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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미갈을 아내로 얻은 다윗

by 터틀곽 2023.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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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갈을 아내로 얻은 다윗

(삼상 18:17~30)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의 행보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향해 나갑니다. 어제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16절을 보면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새번역 성경과 공동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는데요. 그러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이 늘 앞장서서 싸움터에 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그를 좋아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윗을 사랑했던 이유는 다윗이 전쟁터에 앞장서 나갔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간절히 바라고 바랬던 왕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바랬던 왕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왕은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라 라고 말했었죠. 본문에 기록된 다윗의 모습은 골리앗 앞에서 주눅 들지 아니하고 그를 쓰러뜨렸을 뿐 아니라 늘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전쟁에 나가 승리를 거두던 인물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외쳤던 이유도 다윗의 성실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바람이 되어 백성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그러한 분위기를 사울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자신의 왕권을 누구보다 지키고 싶었던 노쇠한 사울은 젊고 아름다운 다윗의 등장으로 인해 그의 광기가 더욱 심하여져 가고 있었는데요. 어제의 본문에서도 자신을 위하여 수금을 타는 다윗을 향해서 창을 두 번이나 던지며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죠. 하지만 다윗은 그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천부장으로 임명하고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합니다.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한 이유도 어제의 본문에 기록되었죠.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은 하나님의 영이 임한 다윗을 보자 두려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의 말로를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자신의 왕권이 이미 다윗에게 넘겨졌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경쟁 구도에 있는 상대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로 인식하였을 것입니다. 이 두려워한지라 라는 단어의 어원이 신적 경외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한데요. 즉 사울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존재이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존재임으로 다윗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두려워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사울은 다윗을 제거할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다윗을 죽이지 못하자 다른 방법으로 다윗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의 시작이 그렇죠. 내 맏딸 메랍을 아내로 줄테니 나를 위하여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이미 사울은 거짓을 말하고 있죠. 이미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은 당당히 사울의 딸을 신부로 맞이할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메랍을 미끼로 블레셋과의 전쟁에 다윗을 내보내어 그들의 손에 다윗을 죽이게 할 심산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죠. 사울의 본심이 17절에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울은 그 전쟁을 여호와의 싸움이라고 말하였지만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호와의 싸움은 하나님의 공의적 심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사울은 오직 다윗을 죽일 생각을 그럴듯하게 꾸며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망령되이 일컫는 죄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죠. 사울은 이미 하나님과 상관없는 광인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사울과 다르게 자신의 겸손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8절인데요.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될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죠.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자기 딸을 볼모로 잡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서 오히려 다윗은 당당하게 사울의 딸을 요구하며 사울과의 대립구도를 만들 수 있을 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의 두터운 신임까지 얻고 있었기 때문에 몰락하고 노쇠하고 광기 어린 사울을 제거하고 그 왕위를 차지한다고 해도 누구하나 나무랄 일이 없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 바로 다윗이죠. 하지만, 사울과 대조적이게도 다윗은 자신이 마땅히 요구할 것들을 요구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의 겸손함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19절에 보면 사울은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다윗에게 줄 이 시기는 어떤 기한 적인 의미보다는 다윗의 성실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미 사울은 다윗에게 블레셋과의 전쟁을 요구하였었고 다윗은 이를 성실하게 수행하여 많은 공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 때문에라도 그의 딸을 다윗에게 주는 것이 당연한 순리지만, 사울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아드리엘이라는 인물에게 시집을 보내버립니다.

 

사울이 이처럼 행한 이유는 만약 다윗이 자신의 사위가 된다면 이 왕권이 틀림없이 다윗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죠. 사울은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자신의 왕권을 요나단에게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의 지지를 받는 다윗이 사위가 된다면 그 왕권이 자기 자식이 아닌 다른 핏줄로 넘어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버립니다.

 

하지만 다윗은 겸손하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의 사위가 되어 왕권을 찬탈하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건으로 인하여 심적인 괴로움은 없었을것이라 생각되는데요. 다윗보다 오히려 메랍은 이 사실로 인하여 크게 상심했을 것입니다. 메랍도 다윗의 성품과 백성에게 칭송받는 다윗을 흠모하였을 것이고 다윗과 혼인할 생각에 내심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의 변덕스러운 마음 때문에 아드리엘이라는 사람에게 억지로 시집을 보내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21장에 보면 메랍은 아드리엘을 통해 자녀를 다섯이나 낳지만 결국 기브온 사람들의 보복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죠.

 

결국 사울은 자신의 변덕과 다윗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행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의 후손들까지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만들어내 버린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번에는 자신의 딸 미갈이 다윗을 흠모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여기서 또 사울의 광기가 시작되죠. 이번에는 자신의 심복들을 동원합니다.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서 사울의 사위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회유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에 대한 부담을 이야기 하죠. 자신의 가난하고 천한 신분을 이야기 하면서 딸을 데려올 지참금을 마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신분은 목동이었고, 또한 자신과 같은 수준의 여인이 아닌 왕의 딸을 부인으로 데려올 때 지불해야 할 지참금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요구했던 것은 블레셋 남자들의 포피였습니다. 이 포피는 할례를 받기 전 남자 성기의 겉 피부를 말합니다. 이 포피는 반드시 그 사람을 죽여야지만 얻을 수 있던 것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사울은 다윗을 전장에 보내어 반드시 죽임을 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같은 꾀를 내었던 것이죠. 이 포피를 요구했던 것은 할례받지 아니한 민족에 대한 전쟁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러한 조건을 내걸은 것 같지만, 이는 여호와의 전쟁도 아니었으며 단순히 다윗을 죽이기 위한 계략이었음을 발견할 수가 있죠.

 

가난했던 다윗은 위와 같은 수준의 지참금이라면, 감당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듯 싶습니다. 이제야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김으로 그 날이 차기도 전에 1+1으로 백더하기 백 이백개의 포피나 베어 와 왕에게 바칩니다.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사울은 미갈을 다윗에게 내주어 다윗이 미갈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하지만, 29절에 기록된대로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두 번 이상의 반복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여기서 말하는 더욱 더욱 두려워 하였다는 말은 12절과 15절에 기록된 두려움보다 더욱 큰 공포심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28절에 기록된대로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다윗과,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의 대립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는 다윗은 형통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기록된 말씀이 형통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30절에 보면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고 있는 다윗의 형통함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떠한 상황적인 잘 풀리는 형통함만으로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것이며, 그것이 축복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높이시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이들이 누리게 되는 높임을 볼 수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는 말씀과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성경의 구조와 가르침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죠. 자신을 낮추었던 다윗은 높아지고, 자신의 왕권을 높이 올리려는 사울은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은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낮아질 뿐만 아니라 그 어두운 마음에는 악신이 임하여 사울을 괴롭히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그의 마음에 다윗을 향한 질투로 인하여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며 그 악신을 다스리게 해주었던 다윗을 두 번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 했으며 아예 전쟁터에 보내어 몇 번이나 다윗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의 모습이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이들의 삶의 모습이 이렇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죠. 누군가를 미워하고 죽이고 싶고, 혼돈과 공허함과 흑암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간구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이들의 삶의 모습이 너무도 끔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운행하시기를 간절히 사모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우리의 삶의 양태를 대입하여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영이 떠나있는 사람인가요?

 

 

질문2.

내 삶에서 열리는 열매는 어떤 열매들이 맺어지고 있나요? 나는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나요? 아니면 악한 열매를 맺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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