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눅20:20~26)
누가복음 1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전정화 사건을 45절에서 48절까지 행하십니다.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이미 화요일 수요일날 함께 나누었고요. 성전에서 행해지던 세속주의와 물질주의, 그리고 종교주의, 이 세 가지의 우상들을 뒤집어 엎으시고 성전의 본래 모습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자 큰 창피함을 당한 유대지도자들은 20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내용을 통해서 예수님을 문책하고 넘어뜨리려고 하지만 요한을 통한 예수님의 반문은 유대인들을 다시 한번 아무런 말도 못하도록 하십니다.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를 통해서 그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하십니다. 이 비유를 들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즉시 잡으려고 하나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비열하게 예수님을 처단할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중에 나온 그들의 모략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본문 20절에서부터 그들의 비열한 계략이 등장합니다.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0절을 보면 다섯 가지의 비열한 방법이 등장하죠. 첫 번째로 엿봅니다. 기회를 잡으려는 것이죠. 그리고 두 번째로 그 기회를 통해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합니다. 바로 오늘의 질문을 통해서 로마의 권위에 도전하게 만들어서 잡혀가게 하거나 아니면 군중들에게 신임을 잃게 만들거나 하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 일을 위해서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네 번째로 그들을 의인인 척, 자기들과는 다른 척, 예수님과 같은편인 척, 진리를 따르는 척, 하면서 교묘히 파고듭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이 모든 것을 동원해 예수님의 말을 책잡으려고 합니다. 꼬투리를 잡게 하려는 것이죠.
21절에 보면 정탐꾼들이 아주 겸손하고 의로운 척하면서 예수님을 높이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 말 뒤에는 정말 그렇다 하는 존경의 물음이 아니라. 당신은 의로운 사람이고,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이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친다고 하니. 이 질문에 무조건 둘 중에 하나를 대답하라는 덫을 놓고 있는 것이죠.
그 덫이 22절에 등장합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라고 물어봅니다.
이렇게 물어본 의도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민족주의적 정서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로마에 압제를 받으며 세금을 내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던 민족입니다. 그러니 세리를 죄인 취급하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들은 세금을 내는 것이 합법적인지 아닌지를 종종 문제 삼아 회당에서 논쟁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는 것이 합법적이다. 라고 말씀하시면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들에게서 민심을 잃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안 그래도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자기 민족을 구원하길 바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데 로마의 편을 드는 예수님의 발언이 들려오면 아마 모든 군중의 마음이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설 것이고, 19절에 기록된대로 백성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잡아서 자기들의 입맛대로 처단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만약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는 것은 불법적이다. 라고 말씀하시면 민심은 잃지 않겠지만, 로마에 반대하는 입장을 말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로마 법정으로 끌고 가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얼마 전에 치러진 20대 대선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선을 대하는 교회와 기독교인의 자세가 어떠했는지 저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듣고 확인하였는데요. 그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과 지금의 교회 지도자들이 매우 비슷한 스탠스를 취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정 정당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 안되기에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자신의 이권을 위협받게 만드는 이 예수라는 인물을 어떻게든 넘어뜨리기 위하여 아주 비겁한 방법을 동원하여 그 실수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교활한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자 23절의 말씀처럼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모두는 아니지만 대부분 나라의 화폐에는 사람의 형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참 신기하죠?
예수님은 데나리온을 보시고 누구의 형상과 글이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거기에는 로마 황제인 카이사르의 형상과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가이사라고 번역되어있죠.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분명히 데나리온 이라는 화폐를 사용했습니다. 그 데나리온에 가이사의 얼굴이 들어있다는 것은 발행처가 로마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데나리온은 가이사, 곧 로마의 재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로 보아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규정을 실질적인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 때 화폐 발행권을 빼앗겨 조국에서 사용되던 백동화와 엽전을 몰수당하고 조선 엔화를 썼던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말장난 같은 위기를 그저 교묘하게 피하시려는 의도는 결코 아닙니다.
가이사의 것 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 데나리온이 어디에 종속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모든 천하 만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이 만물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쓰고 누리는 물질세계를 은혜로 부여 받았습니다. 다스리고 통치해야 할 사명과 함께 말이죠.
그리고 그 물질세계 안에서 편리하게 통용되는 단위가 화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화폐에 가이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면 세금도 내고 물건도 사고 이 화폐가 쓰이는 모습대로 쓰이게 두어라. 하지만 이 모든 세계는 로마에서 쓰이는 화폐뿐 아니라 우리가 쓰고 누리는 모든 물질 세계가 하나님의 것임을 반드시 기억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정탐꾼들은 능히 예수님을 책잡지 못하고 침묵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것, 이 땅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 나라에 종속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있나요? 아니면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나라를 구분하여 그 사이에서 저울질 하면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오히려 가이사의 것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나라는 무형의 가치이고 고상한 가치라고 여기면서 우리의 생각 저편에 묻어두고 이 땅에서 가이사의 것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는 우리에게 부여된 모든 가치, 이 땅에 있는 모든 물질과 가치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내는 것이 마땅하다면 우리는 그 땅의 물질세계를 넘어 존재하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께 속해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권세에만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능력과 권세는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발 앞에 있음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질문1.
이 세상의 가치가 나에게 가치를 물어올 때 나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음을 고백할 수 있나요?
질문2.
이 모든 세계와 역사가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 안에 있음을 인정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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