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1~13)
외모지상주의 라는 말을 들어보신적이 있으십니까? 말 그대로 외모가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이념입니다. 그리고 외모와 상관없는 영역까지도 외모로 상대를 차별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정서를 말합니다. 백인 우월주의도 이와 같은 맥락이고요. 백인 우월주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피부 색깔이 조금씩 짙어질수록 비슷한 경향이 생겨납니다. 동북아에 있는 사람들이 동남아 사람들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도 백인 우월주의와 비슷한 맥락이죠.
인간은 감각수용의 약 80프로를 시각에 의존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눈으로 보는 것이 인간에게는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감각이죠.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속담도 있는 것처럼 눈에 보여지는 것을 그만큼 중요시 여기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사람마다, 또 문화마다 이 미의 기준은 다를 수 있습니다만 시대가 발전할수록 보편적으로 가지는 심미적인 기준 자체는 크게 다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육지에 있을 때 유치부 전도사를 한 적이 있는데요. 당시 유치부 아이들이 한 40명 정도 되었던 것 같아요. 5세부터 7세까지였는데요. 이 아이들도 보면 선호하는 선생님이 있습니다. 젊고 예쁘고 화장을 진하게 한 선생님들을 좋아하더라고요. 아 얘들도 각자의 미의 기준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제 사울의 시대가 저물면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다윗이라는 인물이 새롭게 발탁되는 과정의 시작이 기록된 본문입니다. 본문 16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 라는 말씀을 하시죠.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위를 끝내셨다는 이 언급은 사실 이전부터 계속 있기는 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사울이 왕이 되고 난 이후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번제를 드렸을 때, 그때 왕의 날이 길지 않을 것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세울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었죠.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기회를 부여하여 주셨습니다만 사울이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고 탐욕을 부렸을 때 사울의 폐위 선고가 확정되고 말았던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소식을 들었을 때, 사무엘은 계속해서 슬퍼했던 것 같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그가 범죄하였을 때도 근심하며 밤을 세워 기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렸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도 사무엘은 지속적인 슬픔에 잠겨 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처럼 슬퍼했던 이유는 단순히 사울의 처지가 불쌍해서 슬퍼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울의 슬픔은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대로 왕을 세웠으나, 왕으로 세움받은 사울은 첫 마음을 잃어버리고 몰락하여 버려진 바 되었고, 또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게 될 이스라엘을 생각하니 그 마음이 괴로워 슬퍼하였던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향하여 너가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라고 물으시면서 새로운 왕을 세울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인물을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서 찾을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성경에 룻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룻기를 보면 보아스가 나오죠. 보아스는 이새의 할아버지입니다. 다윗에게는 증조할아버지가 보아스가 되는거죠. 보아스는 당시의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의 며느리었던 룻이 보아스에게로 들어가 그 기업을 잇는 내용이 바로 룻기입니다. 이 룻기의 내용이 성경적인 며느리 상 때문에 기록된 것으로 설교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그와 같은 내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순전한 며느리를 드러내기 위해 룻기가 쓰여진 것은 아닙니다. 룻기의 중심 내용은 어찌보면 가장 마지막 4장 21절 22절에 기록된 것처럼 보아스는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서와 역대기에서 다윗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기는 합니다만 이 다윗의 혈통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록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룻기의 중심은 다윗의 혈통에 대한 내용을 확증하고 다윗 가문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나중에 룻기를 묵상할 때가 되면 좀 더 자세히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관심은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향하여 갑니다. 제가 저의 영어 이름을 데이빗으로 지었는데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의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다윗이기 때문입니다. 다윗만큼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 또 아픔과 회복의 관계를 경험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윗 가문의 역사이기도 하죠.
이제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아 기름을 부어야 하는데, 사무엘도 사울이 겁이 났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사울은 이미 왕으로서 자신의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고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이전에 사무엘이 사울을 향해 하나님의 심판의 뜻을 선포했을지라도, 그것은 선지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였기에 감당했던 것이지만,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 기름을 부으러 간다는 것은 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왕이 있는데요 새로운 왕을 세운다는 것은 바로 쿠데타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이 소식을 사울이 듣는다면 나를 죽이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였죠.
이미 하나님께 버림 받았고, 자신의 왕권이 인정받지 못하는 위치라는 것을 사울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그 왕위를 더 오래 지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사무엘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소식이 행여나 사울의 귀에 들어간다면 아무리 사무엘이라도 죽일 수 있는 광기와 힘을 사울이 가지고 있음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지혜를 주셔서 제사를 드리러 간다 말하고, 이새의 아들을 만나라 하십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도착을 하죠. 그러자 사무엘을 영접하러 나온 베들레헴의 장로들이 떨면서 사무엘을 영접합니다.
이를 통해서 사무엘이 얼마나 이스라엘에 영향력이 있던 선지자였는지를 알게 되죠. 그리고 선지자는 사사로서의 직분을 수행하기도 하였는데 종종 죄악을 범한 성읍을 방문해서 책망하고 징벌하는 일도 맡은 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성읍을 방문한 선지자를 두려워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그러한 장로들을 안심시키고 제사를 하러 왔으니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참여하도록 초청합니다.
