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곽군의 느릿느릿

다윗과요나단

by 터틀곽 2023. 3. 14.
728x90
반응형

다윗과 요나단

(삼상 20:24~34)

 

화요일과 수요일의 본문에 이어서 오늘의 본문은 다윗과 요나단의 맹세와 함께 다윗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울의 본심을 재확인하기 위한 일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본문입니다. 사울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다윗은 요나단을 찾아가 어찌하여 사울이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는가! 라고 탄식을 하죠. 요나단은 다윗을 달래려고 하지만, 사울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이미 요나단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과 요나단은 암호를 짜고 사울의 본심을 확인하는 행동을 시작합니다.

 

초하루가 되는 날에 왕과 늘 함께하는 식사자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식사에 빠지기로 하고 그때 사울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였죠. 만약 사울이 다윗이 없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다윗의 목숨이 부지될 것이고, 만약 분을 내고 다윗을 찾는다면 반드시 다윗을 해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때는 사울을 떠날것임을 약속합니다.

 

다윗은 들판에 숨어있다가 요나단이 화살을 쏘아서 화살을 찾으러 간 신하에게 화살이 가까이 있다. 라고 하면 다윗의 목숨이 부지될 것이며, 화살이 멀리 갔으니 더 멀리 가라고 하면 그때는 실제로 멀리 떠나라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실제 초하루가 되어 함께 왕과 함께 식사의 자리가 마련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약속한대로 그 식사 자리에 참석을 하지 않습니다. 2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왕은 평시와 같이 벽 곁 자기 자리에 앉아 있고 요나단은 서 있고 아브넬은 사울 곁에 앉아 있고 다윗의 자리는 비었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왕은 평상시와 같이 벽 곁에 자기 자리에 앉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벽 곁에 앉았다는 것은 벽을 등지고 앉았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뒤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벽을 등지고 앉는 것입니다. 어떤 역사에서든지 왕은 가장 후미에 벽을 등지고 앉아서 입구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갑작스러운 암살이나 공격에서 안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죠. 그리고 요나단은 그 자리에 서있으며 아브넬은 군대장관이자 요나단의 숙부이기도 했습니다. 그 아브넬은 사울의 곁에 앉아 있었죠. 그리고 다윗의 자리는 비어있었습니다.

 

이 식사의 자리는 생각보다 간촐한 모임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가족 모임이죠. 왕인 사울과 왕의 아들인 요나단, 그리고 요나단의 숙부인 아브넬과 왕의 사위인 다윗이 모인 식사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보통 가족 모임을 할때는 다른 외부인들을 거의 초청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굳이 외부인을 초대할 필요가 없기도 하고 또, 가족 간에 편하게 식사를 즐기기 위해서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네 사람의 모임은 그다지 편해 보이는 식사 자리는 아니죠. 오히려 긴장감과 불편함이 감도는 식사 모임이었습니다.

 

첫날에 다윗이 불참하자, 사울은 다윗이 어떤 부정함에 의해서 식사자리에 나오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하고 다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정결법에 의해서 시체를 만지거나 다른 어떤 이유에 의해서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튿날에도 다윗이 모습을 비추지 않자 요나단을 불러서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도 오늘도 식사자리에 나오지 않았는지를 묻습니다. 다윗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고 이새의 아들이라고 다윗을 칭한 것은 성경적 용례를 보아 다윗이 그 대적들에게 불리울 때 부정적인 의미로 이새의 아들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웠었는데요. 이와 같은 견해로 볼 때 사울의 심경이 다윗을 향하여 매우 부정적이고 불편한 감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어제는 혹시나 부정한 일이 있어 식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오늘에는 식사에 나와야 할 것인데, 왜 다윗이 나오지 않느냐? 라고 물으며 요나단을 추궁합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다윗과 약조한대로 가족과 제사할 일 때문에 다윗이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말을 사울에게 전합니다. 그 내용을 들은 사울은 불같이 화를 내죠 3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 사울의 폭언은 사울의 심리적인 불안감과 그리고 자신이 세웠던 계획의 실패에 대한 분노였을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었지만, 이 식사의 모임은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잔치의 성격이 아니라 가족 모임처럼 눈에 띄지 않는 모임이었기 때문에 사울은 그 자리에서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을 것입니다. 군대장관인 아브넬을 그 자리에 부른 이유도 아마 다윗을 처단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브넬을 그 자리로 불렀던 것이겠죠.

