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합을 아시나요
(수 2:4~7)
부활주일이 4월 둘째 주였습니다. 부활주일 날 우리가 난로를 치웠거든요. 그리고 저번 주 저녁기도회 때 에어컨을 틀었습니다.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새삼 놀라운 것을 제가 주일 예배 설교할 때마다 느낍니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체감할 때면,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없는지 항상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빠른 시간에 올라탄 채로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면 내가 바르게 나아가고 있는지를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잠시 달려가는 것을 멈추고 내가 바르게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나의 주변을 돌아보고 내가 간과하거나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를 한 번씩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드디어 새 성전 건축의 기초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종종 외근을 나가는 날 제가 운전을 하는 날이면 신제주에서 구제주로 넘어올 때 일부러 큰길을 타지 않고 새 성전 부지를 지나갑니다. 지나가면서 한 번씩 보면서 기도도 하고 어떻게 건축이 될까? 완성된 성전은 어떤 모습일까? 라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건축부지를 지나가곤 합니다. 어제도 청소년부 아이들과 함께 성전 청소를 하고 신제주에서 저녁을 함께 먹고 교회 부지를 함께 보고 왔습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조금씩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곧 기초공사가 끝나면 천천히 건물이 올라가는 것들을 실시간으로 바라보게 될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신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그 모습들을 조금씩 설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호수아에 기록된 말씀 중에 라합 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짧은 두 구절만 읽었지만, 라합에 관한 내용은 여호수아 2장 전체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실 라합의 등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탐하면서 거치는 찰나의 장면인데요. 사실 라합이라는 인물은 모세나, 여호수아나 갈렙과 같은 대단한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라합이라는 이 연약한 인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하나님의 마음이 어느 곳을 향해 있는지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첫 번째로 라합은 참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라합의 신분은 기생이었습니다. 당시 사회가 여성이 어떤 직업군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여성이라는 신분과 지위가 남성보다 높아진 그런 시대죠. 물론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제가 다니는 회사의 팀장님도 여성분이고 또 대표님도 여성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것은 사회가 발전되고, 또 여성의 능력이 인정받는 시기를 통과하면서 얻어진 결과인데요.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만 하더라도 이렇게 여성 인권이 인정받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고 또 불과 2~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인권이 참 인정받지 못했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하물며 아주 고대의 시절은 어땠을까요? 노동력 대부분이 남성 중심적인 노동력으로 진행되던 시기였었고, 농업의 기술조차 발달하지 못하여 수렵과 채집활동으로 살았던 시기에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여성들은 일할 수 있는 직군 자체가 제한적이었을 것이며 여인들은 노인과 아이들과 비슷한 취급을 받았던 것이죠.
라합의 직업도 기생이라는 직업이었습니다. 당시 기생이라는 직군이 하는 일은 노래나 춤을 배워서 술자리에 나가 흥을 돋우는 일을 하는 여인을 기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직업에 귀천을 논할 수는 없지만, 라합의 직업은 직업적인 가치관이나, 정당성에 대해서 떳떳함을 주장하기에는 거리가 먼 직군이 이 기생이었습니다.
여호수아 2장 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여리고를 정탐하기 위해 정탐꾼 두 사람을 보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이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거기서 유숙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정탐꾼이 기생의 집에 들어간 이유는 기생의 집 자체가 사람들이 유흥을 즐기러 오는 곳이기 때문에 익명성이 보장되기도 하고, 낯선 사람이라도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확 눈에 띄는 일이거나 오해받을 만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시끌벅적한 곳이기 때문에 정탐꾼들이 정보를 수집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정탐꾼들이 훈련된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 2장 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얼마나 어색하게 행동했는지, 아니면 기생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실토를 했는지, 아니면 말과 생김새가 너무 달라서 단번에 알아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리고 사람들이 밤사이에 정탐꾼들이 자신의 땅에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고 여리고 왕에게 고합니다.
그러자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사람들일 끌어내라고 명령합니다. 아마 정탐꾼들의 동선이 이미 파악이 되었고 그들이 어디에 숨었는지까지 딱 걸려버린 것이죠.
이럴 때 쓰는 말이 독 안에 든 쥐입니다. 이제 꼼짝없이 잡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4절의 말씀을 보면 라합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왕이 사람을 보내기 전에 미리 알고 그들을 숨겼던 것이죠.