사무엘이 처음으로 본 엘리압은 이새 가문의 장자였습니다. 사무엘이 이 엘리압을 보자마자 들은 생각이 하나님께서 새롭게 기름부어 세울 왕이 바로 엘리압이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무엘의 오판이었죠. 사무엘이 그런 생각을 가지자 하나님꼐서는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절인데요.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엘리압을 버리셨다는 말은 어떤 유기나 버려짐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요. 그가 단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의 시각이 엘리압을 보고 이 사람이 왕으로 세움받을 인물이구나! 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를 시작하기에 앞서 외모지상주의를 잠시 말씀드렸잖아요. 아마 엘리압의 외모가 생각보다 출중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외모로 출중했던 한 사람을 알고 있죠. 바로 사울입니다. 처음에 사울이 성경에 등장했을 때 사울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외모로서는 아마 엘리압보다 사울이 한 수 위이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 준수한 외모를 가졌던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엘리압도 준수한 키와 용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외모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외모라는 것이 단지 우리의 생김새만을 이야기 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이 가진 능력, 재력, 학력, 직장까지 다 견주어서 봅니다. 물론, 성실하게 공부하고 좋은 기회를 잡아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된 것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문제는 그 외적인 것이 그 사람을 대변하는 전부인 것 마냥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지금 우리 사회적으로 양극단으로 갈리고 있는데요. 그중에 제가 정말 얼마 전에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몇 해 전부터 들리던 소문이기도 하지만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자기 집이 아파트 몇 평을 사는지, 엄마 아빠가 국산차를 타는지 외제차를 타는지를 가지고 그 또래 안에서 급을 나눈다고 하더라고요. 또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이 그 또래 집단에서 기죽으면 안된다고 무리해서 차를 바꾼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방학 기간이나 학기 중에 해외여행을 다녀온 아이들끼리 외국을 안 다녀온 아이들을 은근히 무시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정말 아이들의 잘못일까요? 이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죠. 이건 이런 사회를 만들어 놓은 어른들의 책임인 것이죠. 이 세상의 가치관, 그중에서 물질 만능주의, 외모지상주의가 가장 높은 가치에 있다고 아이들에게 주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왜 주일학교가 쇠퇴하고 있을까? 왜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중고등학생이 되면 그리고 청년이 되면 왜 교회를 떠날까? 라고 생각해보면 이미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어떤 가치가 소중한지를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아이들의 내면과 중심을 바르게 성장시키지 않고 이 세상의 가치를 가르치고 주입하면서 신앙생활도 잘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것에 중심적 시각을 가진 사무엘을 향해서 아니다. 그의 외모를 보지 말아라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는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제 엘리압의 동생들인 아비나답과 삼마를 비롯하여 일곱 아들이 다 사무엘에게 나아오지만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들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이새에게 묻습니다. 아들이 다 여기 있느냐? 그러자 이새가 아닙니다.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는 자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그를 부릅니다. 왜냐면 양을 치러 갔기 때문에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죠.
이 말씀을 통해서 이새가 다윗을 얼마나 대충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들어오며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제사에 참여 시켰습니다. 하지만 이새는 다윗은 그 제사 자리에 초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만큼 눈 밖에 나 있던 존재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이 다윗을 부르자 다윗이 양을 치다가 돌아와서 사무엘을 대면하죠.
1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막내 아들이니 나이도 제일 어렸을 것입니다. 스무살이 채 안된, 십대 중반 정도의 소년이었습니다. 양을 치다 왔으니 입고 있는 옷도 변변치 않고 가축 냄새가 났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눈빛이 살아 있고 얼굴은 아름다움이 흘렀습니다.
그의 빛이 붉다는 것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머리털이 붉은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고요. 또 홍안이다. 얼굴이 붉은 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동번역서에서는 얼굴빛이 붉다고 번역하였는데요. 저도 아마 얼굴이 붉은 홍안이 아니었을까? 라는 추측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추운 곳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얼굴이 붉게 변하는 안면홍조가 생기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보통 잠시 춥다가 따뜻한 곳에 돌아오면 다시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도 하는데요. 추운 곳에서 너무 장시간 노출되어 있다 보면 그 홍조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모세혈관이 확장된 뒤에 수축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요.
다윗이 목동으로 들판에서 양을 치면서 그 추위를 견뎌내야 했기에 그 홍조가 얼굴에 남아있지 않았을까? 라는 추측을 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그 중심이 올바른 소년이었음을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일어나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다윗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그 기름부움과 함께 하나님의 영이 다윗에게 충만히 임했음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모르는 신자들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면 여러 번 들을만한 아주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의미로 다가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우리는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깊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하는 것과 믿음은 조금 다른 영역입니다. 이해는 지적인 영역에서 발동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인 것을 깨닫는 것은 지적 동의죠. 지적 동의까지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믿음과 결단으로 옮기는 것은 영적인 행위이며 우리의 의지적인 발현이 이루어져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지만, 앎에 멈춘 채로 그 말씀에 내 영혼과 삶이 영향을 받지 않고 우리의 눈을 돌려 이 세상의 가치와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그것을 우리의 삶에, 또 우리의 자녀들에게 주입하고 가르치고 있다면, 그것은 야고보 사도가 말한 대로 죽은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았지만, 우리에게도 왕을 주소서! 라고 말했던 무지한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이죠.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향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중심이 바로 선 다윗에게 있었죠.
사울도 처음 기름 부음을 받을 때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중심이 서서히 무너져갈 때 그는 돌이키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더욱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 버린 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중심은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나요?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사울과 같은 모습인가요? 하지만 이 말씀이 살아 있어 우리의 심령에 거룩한 부담을 안겨주고, 하나님의 뜻을 향하게 하는 거치는 돌이 되어 우리의 심령에 들려진다면 그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은혜와 기회를 베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물질이 주인인 이 세상에서 갈팡질팡 하는 나의 마음과 발걸음을 주님께로 향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복을 가르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주님의 마음이 합한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이 찬양을 함께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와 논리에 빠져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던 우리의 삶을 회개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주님을 좇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찬양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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