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권면
(고전 16:13~24)
오늘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마지막 인사와 함께 몇 가지 권면을 하고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권면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오늘의 본문 13절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라고 기록되어져 있는데요.
이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신앙의 권면입니다. 성경에는 ‘깨어있으라’ 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자주 말씀하셨고 바울 서신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깨어있다는 것의 의미는 잠들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잠듬은 육체적인 잠듬을 말하는 것이 아니죠.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단지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예배시간에 그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예배 드리는 그 순간에도 얼마든지 잠들 수 있고, 심지어 내 영혼이 잠들어 있는 것을 모른 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깨어있으라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늘 권면하고 있는 이유는 영적인 민감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반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나의 마음과 품은 뜻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있는지, 나는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고 있는지, 내가 선택하는 결정과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인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등불이 되어 성령님의 감동과 감화가 나의 심령을 조명하고 있는 것을 늘 점검하는 것,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만약 깨어있지 않은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될까요?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틀 안에 갇혀서 그곳에서 안주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성경에는 잠든 것에 대한 경고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도적이 임하는 것을 경계하지 못하는 것과, 신랑을 기다리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미련한 다섯 처녀에 대한 예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가 깨어있지 못한다면 우리를 넘어뜨리게 하려는 도적, 사탄의 궤계 앞에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데, 만약 그 사냥감으로 점찍은 사람이 잠들어 있다면, 아주 쉽게 옭아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우리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고,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살아 움직이지 못하는 말씀이 되어 바람에 날아가는 겨의 껍데기처럼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이 없는 우리의 삶은 우리를 자기연민에 빠지게 만들고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앙상한 나무처럼 만들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잠들어있는 영혼은 내가 창조된 목적의 방향성을 잊은 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것, 영혼의 생기가 없어지는 것 또한, 말씀의 생명력이 내 안에서 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신자가 깨어있지 못하고, 자신의 인생과 신앙을 말씀과 성령으로 돌보지 않는다면, 신자의 영혼은 사탄의 먹이가 되어 파괴되고 부서질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깨어서 믿음 안에 굳게 서서 용감한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이 모든 일을 사랑 안에서 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다툼과 정죄에 있었습니다.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말하며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믿음 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쉽게 범할 수 있는 잘못된 행동이 바로 정죄입니다.
나는 헌신하고, 나는 봉사하고, 나는 예배에 빠지지 않고, 모든 모임에 최선을 다해 출석하며 의로 충만한 상황인데, 나와 같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 이들을 바라볼 때 불편한 마음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종종 발생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자신은 권면이라고 했던 말과 행동들이 연약한 이들에게는 상처와 정죄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질책하는 것은 쉽습니다. 정죄하는 것도 쉽습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품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인내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고 오래 참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들을 키워보니까 딱 그 마음을 알 것 같더라고요. 아이들을 혼내고 다그치는건 쉽게 쉽게 되요. 그 자리에서 말로 지적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사랑으로 참고 인내하는 것은 참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권면하기 위해 그렇게 길게 기록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모두가 고린도전서 13장을 읽고 묵상했다고 해서 바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죠.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깨달은 말씀을 우리 심령에 새기고 우리의 육체까지 새겨지도록 날마다 깨어서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순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15절 16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스데바나는 아가야 지역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여 맺은 첫 열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가야 지역은 고린도 지역 위쪽에 위치한 지역인데요. 당시 스데바나는 바울의 선교여행을 돕기 위하여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함께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 공동체의 장로의 직분을 의미하는 사람으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교회를 섬기는 이들, 특별히 성도 섬기기로 작정하여 애쓰는 이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사람들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의 의견을 따르자면 스데바나의 사역을 두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혹자는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병든 자나 가난한 이들을 도우는 집사적 직분의 사역, 혹은 자기 집을 집회 장소로 내어 놓는 일들을 하였을 것이다. 라는 주장과 또 다른 주장은 성도를 돕는 일에 많은 연보를 내어 봉사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역을 했느냐가 아니라, 성도 섬기기로 작정하였다. 라고 하는 자발적인 헌신이 스데바나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작정하였다는 헬라어 단어는 스스로를 준비시켰다 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교회와 지체를 섬기기 위하여 준비해 나가는 일꾼들을 통해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워져 갈 수 있던 것이었죠.
바울은 이러한 이들의 수고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이와 같이 스스로 준비하고 겸비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는 이들의 수고를 잊지 말 것을, 그리고 그들에게 순종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가 어떤 한 사역자의 치리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로 이루어져 무질서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디모데를 보내기 전 공동체를 섬기는데 열심을 다하였던 스데바나와 같은 이들을 세우면서 교회의 질서를 바로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나아가서 스데바나와 같이 믿음의 일꾼이 되어 교회와 지체를 섬기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마무리 하면서 오늘의 마지막 권면을 통해 고린도전서의 큰 3가지 줄기를 한 번 더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로 교회 공동체에는 성숙한 성도와 질서가 필요합니다. 당을 나누어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성숙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더 위하는 마음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그 질서를 위해서 지도자를 세우고 그 리더십에 순종해 나가는 모습이 교회 공동체 안에는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깨어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은사와, 직분과 사역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맡겨진 직분을 통해 은사가 발현되기도 하며 발현되는 은사를 더 활용하기 위하여 직분을 맡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직분과 은사를 통해서 교회는 사역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게 맡겨주신 은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 은사를 통해 교회를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직분을 맡은 것은 내가 영적으로 깨어있음을 확인하고 점검하는 좋은 거울이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역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며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바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은 사랑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이 사랑은 어떤 사역을 이루기 위한 부수적인 수단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 어떤 은사도, 직분도, 사역도 사랑 안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고 소리만 큰 꽹과리와 같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어떤 기분좋은 감정, 즐거운 상태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참고, 온유해야 하는 자기 희생과 권리포기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비판과 정죄로 남을 억누르기보다 내가 감당해야 하는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경험되어지는 그 놀라운 사역을 이루는 모든 바탕이 사랑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도록,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모나고 깨어진 우리의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듬어지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다스려지도록 기도하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질문1.
나의 영혼은 깨어 주님 오심을 기다리고 있나요? 아니면 잠들어 있나요? 내 영혼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나요?
질문2.
나의 신앙생활은 사랑과 순종 안에서 열매를 맺어가고 있나요? 만약 열매 맺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이유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