오히려 라합이 더 빠른 정보력과 민첩함으로 이스라엘에서 온 조금 덜 떨어진 선발 정보원들을 숨겨줍니다.
그러고 나서 정탐꾼을 잡으러 온 왕의 병사들에게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고 이미 어두울 때 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른다. 지금 급히 그들이 간 곳을 향해 따라가면 그들을 잡을 수 있을지 모르니 어서 그리로 가라고 오히려 병사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훌륭한 병법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여리고의 병사들은 라합이 흘린 거짓 정보에 선동되어서 그 집을 빠르게 빠져나갔고 라합은 그사이 성문을 닫고 정탐꾼을 탈출시킵니다.
기생이라는 천한 신분과 여성이라는 낮은 위치에 있었지만, 그가 발휘한 기지로 인하여 이스라엘에서 온 정탐꾼들은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고, 라합이 가르쳐준 대로 산에 사흘간 숨어있다가 안전하게 이스라엘의 무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로 라합은 하나님의 위엄을 인정한 여인이었습니다.
라합은 여호수아 2장 9절과 10절에 정탐꾼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이미 여리고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의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았다 라고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신 것과 아모리 사람 시혼과 옥을 광야에서 쳐부순 사건을 이미 전해 들어서 알고 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훈련받은 군인의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사기충천한 물론 젊은 남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중에는 무기를 쓸 줄 아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광야 시절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대부분은 종으로 일한 경험밖에 없는 아주 연약한 민족이었을 것입니다.
라합은 자신의 집에 들어온 그 정탐꾼만 봐도 정보원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해서 금세 들통나고 만 것을 보아 이스라엘 민족의 전투 능력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라합은 그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2장 11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입에서가 아닌 이방인의 입에서 이런 놀라운 고백이 드려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오직 한 분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라합이라고 하는 기생을 통해서 고백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고백과는 많이 비교되는 고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이었습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유능하거나 특출해서 선택된 민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세우셨던 그 언약을 이루시고 성취하기 위해서 이 민족을 사용한 것이지, 이 민족의 우월성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한 것이 아니셨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정말 놀라운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자신들과 함께 거주하는 애굽 땅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하지만 같은 하늘, 같은 땅에 모여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진노가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출애굽 직전 유월절을 지키며 죽음의 사자가 자신들의 집은 유월 하여 넘어갔지만, 애굽의 모든 장자는, 사람부터 짐승까지 죽임을 당한 것을 목격했습니다.
홍해 앞에서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인해 갈라진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너고, 그들의 홍해 도하가 끝나자 자신들을 추격하던 애굽의 병사들을 다시 홍해에 가두어 그들을 멸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눈앞에서 보았던 민족이죠.
또 광야를 지나가며 하늘에서 신령한 음식인 만나를 매일 같이 거두어 먹고, 바위에서는 샘물이 솟아나 마른 목을 축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날마다, 매일 같이 40년을 경험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백은 감사가 아닌 늘 불평과 불만이었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우상을 부어 만드는 죄악을 서슴지 않고 행했던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선택받은 민족도 아니었고 오히려 이방인이었던 라합, 여성의 몸으로 기생의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갔던 연약한 한 여인의 고백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끄럽게 할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로 라합은 가문을 책임지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2장 12절과 13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라합 자신이 정탐꾼들을 선대 하여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너희도 우리 가문을 기억하여 나의 부모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주기를 청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라합은 믿음에 따라 행동한 사람의 본보기로 인용됩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또 야고보서 2장 2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히브리서에서는 라합의 행위를 믿음으로 칭하였고, 야고보서에서는 그 행위를 의로움으로 칭했습니다.
라합의 이 용기 있는 행동은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라합이 속한 그 가문과 친족까지 구원하였습니다.
여호수아 7장 25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한 여인의 용기 있는 믿음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흘러가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라합의 이러한 행동은 여리고에 살고 있던 민족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는 반역의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민족주의적인 생각을 버리고, 민족의 유대감을 우선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라합은 그 믿음에 합당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일반화를 시킬 수는 없지만, 이 대목을 통해서 한 사람의 믿음의 고백과 믿음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 여인의 믿음을 통해서 그가 속한 가문은 목숨을 보전하여 구원에 이르렀고, 또 한 여인의 믿음의 선택으로 인해서 한 민족은 심판에 처해짐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리고를 함락하는 여정은 이미 정해진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전쟁과 병법으로 여리고를 함락시킨 것이 아니었죠. 다만 행진을 통해서 여리고 성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돌자 여리고는 무너졌습니다.
