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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군의 느릿느릿

두번째 용서

by 터틀곽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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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용서

(삼상 26:13~25)

 

오늘의 본문은 다윗이 사울을 두 번째 살려주는 내용이 기록된 본문입니다. 이전 본문에서 우리는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었던 일이 있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제와 오늘의 본문을 보면 사울은 또 한번 다윗을 잡으려 했었고 다윗은 그런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사울을 살려줍니다. 어제의 본문으로 보셨겠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아니하고 사울 옆에 있었던 창과 물병을 가지고 몰래 떠나서 먼 산꼭대기로가서 사울의 진영을 향하여 외치는 장면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울이 아니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부릅니다. 아브넬아 너는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라고 아브넬 부르자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라고 아브넬이 다윗을 향해 되묻습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경호의 책임을 맞고 있는 아브넬을 비난함으로서 두 가지 사실을 전합니다.

 

첫 번째는 이번에도 사울은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놓여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이 창과 물병을 가지고 온 것은 그 안에서 어떤 일도 할 수 있었던 상황임을 드러내는 증표입니다. 게다가 군인이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바로 전장에서 싸울 수 있는 무기입니다. 군대에 입대를 할 때 총기를 부여받는데요. 총을 받을 때마다 외치는 구호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총은 제 2의 생명이다! 라고 외친 이후에 총기를 받습니다. 그만큼 군인에게는 총기가 가장 중요한 것이죠. 행군을 나갈 때도 총을 들고 행군을 하는데요. 행군을 하느라 정신 없이 총을 놓고 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총을 몸에 두른 엑스반도라고 하는 멜빵과 같은 것에 묶어놓습니다. 그만큼 무기는 중요한 것이죠. 그런데 다윗이 창을 가져왔다는 것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앗아 온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자신의 무기인 창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미 전쟁에서 패배한 것 죽임을 당한 것과도 같은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이 사실을 통해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증거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전에 사울이 용변을 보러 들어왔을 때, 사울을 베지 않고 그의 옷자락만을 베어 사울을 살려주었었죠.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건짐 받았던 사울은 그 다윗의 선대를 무시하고 또 다시 다윗을 죽이러 군사를 일으켰죠. 하지만 다윗은 재차 자신을 죽이러 온 사울을 다시 한번 선대하여 그의 목숨을 구원하여 줍니다. 창과 물병이 여기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울의 겉 옷자락만 베은 것과 같은 상황이었던 것이죠.

 

또한 다윗이 사울을 직접 부르지 않고 아브넬을 부른 것은 다윗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사울을 처단할 수 있는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브넬은 사울의 경호처장과 같은 사람인데, 아브넬은 자신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깊이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어제 본문12절에서 살펴보셨겠지만 그들이 잠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지만 사울과 아브넬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가장 측근이며 경호처장을 맡고 있는 아브넬을 책망하는 것을 통해서 사울이 가장 믿고 가까이 하는 아브넬 마저도 사울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아브넬을 불러 그를 책망하고 있는 것이죠.

이 목소리를 들은 사울이 17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하고

 

참 태새전환이 빠릅니다. 분명히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키고 다윗을 쫓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목소리를 들으니 이번에도 다윗이 자기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상황속에서도 죽이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듣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향하여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너의 목소리가 맞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이죠.

 

사울이 다윗의 목소리를 몰라서 이것이 네 음성이냐. 라고 묻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 용변을 볼 때 자신을 죽이지 않고 선대하였던 그 일이 기억남과 동시에 또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민망함과 수치스러움으로 인하여 자신이 죽이려 했던 다윗을 향하여 내 아들아.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다윗 입장에서는 내 아들아 라고 부르는 사울의 부름을 들었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요?

 

자신을 두 번씩이나 죽이러 온 원수가 나를 향해 내 아들아 라고 부르는 그 부름이 결코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가증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데요. 다윗은 이와 같은 사울의 부름 앞에 내 주 왕이여 라고 겸손하게 화답합니다.

 

그리고는 사울을 향하여 자신을 한번 더 변호합니다. 만약 나를 잡으라고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자신은 얼마든지 희생제물이 되겠지만, 만약 다른 이들이 왕을 충동질 하였다면 그들은 저주를 받을 것임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전부터 다윗은 사무엘처럼 선지자적 소명을 가지고 사울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를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죠.

 

또 다윗은 20절의 말씀을 통해서 사울을 향하여 한 가지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끈질긴 추격으로 인해 다윗은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다른 지역으로 도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지 않는 척박한 땅으로, 광야로, 나아가고 또한 유대 땅이 아닌 이방 땅에서 기생하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죠. 다윗은 고향도 그립고, 아버지와 형제들도 그리웠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였던 요나단과, 사울이 맺어준 미갈이라는 아내도 그리웠었겠죠.

 

그러기에 이 이방 땅에서 죽임 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벼룩과 같은 존재로 묘사하며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겨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죠.

 

어쨌던 사울은 이러한 다윗의 호소를 듣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해를 끼치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는데요. 이러한 요구에도 다윗은 사울을 믿지 못하여 유다로 돌아가지 않고 블레셋 땅으로 나아가게 되는 내용이 2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의 원리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관한 질문을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죠. 내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는 것이 옳습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일곱 번이라는 횟수를 제시한 것은 자신의 이러한 용서의 기준이 아주 훌륭한 기준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의 가르침에는 네 형제를 세 번까지는 용서하라는 것이 가르침이었는데요. 이것도 같은 죄악을 범죄하였을 때의 수치였습니다.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될까요? 라는 이 베드로의 질문은 세 번 뿐만 아니라 일곱이라는 완전수에 빗대어 말하며 자신의 관대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번까지라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용서에 대한 인간의 정의와 예수님의 정의가 다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 말씀에 반해서 우리는 참 용서에 인색한 인생을 살 때가 많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 안에서의 용서는 더욱 인색한 것이 사실이죠. 누구보다 서로 사랑해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을 가장 많이 배운 사람들이 신자인데, 신자들은 어떤 이유인가 참 서로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상처 받고 상처 내고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신자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이유가 사람과 사람사이에 생기는 갈등과 상처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소주라도 한잔 마시면서 풀기라도 하지만 희한하게도 우리는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라고 말씀하고 계시죠. 그만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화평과 용서를 명하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목숨을 취할 두 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을 용서한 것은 용서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된 인물인 다윗이니까 용서할 수 있었을거야. 나는 그렇게 못해. 내가 먼저 용서할 수 없어. 내가 먼저 손 내밀 수 없어. 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먼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달라고 간구 하시는 기도의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용서와 화평의 삶을 살아가기에 힘쓰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내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은 가족이나 교인인가요?

 

 

질문2.

이것만은 용서할 수 없어. 라고 붙들고 있는 상처가 있으신가요? 나는 그 상처를 어떻게 다루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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