여 가정이 있었을 것이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내가 개척하고 수고하여 세운 이 교회를 통하여 나는 가족의 부양과 나의 먹고 마실 생계비를 부탁할 권리가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사역적인 관례에 대한 권리입니다.
바울은 교회로부터 부양받을 권리에 대해서 3가지 비유를 드는데요. 첫 번째로는 군인의 비유, 두 번째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 세 번째는 양치는 목자의 비유입니다.
군인이 군복무를 할때는 당연히 군에서 제공하는 월급을 받으면서 군 복무를 합니다. 무급으로 군인이 근무를 하는 경우는 결코 없죠.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로 일하는 직업이 바로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포도원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이유는 농사를 통해서 수익을 보고자 하는 이유도 들어있지만 자신이 재배한 작물을 수확하여 먹을 자유도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안수집사님 귤밭에서 며칠 귤을 딴적이 있는데요. 안수집사님께서 귤을 따면서 목마르거나 배고프면 얼마든지 귤을 따서 먹어도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 성도님들도 함께 가셔서 귤을 같이 따면서 귤을 많이들 드신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일꾼들도 일하며 작물을 취하는데 하물며 귤밭 주인인 안수집사님이 귤을 따서 드실 권리가 없으실까요? 주인에게는 더욱더 그럴 권리가 있다는 것이죠.
목자가 양떼를 키우며 양의 털과 양의 젖을 취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한 말이죠.
바울은 이렇게 군인과, 농부와, 목자의 예를 들며 고린도 교회로부터 자신이 부양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세 번째는 율법적인 관례에 대한 권리입니다.
8절에서는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에 대하여 바울은 신명기 25장 4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모세의 율법에 보면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인용하죠.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은 곡식을 수확하기 위해서 일하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는 행동을 하지 말고 일하는 동안 소가 그 곡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죠.
그런데 위의 말씀에 대해 바울의 해석은 이 말이 하나님께서 그 소가 걱정되시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냐 소가 배고파서 일을 못할까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냐? 그렇지 않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일하는 일꾼들이 밭을 일구면서 소망을 가지고 일을 한다. 또 곡식을 타작하는 사람도 일 한 이후에 그 곡식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일을 하지 않겠느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11절과 12절의 말씀을 통해서 바울과 바나바의 사도의 직임에 관한 정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죠.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새번역으로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적인 것으로 씨를 뿌렸으면, 여러분에게서 물질적인 것으로 거둔다고 해서, 그것이 지나친 일이겠습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고린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많은 수고와 영적인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물질적인 것을 요구함에 있어서 부끄럽지 않으며 정당함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죠.
12절을 보면 다른 사도들은 이러한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그에 대하여 다른 이들도 사도가 활동하는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고 그것을 받고 있는데 하물며 나와 바나바는 더욱 그러한 권리를 주장하는게 마땅하지 않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12절 하반절을 통해 그러한 일들에 있어서 자신의 정당성과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와 같은 말을 한 이유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섬기는 교회 공동체가 이 문제로 인해 서로 분열되고 비판하는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백은 내가 이러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더욱이 그러하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범사에 참고 있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순회선교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계속 정착하여 고린도 교회를 전담하는 사역자였다면 좀 다른 상황이 적용되었겠죠.
하지만 바울은 지속적으로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유럽지역과 소아시아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돌보는 일을 진행했었습니다.
지금처럼 국내, 해외 송금이 쉬워서 금새 현금을 송금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고, 편지를 서면으로 보내는 것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수도 있었겠죠. 그렇기에 바울은 불가피하게 한 지역에서 교회를 세워가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생계비를 직접 벌어가면서 사역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복음을 위해 과감히 포기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응당 사람은 자신이 취해야할 권리를 침해받는 것을 공격당하는 것이나 손해보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내가 일을 했으면 마땅히 그 보수를 받는 것이 상식적이고 정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마땅한 권리에 대해서 포기함으로서 복음을 위한 우선순위에 대해서 고린도 교인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 보게 될 12절 이후의 말씀을 통해서 더 자세히 알 수 있지만 바울이 이러한 내용의 서신을 보냄으로 인해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사례비를 잘 준비해서 보내라는 식의 의도로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에게 가장 우선시 되었던 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을 살펴보면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스펙과 출신과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낮은자로, 이방인으로 살아가기를 자처했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입으로 내가 사도인것과, 사도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서 구구절절하게 글을 써 내려간 것은 자신의 처지를 좀 알아달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와 태도를 본보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모습을 입으신 것도 권리 포기의 본보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잡으러 온 군병들 앞에서 내가 열두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내려 저들을 멸할 권세가 있으셨지만 그 권리를 응당 사용하지 아니하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같이 온전히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심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온전한 권리 포기와 희생이 바탕이 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우리의 권리를 내세우고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할 자유와 편의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포기해야 할 때가 찾아올 것입니다.
그때 오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복음을 위해 권리를 아낌없이 포기했던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잊지 아니하시고 신원하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믿음으로 심고 아버지의 나라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질 것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우리를 위하여 포기하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희생에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의 선진도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오히려 겸손함과 낮아짐의 본을 보였던 그 삶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나의 권리를 앞세우고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헐떡거리는 인생이 아니라, 내게 주신 은혜를 흘려보내고, 당신의 자녀로 살기위해 불편함을 감수하기를 기뻐하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