정탐꾼이 가져온 정보는 그들의 군사력이 얼마인지, 성벽에 파수꾼이 몇 명인지 우리가 싸워서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첩보에 관련한 정보를 가져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24절에 기록된 것처럼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라는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굳이 정탐꾼들의 정보가 없었더라도 여리고 정복은 가나안에 입성하기 위한 하나의 관문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예정된 절차였던 것뿐 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곳에 라합이 있었음을 주의 깊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여리고 함락보다 라합이라는 한 명의 믿음의 사람을 얻기 위하여 이 일을 준비하셨음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이후 라합은 목숨을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인물로 그리스도의 조상 중 한 사람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라합을 아시나요. 잖아요. 옛날에 권투선수 홍수환의 동생인 홍수철이라는 가수가 있었는데요. 등댓불이 왜 켜있는지 그대는 아시나요. 라는 노래를 1978년도에 발표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었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아주 단조로운 가사인데요.
항구는 잠들어도 등대는 켜 있어요 / 파도가 잔잔해도 등대는 켜 있어요
밤 배가 떠났어도 밤새껏 깜빡여요 / 등댓불이 왜 켜 있는지 그대는 아시나요
바람이 잠들어도 등대는 켜 있어요 / 물새가 잠들어도 등대는 켜 있어요
내 님이 떠났어도 밤새껏 깜박여요 / 등댓불이 왜 켜 있는지 그대는 아시나요
이 가사의 내용은 한 사람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원래 등대가 하는 일은 날씨가 좋건 좋지 않건, 배가 뜨건 뜨지 않건 계속해서 불빛을 비추는 것이 등대의 역할입니다. 이 등대를 통해서 바다에 나간 배들이 방향을 잃어도 그 빛을 보고 안전하게 항구로 돌아올 수 있는 거죠.
이렇듯 등대처럼 한 사람의 우직한 믿음의 선택과 순종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라합이라는 인물은 사실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었고, 그의 인생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초라한 인생이었습니다.
오히려 여성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기생의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았던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됐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믿음으로 도전하고 믿음으로 결단하고 믿음의 약조를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그 믿음을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친족까지 구원함에 이르게 하였고, 또 라합은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믿음의 사람으로 그 이름이 영원히 남았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라합은 참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라합만큼 어두운 인생을 사는 분들은 없으시겠지만, 우리가 참 연약한 존재인 것은 우리의 존재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다 깨달아 알 만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라합처럼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의 선택과 결단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만큼 더욱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인이었고 이방인이었지만, 심지어 사람들이 천하게 보는 기생이었지만 하나님을 인정했던 라합의 믿음을 본받아서 우리의 삶의 여정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믿음의 결단을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늘 믿음의 도전을 요구하는 연속 선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믿음으로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 믿음으로 교회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 믿음으로 어떤 언어를 사용할 것인가? 믿음으로 이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 갈 것인가? 믿음으로 자녀를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등등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늘 우리에게 믿음의 선택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그때 우리의 선택이 믿음의 선택이 될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떠난 선택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선택으로 인해 우리 주변에 영향력을 미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의 범위가 넓든지 좁든지 간에 우리는 ‘나’라고 하는 한 사람의 존재가 믿음의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늘 기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속한 모든 곳에서 나의 가정에서, 나의 직장에서, 나의 교회에서, 나의 목장에서 나의 자녀에게, 나의 부모에게 나의 친구에게, 등등 내가 속한 모든 곳에서 나의 믿음은 다른 이들을 향하여 영향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영향력이 긍정적인 영향력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도전이 되고 모범이 되어서 계속해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흘려보내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렇게 라합과 같이 우리를 주목하여 보시는 분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나의 삶에 믿음의 고백이 날마다 쓰여 지는 생애가 되기를 기뻐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라합이라는 한 여인의 통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출신과 배경이 연약할지라도 믿음의 고백을 반드시 들으시고 그 믿음의 토대 위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삶도 믿음의 고백이 넘쳐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셔서 우리의 믿음의 결단과 선택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주님의 은혜 가운데 성전 건축의 기초공사가 진행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건축의 여정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이 쓰임 받게 하여 주셔서 우리가 믿음으로 도전하고 믿음으로 연합하여 이 건축의 여정을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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