 

하지만 다윗이 베들레헴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듣자 자신의 계획이 모두 무산되어버리게 되어 그 일을 미리 알리지 않은 요나단을 향하여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자신의 친아들인 요나단을 향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습니까?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계집은 요나단의 생모인 아히노암을 가리킵니다. 사울이 말하는 패역무도한 계집의 언급은 자신의 아내에 저주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울은 요나단의 어머니인 아히노암을 나쁜 여인으로 몰아버림으로서 요나단을 출생한 그 출생의 통로인 어머니의 태, 그 시작부터 요나단을 잘못된 인물로 선언하며 요나단을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욕 중에서도 가장 참을 수 없는 욕이 바로 부모님을 들먹이는 욕을 가장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근동지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상대방을 가장 비하하면서 초라하게, 또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욕이 바로 그의 부모를 욕하는 것이죠.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그러한 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아 사울의 증오심과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미 사울은 하나님께 버려진 이후에 그 인격과 심성이 파탄나있는 상태임을 이 본문을 통해서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요나단을 향하여 너가 이세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너의 수치와 너의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그 이유가 31절에 등장합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말하죠. 다윗이 사는 동안에는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 언행을 통하여서도 사울은 자신의 왕위를 요나단에게 물려주고자 하였던 것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이 다윗을 숨겨줌으로 인하여 그 왕위가 위협받을 것 때문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요나단은 무엇이라 말합니까? 다윗이 죽을만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전에도 다윗을 변호했던 요나단은 한번 더 다윗을 변호합니다. 그러나 사울이 일어나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식에게 칼을 겨누는 부모는 이미 부모가 아니죠.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더이상 부모가 아닙니다. 이미 악한영에 씌여서 상식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성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다윗을 향한 분노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자신의 아들인 요나단이 다윗의 편을 들고 있으니 그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요나단에게 까지 칼을 겨눈 것이죠.

 

요나단도 화가 치밀어서 그 식탁에서 떠나고 둘쨋날에는 그 슬픔으로 인하여 아예 식음을 전폐하고 다윗을 위하여 슬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의 격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다윗과의 신의를 지키고 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다윗을 변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그렇게 사울의 마음을 돌린 적이 있었기에 그렇게 다윗을 변호하였지만, 그 분노에 사로잡힌 사울은 칼까지 빼어들며 자신의 아들을 겨누었습니다.

 

인간은 감정에 사로잡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할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엉뚱한 곳에 분노를 분출하기도 하고요. 요즘은 분노조절장애라는 병명도 생겨나는 시대입니다. 아마 사울이 이 분노조절장애를 겪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같은 병이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을 직시하지 아니하고 감정의 노예가 되어 감정대로 행동하고 그 감정에 자신의 판단을 맡겨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건임과 동시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아주 귀한 하나님의 선물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사울은 자신의 아들인 요나단을 향하여 가장 가슴 아픈 욕설과 함께 그를 저주하고 또 다윗을 변호하는 그 아들까지 죽이고 싶은 감정에 휩싸였던 것이죠.

 

우리는 오늘의 본문 안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저는 분노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울의 분노죠. 사울의 분노는 누군가를 죽이는 분노입니다. 다윗을 죽이고 싶어했고, 다윗을 변호하는 자신의 아들인 요나단까지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두 번째는 요나단의 분노입니다. 34절에 보면 요나단도 심히 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요나단의 노함은 깊은 우정이 아버지 때문에 깨어져야 하는 슬픔과 의분이었던 것이 다르죠.

만약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은 재물과 권력을 원했다면, 당연지사 아버지와 손을 잡고 다윗을 제거해야 맞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그러한 악한 영들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다윗을 변호하며 그의 분으로는 금식을 하며 슬퍼하는 의분을 내었습니다.

 

요즘은 정말 자기중심적인 시대입니다. 내가 가장 중요하고 내가 제일 먼저 보호받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대로 일이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왕의 아들로써 얼마든지 힘을 발휘하고 다윗을 몰아내거나 죽이고 자신이 나중에 왕위를 물려받을 생각을 할 수 있었지만 요나단을 그러한 이 땅에서의 가치를 버리고 오직 다윗과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우리도 요나단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다윗과 요나단 같이 믿음의 지체들이 서로 다윗이 되고 또 요나단이 되어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축복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질문1.

다윗과 요나단이 그렇게 서로의 목숨을 의탁할 수 있을만큼 가까워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질문2.

요나단이 다윗에게서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목숨을 걸면서까지 친구의 앞날을 응원할 수 있었을까요?

728x90
반응형

'곽군의 느릿느릿'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윗과 아비가일  (1) 2023.03.20
나의 탓입니다  (1) 2023.03.15
가나안 남부정복  (0) 2023.03.14
하나님의 영이 임할 때  (0) 2023.03.04
미갈을 아내로 얻은 다윗  (0) 2023.03.04